소설리스트

외전 5화 (242/254)

그리곤 그녀가 공손한 어투로 성익권에게 마저 고했다.

“네. 구덩이에 빠진 이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 흙을 주기적으로 적셔 부드럽게 풀어주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 빠진 듯하면 뚜껑을 덮거나 덮어 놓은 뚜껑 안으로 기름이나 물을 부어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라고도 알려 주었고요.”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 건가? 혹여 한패는 아니었어?”

“저도 처음엔 그것을 의심했으나 곧장 멀리 떠나 다시 찾아오지 않은 것을 보면 한패는 아닌 듯 했습니다. 집에 들어온 것도 웬 무뢰비들이 밤중에 담장을 넘고 있으니 혹 그들이 무슨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하여 뒤따라 들어와 본 듯했고요. 그자의 조언이 도움이 되어 다행히 저택을 꾸려 가고 있습니다.”

“자네가 무사하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런 일을 겪었으면 관병들을 불렀어야지. 홀로 고생이 많았겠어.”

“아닙니다. 전하께서도 살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택 바깥에서 저를 노리는 이들이 이 저택을 불태우지 못한 것은 오로지 전하께서 제게 관심을 보여 주신 덕분입니다.”

“그건 당연히 할 일이었지. 어쨌건 이 인원으로 저택을 지키려면 힘에 부치겠군. 내 돌아가면 관병들을 보내 주지. 도움이 될 거야. 위험한 일에 자네는 절대 직접 나서지 말게.”

“아닙니다. 살펴 주시는 은혜는 망극하지만 그러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괜한 오명을 쓰실 수 있습니다.”

황급히 성익권을 만류한 정치화가 덧붙였다.

“저도 어차피 더 이상 도성에서 할 일도 없고. 아비의 시신이 도착하는 대로 제를 치른 후, 다른 곳으로 떠나 볼까 합니다.”

“떠난다고?! 어디로?”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이 넓은 산천에 제 몸 하나 누일 곳이 없겠습니까. 하여 이 소동도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니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여인의 몸으로 어디로 가려 하는 건가. 그대의 아버지도 도성을 나갔다가 변고를 당했는데. 상황이 나아졌다고는 해도 바깥의 치안이 아직 좋지 못할 걸세.”

“염려 마십시오. 이래 봬도 이전에도 일 년 이상 바깥에서 홀로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잘 지냈으니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일 년 이상?? 어쩌다가?”

“어, 그게…….”

“그게?”

“그게 그러니까……. 사정이, 사정이 좀 있어서…….”

“어떤 사정.”

“아…….”

‘전하께서 하문하시는데 대답해 드리지 않을 수도 없고. 이 일을 어쩐다.’

목 뒤가 식는 것 같았던 그녀가 조심히 대답했다.

“그것이, 사실은…….”

“사실은?”

“사실은 아버지께서 제 혼처를 정해 주셨는데, 제가 그만 버릇없이 아버지의 명에 반항하여…….”

“음? 예판이 정해 준 혼처가 어디였는데 집까지 나갔어야 했나?”

“그것이…… 윤정일 대감 댁입니다.”

“응? 그 집에 아들이 또 있었나? 이미 장성한 두 아들은 모두 혼인을 하였을 텐데?”

“…….”

“혹시 잘못 얘기한 건가?”

“……아닙니다. 혼담은 두 아드님이 아니라 그분과 직접…….”

“뭐라?!”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는 저를 그 댁의 후처로…….”

“…….”

“…….”

“아니, ……예판이 대체 왜? 예판에겐 아들이 없으니 데릴사위를 들이는 편이 더 좋지 않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후처를 맞아 적자를 보실 생각이었고, 만약 제가 그 댁의 후처로 들어가 아들을 낳는다면 재산은 두 아드님이 아니라 제가 낳은 아이에게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정치화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어이가 없었던 성익권이 조금 웃음을 흘렸다.

‘집을 나갈 만했군. 예판의 욕심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까지 저리 이용하려 할 줄은 몰랐는걸.’

“헌데 그러면 나가서 어디서 산 건가. 여인 혼자 도성에서 지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사내의 복식을 하고 있어 괜찮았습니다.”

“숙식은? 집에서 가져간 돈으로 해결했던 건가?”

“아닙니다. 집에서는 한 푼도 가져가지 않았고, 밖에서 그……, 그림을 그려서 먹고살았습니다.”

“그림을 그려서? 재주가 뛰어난가 보구나.”

“미, 미천한 솜씨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남아 있는 그림이 있다면 내게도 한번 보여 주거라.”

……남아 있는 그림이 있냐고?

그동안 그림을 팔았던 가게 주인은 그녀가 남장을 했었다는 것도.

비밀리에 치수사를 불러 우물을 파고 곡식을 사들였다는 것도 전부 관병에게 고했었다.

그러다 보니 성익권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려 한다면, 그녀가 춘화를 그려 생활해 왔었다는 얘기가 금세 귀에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러다 진짜로 내가 그렸던 춘화를 전하의 눈앞에 들이밀게 되는 거 아닌가.’

그 생각에 안색이 허옇게 질린 정치화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쳤지.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는 왜 해 가지고.’

“아, 아닙니다. 이미 예전에 다 판매하고 지금은 남아 있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미천한 솜씨지만 혹 전하께서 받아 주신다면 한 장 그려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솜씨가 궁금하니 나중에라도 꼭 한 점 내게 선물로 보내 주거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혹시 이판에게선 그 이후 다른 연락이 있었느냐.”

“아뇨. 전에 양녀가 되라는 말씀을 거절한 이후로 따로 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렇군. 오늘 내가 여기 들렀던 것은 그것을 알고싶어서였다.”

이판을 개입시킨 것은 제 실수라는 말을 채 하지 못한 채로 성익권이 덧붙였다.

“나도 처음엔 좋은 방법이 될거라 생각했었으나 내켜하지 않는 일을 강요할 수는 없지. 그러니 혹 그가 불합리한 상황에서 네게 강요를 이어가거나 한다면 내게 도움을 요청해도 좋다.”

“아닙니다. 이깟 일에 감히 전하의 힘을 빌리다니요. 그리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읍할 따름입니다.”

정치화가 황급히 거절했다.

지금에야 그녀를 신경 써 주고 있다고는 해도 그것이 온전히 그녀를 위함이겠나.

‘분명 세화가 가진 천인의 힘을 신경 쓰시기 때문이겠지.’

“정말 괜찮겠나.”

“예, 전하. 문제없습니다.”

‘게다가 그 사내에 대한 것도 있고.’

성익권에겐 그녀를 구해준 이가 한패가 아닌 듯 했다 둘러대기는 하였으나, 이유 없는 호의를 무턱대고 믿기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겪은 이후였다.

게다가 순찰을 돌던 관병도 아니고, 무위가 뛰어난 기인이 공교롭게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들을 발견하고 뒤를 밟았는데.

마침 그자들이 예판의 저택을 급습하길래 따라 들어와서 침입자들을 단번에 쓰러뜨리고 유유히 사라진다?

치화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그게 말이나 되는 얘긴가.’

갓을 눌러써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제법 멀끔하게 생기긴 했었지. 다수를 상대하던 무예 솜씨도 범상치 않게 보였었고.

“여길 다 갈아엎어서 당신 목숨을 구한다면 당신 어머니도 잘했다고 박수 치실 것이 분명합니다. 제일 앞장서서 구덩이를 파실지도 모르죠.”

그 말을 해 줬을 때까지만 해도 사실 정말 자신을 도와주려는 이인가 싶어 긴가민가해지긴 했다.

홀연히 사라지려는 남자를 몰래 뒤따라가보았다가 그 남자가 침입자들과 비슷한 덩치 큰 사내들과 접촉하는 모습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위험한 상태에서 구해 주는 척해 호감을 사 보겠다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원.’

찰나나마 ‘정말인가?’ 싶었던 자신이 등신 같았다.

사내를 생각하던 치화의 눈매가 다시금 일그러졌다.

천인의 친우인 것이 알려진 이후, 저를 질시하는 이들과 부러워하는 이들, 이용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생겼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헌데 그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내가 또 그때처럼 무력하게 울고만 있을 줄 아나 본데, 니들 다 착각하는 거야.’

이 정도도 혼자 해결 못 해서야 어디 가서 세화 그 아이의 친구라고 입이라도 벙긋할 수 있겠냐고.

다행인 건 꼴사나운 그 연극이 그녀를 상처 주기보다 호감을 사는 목적으로 꾸며진 것 같다는 점이다.

‘분명 내가 위험해지면 또 오겠다는 말을 남겼었지.’

한패 주제에 마치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기라도 하는 척.

담장 아래에 구덩이를 파 놓으면 긴박한 상황에서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느니, 별 같잖은 조언을 남겼다.

‘오냐. 널 방심시키기 위해 말을 따르는 척해 두었으니 또 와 보기만 해 보거라.’

정치화의 표정이 자연히 비장해졌다.

그리고 그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는 것을 보니 성익권도 더 할 말이 없었다.

알았다고. 허나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관아에 알리고 보호를 받으라고. 그런 뻔한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그러고 나서도 뒤돌아 궁으로 돌아오는 길이 찜찜했다.

이판이 머리가 있다면 직접 손을 쓰진 않을 듯하지만.

‘또 사람이 욕심을 부리자면 앞뒤 생각을 못 하기도 하니까.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그리 생각한 성익권이 홍 내관에게, 돌아가는 대로 관인대장을 포함해 사람을 뽑아 저택을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다.

재앙도 끝난 이 시점에 더 이상의 무도한 사건은 한 건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 * *

“전하께서 찾아가셨었어?”

이판의 눈이 가늘어지자 그의 심복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늦은 밤, 홍 내관만 대동하고 들어가셨었습니다.”

“혹시 뭔가를 눈치채신 것 같던가?”

“그건 아닐 겁니다. 전하이신 걸 알고 혹시 몰라 지켜보던 이들까지 모두 물렸습니다.”

“어쨌거나 전하께서 그 아이를 신경 쓰시는 것 같으니 오래 끌어서는 안 되겠군. 혹여 관병들을 보내 보호하시기라도 하면 일이 어그러지니, 더 두고 볼 것 없이 내일부터 곧장 일을 시작하게.”

“예. 이판 어른. 헌데 저…….”

“음? 뭐냐.”

“저……. 그 말씀하신 보상은 언제쯤 저…….”

“…….”

“제, 제가 여쭙는 것이 결코 아니고 그 미천한 것들이 대감께서 약속하신 보상은 언제 얻을 수 있냐고 하도 난리를 피워서.”

“지금 그깟 것들 하나 다루지 못해 내게 그딴걸 묻는 것이냐! 내가 평생 주지 않겠다면? 그땐 어찌할 것이라더냐! 혹시 그 천한 놈들의 말이 아니라 니놈이 하고 싶은 말은 아니냐?”

“아,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그때의 귀기(貴氣)를……, 아니. 아닙니다. 이놈이 실언하였습니다. 명하신 일들을 끝마치고 오겠습니다.”

“잠깐.”

“예?”

“아니다 나가보거라.”

“……예.”

심복이 방문을 닫고 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판이 혀를 끌끌 찼다.

‘저놈도 곧 죽여야겠군.’

그저 돈이나 바랄 것이지. 천한 놈들이 귀한 것을 바라기 시작했으니 감히 살려둘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큰일을 앞두고 지금 사람을 갈아치울 생각은 없어 잠시 당근을 던져두려 했다.

놈들이 원하는 귀기를 보상으로 줄 수는 없지만 예판의 재산이 손에 들어오면 그것은 모두 너희에게 분배해줄 것이라던가.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라거나.

그런 말들을 하려 심복을 잠시 멈춰세웠었으나.

‘그 욕심많던 예판의 재산이 얼마나 될지 모르는데 섣불리 꺼내둘 말은 아니군. 게다가 일이 끝나는대로 모두 죽여버리면 될 것을 뭘 이런 수고까지.’

예판의 재산이 손에 들어오면 뭘 해 볼까. 게다가 그 아이가 양녀가 되고 나면.

그 미래를 떠올리는 예판의 손이 닿는 곳엔 품안에 안기는 크기의 목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를 태우고 있기라도 한 듯 때때로 검은 연기를 흘리는 목함을 이판은 더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가져왔다.

일전 그 마지막 기우제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던 흑룡이 떨어뜨린 파편 한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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