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4화 (241/254)

헌데 바쁘게 걸음 한 목적지는 굳게 빗장이 걸려 있었다. 늦은 밤이었으니 대문이야 당연히 닫혀있겠지만, 손님을 받지 않겠다는 표시인 푸른 주렴 몇 줄이 문 끝에 달린 채였다.

“대문을 닫아걸었어? 누구의 방문도 받지 않겠다고?”

“예, 벌써 사흘이나 되었습니다.”

“아니 홍 내관, 그걸 왜 지금 얘기하는가?”

그들은 이미 예판의 저택 앞에 와 있었다.

홍 내관이 당황한 낯을 하고 대답했다.

“그것이……. 전하께서 따르라고만 하시고, 어디를 가시는지 말씀을 해 주시지 않아서……. 저도 이 대문을 보고 나서야 ‘아, 이곳이 목적지였구나. 헌데 이곳은 대문을 닫아걸었다는데?’ 하는 생각이 나서…….”

“이미 왔는데 어쩌겠느냐. 문이나 두드려 보아라.”

“내일 사람을 시켜 오늘 다녀가셨다고 전하게 할 테니 날이 밝았을 때 궁으로 불러들이시는 게 어떠하십니까.”

“그럴 생각이었으면 내가 직접 내일 왔겠지. 두드려 보래도.”

주위를 살피던 홍 내관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럼 전하. 소란을 만들기보다, 차라리 몰래 안으로 들어가시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너 지금 내게 이 나이에 도둑처럼 남의 집 담장을 넘으라는 말이냐?”

“도둑처럼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입니다. 넘는 건 소인이지요. 제가 넘겠습니다. 당연히 제가 넘을 생각이었습니다.”

홍 내관이 담장의 높이와 제 키를 가늠해 보며 대답했다.

그 사이 성익권도 주변을 돌아보았다.

홍 내관의 생각과는 달리 이미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 늦은 밤에 몰래 숨어서 저택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수상한데, 야밤에 누군가 담장을 넘는 꼴을 보고 있으면서도 침묵하다니.

‘소문이 듣던 것보다 더 좋지 않게 퍼지고 있기라도 한건가? 그래서 누구한테라도 상관없으니 예판의 가솔들이 해코지 당하길 바라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소문을 낸 자가 저택을 감시하는 중이던지.

뭐가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뭐. 둘다 정답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이런 쓸데없는 소문이 다시는 움트지 않도록 아예 싹을 뿌리 뽑을 필요는 있어보였다.

“비켜라. 내가 넘을 테니.”

“예?!”

“아래에서 받치지 않고 뭘 하느냐.”

“전하! 어찌 이런 일을 직접 하시려 하십니까. 제가 할 것입니다!”

“쉿! 목소리를 낮추거라! 네 몸은 그보다 더 낮추고.”

“아이고 전하.”

“어서. 하라는 데도.”

망설이던 홍 내관이 못버티고 몸을 굽히자 성익권이 판판한 등을 밟고 담장에 매달렸다.

왕년엔 자신도 무예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뭐 이까짓거. 이대로 부드럽게 안쪽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허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으헉!!”

“전, 전하!”

대경실색한 홍 내관이 곧장 끙끙대며 담장 위에 매달렸다.

“아니, 담장 밑에 웬 구덩이들이!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됐으니 가서 사람이나 찾아오거라. 이러다간 도둑으로 오인되어도 할 말이 없겠어.”

“일단 제 손을 잡으십시오. 어떤 도둑이 저희처럼 갓과 도포를 갖추고 나타난단 말입니까. 인기척이 느껴지면 제가 소란이 일기 전에 정리하겠습니다.”

“그럼 조금 더 깊게 뻗어 보거라. 흙이 부드러워 나가기가 쉽지 않구나.”

“여기 있습니다. 잡으십시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래. 다친 곳은 없…… 아니, 조심!”

“예? 으앗!”

구덩이를 피해 땅으로 내려온 홍 내관이 성익권을 꺼내기 위해 납작 몸을 낮추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런 홍 내관의 등을 구덩이 아래로 밀어 버렸다.

그와 동시에 뚫려 있던 곳이 나무판자로 막혀 버렸다.

본래도 어둡긴 했지만, 삽시간에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갇혀 버렸다.

갑작스레 벌어진 황망한 상황에 홍 내관과 성익권이 동시에 눈만 껌뻑거렸다.

“아니 이게 무슨.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거기 누구냐! 이런 무…….”

엄한 놈! 감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이런 망극한 짓을 벌이는 것이냐! 하고 소리치려 했건만.

홍 내관은 입을 열다 말고 도로 닫았다.

재앙은 끝났지만 가뭄 동안 주상에 대한 민심이 어땠었는지를 기억해 낸 것이다.

‘이곳에 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누군가 자신들을 구하러 올 가능성도 없다는 말이었다.

‘괜히 잘못 입을 놀렸다가는 저 무도한 것들이 오히려 주상임을 알고 우리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음이야.’

말을 삼키는 홍 내관의 모습에 성익권도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를 눈치챘다.

“장, 장 무관을 데려올 것을. 어찌 널 데려왔을까.”

홍 내관은 어떻게 그렇게 서운한 말씀을 하실 수 있느냐 말하는 대신 강하게 동의했다.

“어찌 무관 하나 대동치 않고 밖에 나오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아니, 뭐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 일단 자신들의 머리 위를 막은 저 판자부터 어떻게 해야지.

이러다가 정말로 저 무도한 놈이 일행을 데리고 오기라도 한다면.

그는 후계자도 잃고 중전도 잃었는데 이러다 대통이 끊기기라도 하면…….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이걸 어떡하면 좋으냐.”

“염려 마십시오, 전하. 제가 구덩이를 기어 올라가서 어떻게든 탈출할 기회를 노려 보겠습니다.”

하지만 돌도 아니고 흙구덩이를 기어 올라가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게다가 구덩이 안에 물을 뿌려 두었는지 흙벽이 온통 질척했다.

손가락을 박아 넣으며 애써 위로 기어 올라가도 곧 젖은 곳이 무너지며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들이 “설마 예판의 저택에서 날 죽이기야 하려고.” 이런 식으로 애써 불안감을 감추려 하고 있을 때였다.

구덩이 속을 어둠으로 뒤덮었던 판자가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혹, 거기 전, 전하십니까?”

“!”

성익권의 얼굴에 간신히 화색이 돌았다.

예판의 여식이 왔다.

* * *

“죽여 주십시오, 전하. 근래 무도한 이들의 손에서 저택을 보호한다는 것이 그만, 이런 망극한 짓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되었다. 헌데 이런 대비라니. 혹 이미 습격이 있었던 것인가?”

“……예, 처음이 아닙니다.”

“그럼 자네가 저택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저 구덩이를 파 놓으라 지시한 것이고?”

“아, 그건 어떤 분께서 조언을 해 주어 그대로 실행한 것입니다.”

“조언?”

“예. 늦은 밤 괴한들 몇이 저택을 습격해왔사온데 때마침 그들을 따라온 분께서 괴한을 모두 물리쳐 주어 피해가 적었습니다. 덧붙여 담장 밑에 구덩이를 길게 파 침입을 대비하라고 조언해 주셨구요.”

성익권의 말에 대답하며 치화가 그날을 떠올렸다.

그 이상한 침입자를 만난 것은 며칠 전의 일이었다.

사위가 고요하던 야심한 시각.

방에서 책을 읽던 치화의 손에 마른 꽃잎이 붙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던 복사꽃이었다.

대체 언제 책 사이에 들어온 것인지.

마른 꽃잎을 잠시 만지작거리던 치화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몸을 일으켰다.

정원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 방치되어 있었다. 돌보는 사람 없는 관목들을 대거 잘라 낸 탓에 이미 가뭄 이전부터 망가졌다고 봐야 했었고.

그래도 정원의 터는 그대로 있던 터라, 아주 오랜만에 그곳을 잠시 둘러보고 싶어졌다.

그 정원도 혹 빛나는 비의 영향을 받았을까. 허면 마지막으로 보았을때의 메마른 테를 벗고 어머니께서 살아계셨을때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회복했을까.

그것이 궁금하여 잠시 보고 오려던 것 뿐이었는데, 그런 그녀를 발견한 침입자들에 의해 때아닌 난투극이 벌어졌다.

한두명이 아니었고 목표는 치화였는지 그녀를 발견한 후엔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달려들었다.

혹시나 하고 미리 하인들에게 대비를 시켜 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날붙이 소리와 비명을 들은 식솔들이 얼른 달려와 주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작정하고서 무장하고 들어온 이들을 막아서긴 역부족이었다.

꼼짝없이 당하겠다 싶어 조금 겁을 먹었던 순간.

한 사내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달빛에 반사된 잿빛 장포가 마치 구름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물 흐르듯 달려와 압도적인 무위로 괴한들을 일격에 때려눕혔다.

낡고 거친 옷을 입은 침입자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누구지, 저이는?’

그렇게 움직이면서도 사내의 갓은 모양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낮은 목소리로 사내가 그렇게 묻던 순간에 정치화는 그림자에 가려졌던 그의 눈을 처음 보았었다. 사내가 다시 물었다.

“검 잘 다루십니까?”

“네? 아, 아뇨.”

“그럼 무슨 배짱으로 이리 나오셨습니까?”

“……예?”

“대체 간이 얼마나 크길래 이 야심한 밤에 위기의식도 없이 담장 근처는 서성거렸냐는 말입니다.”

“……허.”

남자는 마치 기절한 괴한들을 노려보듯 치화를 매섭게 응시했다.

“밤이 늦었으면 마땅히 잠을 자야지, 대체 왜 혼자 마당을 돌아보다가 봉변을 당할 뻔하는 겁니까?”

“저기. 여긴 제집인데요.”

“네. 저도 여기가 지금 흉흉한 소문으로 둘러싸인 예판 대감댁이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저들도 아주 잘 아니 기어 들어왔을 거고요.”

당황해 잠시 말문이 막혔던 치화가 황급히 반박했다.

“아니. 밤이 야심하든 해가 중천이든 간에 잠이 안오면 집안에서 좀 돌아다닐 수도 있는 것이지. 게다가 여긴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끼시던 정원이라 잠시 보러 나왔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 정원을 왜 밤에 보러 나오냐 이겁니다.”

그 뒤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원을 둘러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그렇게 밤에 돌아다니고 싶으시면 차라리 땅이라도 파두세요.”

땅?

“담장 밑 여기, 여기, 그리고 저기까지. 죄다 갈아엎어서 구덩이를 만드시란 말입니다.”

“제가 지금 이곳이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아끼시던 곳이라 말한 것 같은데요.”

그 말에 복면을 쓴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추억이 당신을 지켜 준답니까?”

그 비웃음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엔 정말 저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서.

“그래서 여길 다 파놓은 것이냐?”

“!”

성익권의 목소리에 상념에 빠져있던 치화가 놀라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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