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3화 (240/254)

* * *

“허어.”

눈꼬리를 일그러뜨린 이판에게서 그 말들을 전해 들은 성익권이 혀를 찼다.

어린 아가씨가 당차기도 하군. 보통 그리 천애 고아가 되고 나면 제법 무서울 텐데 말이야.

“전하, 그보다 혹 그 천인들이 다시 올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까?”

“그건 왜 묻는가.”

“그 아이가 그것만을 믿고 있는 듯해 드리는 말씀입니다. 갈 곳 잃은 원망을 품고 주변 모든 것에 날을 세우고 있으니. 제가 아무리 진심이라 해도 그 아이가 저리 천인들 외엔 아무도 필요 없다 등을 돌리면 도울 수 있는 방도가 없을 테니까요.”

“…….”

“거대한 재앙 앞에 그를 홀로 내세웠던 제가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먼저 간 예판이 저승에서 소신을 어찌 바라보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또 한번 마음이 조각나는 것 같습니다. 더는 뒤늦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이 비통을 그 아이가 알아준다면 좋으련만.”

“…….”

“……하여 신이 조금 더 방법을 강구해 보도록 하려는데, 혹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을 때는 전하께서 도움을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예판의 절절한 목소리를 듣고 있던 성익권이 문득 제게로 날아온 질문에 고개를 들었다.

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을 경우?

분명 예판의 여식은 아직 혼례도 치르지 못했고 남은 가족도 없다. 몸을 의탁할 친척의 존재유무도 불명확한 상태였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안 될 말이지.”

“예?”

“그녀의 생각이 정 그렇다면 그걸 어찌 강요할 수 있을까. 그때는 내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이니 이판은 나서지 마시게.”

“…….”

“왜 그러는가?”

“아닙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억조창생을 돌보셔야 하는 지고한 자리에 계신데 어찌 한갓 계집아이 하나를 신경쓰실 수 있으시겠습니다. 소신이 괜한 말로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혀드린건 아닌지 염려가 되옵니다. 여인의 마음은 여인이 잘 알테니 제가 제 안사람을 시켜-,”

“그것은 아버지를 막 여읜 아이에게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떠오르게 할 수 있지 않은가. 일단 그냥 두어보게. 시간이 조금 필요한 모양이니 그것을 기다려주는 것도 좋을테지.”

“…….”

“당분간은 자극하지 말고 시간을 주자는 말일세. 그 아이를 위한다고 괜한 일을 하다가 더 상처입히는 일은 없도록 말이야.”

“……예, 전하.”

고개를 숙인 이판이 물러간 이후, 조용히 다가온 홍 내관이 성익권에게 고했다.

“그래도 조금 더 맡겨 보시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자네도 듣지 않았는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었다고.”

“지금은 아직 경황이 없어 그러는 걸테지요. 가장 절실할 때 모두가 자신을 외면했다는 원망이 쌓여서 말입니다.”

“…….”

“그 아이도 곧 제 처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여인 혼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막막하고 힘들겠습니까. 전하께서 언제까지고 그 아이를 살펴주실 수도 없는 일이고. 이판을 통해 해결된다면 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

홍 내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당장은 반발하더라도 방법을 달리하면 설득이 통하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 아이에게 시간이 조금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변함없어, 일단은 조금 두고 볼까 하였다.

정치화를 향한 불온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 * *

“아 글쎄. 딸이 벌여 놓은 잘못을 수습하려다가 그 지경이 됐다지 않아.”

“그럼 그 가뭄이 예판의 여식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그렇게 퍼졌던 소문이 참이라는 말이지?”

“그렇지. 아니고서야 어떻게 미리 곡식이니 약초니 준비해 놓고 우물도 그리 많이 파 두었겠어. 몰래 파 둔 우물만 백여 개고 집 안 곳곳으로도 모자라 도성 근교에까지 온통 곡식을 미리 구해 숨겨 두었다잖어.”

“백여 개?? 우물을 백여 개나 새로 팠었단 말이야? 우물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기껏해야 한두 개인 줄 알았더니만.”

“그러니까 이상한 거지. 그런 것은 정말로 미리 가뭄이 올 거라 알지 못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잖어?”

“그러니까 예판 대감께서 자기 목숨을 버려서까지 일을 수습하려 한 거지. 딸자식 소행인 게 밝혀져 봐. 어딜 가든 얼굴 들고 살 수 있겠어? 돌로 때려 맞을 일이지.”

“그러니까 얘기를 정리하면, 예판의 여식이 그 천인분들의 친우는 맞지만, 그때 뭔가 사이가 틀어져서 화를 낸 천인들이 가뭄을 내렸고, 예판의 여식은 혼자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 우물도 파고 곡식도 쟁였다, 이 말이여? 사람들에겐 알리지도 않고 죽게 내버려 두고? 게다가 예판 대감은 딸자식이 벌여 놓은 일을 해결하려고 애를 쓰다가 비명에 간 거고?”

“그렇지, 그렇지.”

“천벌 받을 아가씨구먼. 자기 때문에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데 나와서 사죄 한마디도 없고.”

“뭐 전하께서 가만두시겠어? 지금이야 도성을 정비하느라 바쁘니, 잠깐 두시는 거지. 곧 죄다 잡아들여 진상을 파악하시지 않겠어.”

둘러 모여 들은 것들을 서로 전하던 이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지금껏 사람들을 모아 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던 이가 문을 걸어 잠근 예판의 저택을 흘끗 보고는 턱짓했다.

“일단 감시나 제대로 하자고. 또 알아? 제가 저지른 짓이 다 밝혀졌다는 걸 깨닫고 야밤에 꽁지가 빠지게 도망을 칠지.”

그리고 몇몇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시선들도 있었다.

“쯧. 아주 신이 나셨구먼.”

어둑하고 좁은 골목에서 혀를 쯧쯧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략 칠, 팔 척은 될 법한 우락부락한 장정들이 팔짱을 끼곤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래서, 나으리. 저걸 정말 혼쭐 내 줄 방도가 있겠습니까?”

그 질문에 허름한 복색의 미남자가 길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가 걸친 잿빛 장포는 오랜 여정으로 잔뜩 낡아있었으나, 빛에 드러난 얼굴은 누가 봐도 귀하게 자란 분위기를 담고 있어 행색만으로 이 남자를 무시하는 이가 없었다.

“방금 사람들을 들쑤시던 놈들이 너희가 말했던 그 무리인가?”

“예. 지난 가뭄 때 저희의 저장 식량을 모조리 강탈해 갔던 그놈입니다. 게다가 무슨 연유인지 사람들마저 종종 납치해가고 있고요.”

“납치?”

“끌려간 이들을 구하려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꼬리를 밟긴 했으나 이판 대감댁 수하였던데다가 저런 놈들이 수십이라, 그 뒤엔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대답에 남자가 입꼬리만 당겨 웃었다.

숨긴다고 숨겼을텐데도 이리 여르 사람들의 입에서 이판이 오르내리려면.

‘채 다 감춰지지 않는 나쁜 짓을 대체 얼마나 많이 저지른 것인지.’

남자가 침묵하자 여태 남자를 여기까지 보필해온 커다란 체구의 사내가 대신 대답했다.

“저딴 못 믿을 놈들을 그냥 두어선 안 되지. 손은 내가 써 줄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나저나 큰일이 아니냐.”

“네?”

“예판이 비명에 갔다는 비보 말이다. 사실인 것이야?”

가뭄이 온 나라를 지져대던 어느날, 예조판서의 기우제 실패 소식에 한껏 염려하는 시선을 감추지 못하던 제 주인을 떠올리며 팔봉이 장정들을 향해 물었다.

“예판이요? 글쎄요. 따로 그 집에서 장례를 치른 것도 아니라 저희도 거기까진……. 행방불명인 것은 확실하니, 그것 때문에 만들어진 소문이 아닐까요.”

“그러기엔 너무 확신에 찬 말투였는데. 설마 저놈들이 예판까지 죽인 것은 아니겠지?”

“설마 그건 너무 일이 커지지 않겠습니까? 거기다 이판대감은 예판대감과 막역지우라 하였는 걸요.”

그 말에 남자가 코웃음을 쳤다.

“권력과 재물을 과히 탐하는 이들에게 친구란 그저 잘 써먹을 수 있는 손안의 패일 뿐이지.”

그 확고한 말투에 서로 눈을 맞춘 장정들이 팔봉을 향해 물었다.

“허면, 형님께선 이판 대감이 예판 대감을 죽였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때 뭔가를 생각하듯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남자가 한발 앞으로 나섰다. 낮은 목소리가 팔봉의 것보다 먼저 흘러나왔다.

“그것은 이제부터 알아보아야 할 일이고. 지금도 한가지 사실만은 저리 분명하지 않느냐.”

미남자의 멀끔한 낯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예판이 남기고 간 것을 삼키고 싶어 이판이 혈안이 되었구나.”

* * *

“그 소문이 다시 퍼져 나가고 있다고?”

탁자를 내려치는 성익권의 앞에서 홍 내관이 고개를 숙였다.

‘예판의 여식에 대한 그 근거 없는 말들은 일전 천인이 비를 내려준 이후로 모두 사라졌던 것 아닌가? 갑자기 왜 다시 시작된……. 아니. 아니지.’

성익권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허공을 더듬는 시선 아래로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나무 단상을 툭툭 두드렸다.

‘이거……혹시 이판의 짓인가?’

그렇지 않아도 양녀 제의를 거절당하고 돌아와 그에 대해 언급하는 대화의 결이 뭔가 싸하게 느껴지긴 했었다.

하지만 예판에 대해 언급할 때 보인 비통함이 영 꾸며낸 것만은 아닌 듯 했던데다가, 생각처럼 잘 설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친우의 여식에게 불온한 짓을 저지르진 않을 것 같아 놓아두었었는데.

‘위험 앞에 홀로 몸을 사렸던 기억이 찝찝해서라도 도우려는 것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소문이 이리 가라앉지 않을 것이었으면 지금껏 쭉 이어졌지, 잠잠하다가 뒤늦게 갑자기 이렇게 끌어 올려질 이유가 없었다.

날카롭게 눈을 좁히고 생각을 거듭하던 그가 홍 내관을 불렀다.

“일전에 자네가 이판에 대해 했던 말들. 그건 이판이 자네에게 와 직접 얘기를 전했던 건가?”

“예? 어떤 말들 말씀이십니까.”

“그 여식에 대한 말들 말이네. 양녀로 삼고 싶다던가.”

“그건 아닙니다. 궁을 오가다가 종종, 이판은 저를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저는 그를 보게 되었는데 어찌나 극진히 예판의 생사와 그 여식에 대한 염려를 거듭하고 있던……지.”

그러다가 홍 내관도 무언가 이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이판을 우연히 마주칠때마다 이판은 예판에 대한 염려로 마음 고생을 하고 있었다고?”

“……예.”

생각해 보니 가뭄으로 인해 가세가 예전 같지 않다 해도 예판에겐 아직 남은 재산이 있다.

그것들은 오갈 데 없이 홀로된 여식의 몫으로 남겨졌고.

그런 상황에서 천인의 비호에 왕의 지원까지 얹어 주겠다고 했으니.

‘지난 가뭄에 머릿속까지 말려버리기라도 한 걸까.’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이런 실수를 할 수 있을까.

‘위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독을 안기는 꼴이 되었군.’

다행히 예판의 여식이 양녀얘기를 잘 거절한 상태이고 이판도 그런 그녀를 먼저 굴복시키기로 했는지 둘 사이에 다른 말이 없었지만.

‘혹여 이후 내 명이라는 말로 그 아이를 옥죄거나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어.’

제 생각이 짧아 벌어진 일이었으니 수습도 직접 해야 했다. 성익권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갈 곳이 있다. 따르거라.”

그렇게 홍 내관과 함께 궁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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