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화 (239/254)

“전하. 예판의 죽음이 안타깝긴 하지만 이번 가뭄에서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이가 예판뿐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황해 눈을 깜빡인 홍내관이 대번에 목소리를 낮추며 조언했다.

“쌀 한 톨이라도 아껴 백성들의 구휼미로 사용하시겠다던 중전마마와 세자 저하의 국장을 예판과 함께 치른다니, 그것은……. 게다가 예판은 결과적으로, 기우제에 실패하고 말도 없이 모습을 감춘 이가 아닙니까.”

“…….”

“백성들도 당장은 살길이 열린 기쁨에 취해 있을 테지만 배가 충분히 부르고 나면 잃어버린 친구와 친지들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고을마다 위령제를 지내 준다고 하여도 애석함을 모두 달래기 어려울 텐데 혹 예판의 후한 장례가 그들을 자극하는 일이 되진 않을지. 소인은 그것이 염려스럽습니다.”

“지독했던 가뭄의 원인이 무엇인지 마지막 기우제 때 모두가 목격하지 않았더냐. 그런 거대한 짐승들의 힘을 사람이 어찌 막을 수 있겠어.”

“하나 슬픔은 판단력을 어그러뜨리기도 하지 않습니까.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이 언젠간 분명 떠오를 텐데, 그들이 원망을 쏟아 내고 싶은 곳을 찾을 때 예판의 장례가 그 불씨가 되진 않을지. 그것이 걱정될 따름입니다.”

“…….”

“혹시 천인들의 힘이 염려되어 그러시는 겁니까.”

“……그것을 아예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뭐 꼭 그것 때문이겠느냐. 모두가 내 자식 같은 이들인데 다 불쌍하고 안쓰럽지. 그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맡겨 화를 입게 한 예판도, 그 때문에 천애 고아가 된 예판의 여식도.”

“헌데, 외람되오나 그 재앙에 가족을 잃으신 것은 전하께서도 마찬가지이시지 않습니까.”

아이를 낳고 계속 몸이 좋지 않았던 중전과 처음부터 그리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했던 세자는 지독한 가뭄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전국에서 시신이 들끓는 마당에 대대적으로 장례를 치를 수가 없어 조촐히 왕묘에 안치해둔 참이었다.

“이제 나라 안의 상황도 제법 나아지고 있고, 신경 쓰시던 예판의 행방도 찾아냈으니 전하께서야말로 인제 그만 국장을 치르심이 어떠하십니까.”

“…….”

“게다가 혹 모르니 영현군의 행방 역시도 찾아보심이…….”

“제멋대로 궁을 나가 이제껏 소식 한 자 보내오지 않는 그놈을 어디 가서 찾겠나. 혈호에 옮겨 온 시신 중엔 없었으니 어딘가에서 이번 재앙을 잘 넘겼겠거니 해야지.”

“그래도.”

“되었다. 멀끔한 얼굴로 황당한 짓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놈이니 살아는 있을 것이다.”

“…….”

“어쨌거나 국장. ……그래, 국장.”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진 성익권이 긴 한숨을 뱉었다.

‘내가 예판에게 어지간히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나 보군.’

그의 앞에 산적한 일이 아직 산더미인데, 예판의 일에만 몰두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필요하다면 그를 정말 사람들 앞에서 참형해서라도 제게로 향할 양민들의 분노를 피하려 했었으니까.

그때는 자신마저 이 자리에 없으면 누가 그 짐승들을 막아 내겠냐고. 종래엔 자신도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된 상태라고 그리 여겼으나.

‘이제 와 돌이켜보면 죄 핑계일 뿐이 아닌지.’

그저 제 생을 어떻게든 더 연장하려 그린듯한 정론을 핑계삼아 이기를 부렸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가 못내 한심해진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제 행동으로 예판은 결국 비명에 갔다.

그 많은 이들을 재앙 같은 가뭄이 죽였다면, 예판은 확실히 제가 죽인 것이다.

“…….”

침묵하는 그의 얼굴에서 수심이 가시지 않자 홍 내관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전하. 정 예판에게 마음이 계속 쓰이신다면 혹 이판 대감을 만나 보시면 어떠하십니까?”

“음? 갑자기 웬 이판이냐.”

“다름이 아니옵고, 일전에 제가 우연히 듣기로…….”

홍 내관이 하는 말에 성익권이 귀를 기울였다.

* * *

다음날, 예판의 저택엔 이조판서 김흥수가 찾아왔다.

“저를, 양녀로 삼으시고 싶으시다고요?”

“그래.”

근엄해 보이는 수염을 기른 노인이 정치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제법 허물어진 노인의 머릿속으로 이른 아침 자신을 불러 독대하던 성익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판이 예판의 여식을 양녀로 삼고자 하였다던데, 그게 정말인가.”

“예전부터 예판과 친분이 두텁더니 그런 결정을 하였군.”

“그래. 이판이 후견인이 되어, 그녀의 장래를 돕고, 남부럽지 않은 집안과 혼사를 맺어 준다면 그녀뿐 아니라 그대에게도 새로운 연이 생기는 것일 테니 좋은 일이 아닌가.”

“사람들은 친우의 여식을 위해 힘쓰는 그대의 덕을 칭송할 것이며 내게도 빚을 지우는 셈이니 일석삼조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걸세.”

그렇지 않아도 그는 계속 ‘어떻게 하면 이 불쌍한 예판의 여식을 제 양녀로 들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터였다.

예판대감과 자신의 친분이 그리 두터웠는데. 그의 홀로 된 자식이라 하면 당연히 제가 책임을 져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암. 그렇고말고.

그의 말투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네 아버지가 비록 살뜰히 누군가를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널 생각하는 마음만은 깊고도 강했다. 헌데 혼약자도 없는 널 홀로 내버려 두고 가야 했으니, 어디 눈이나 제대로 감을 수 있었을까.”

“…….”

“이제 막 비보를 전해 듣고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었을 테니 내 얘기가 갑작스럽게 들릴 것이라는 건 잘 안다. 허나 네 아버지는 내게 형제와도 같았고 그런 넌 내 조카와도 같으니, 널 내가 거두는 것은 분명 네 아버지도 바라는 일일 것이다.”

“하나 그것도 제 아버지께서 연이어 기우제에 실패하시기 전까지의 일 아니겠습니까.”

가뭄이 극으로 치닫던 어느날,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비참하게 떠밀리던 기억을 되살린 정치화가 노인의 말 사이를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파고들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어르신. 조금 전의 말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어르신 댁 문지기가 제게 했던 말입니다.”

“그건.”

“어르신께서는 실제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수 있습니다. 또, 제가 절박하게 찾아가 어르신을 뵙게 해 달라 대문을 두드렸단 사실조차 전해 듣지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

“그러나 악화된 민심에 아버지께서 무속인까지 찾아 헤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을 때, 그런 제 아비를 위해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당황한 얼굴의 이조판서를 향해 그녀가 시선을 내린 채 덧붙였다.

“원망하려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어르신께서도 챙겨야 할 식솔이 있으시니 운신이 자유롭지 않으셨겠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허나.”

시선을 들어 올린 그녀가 노인의 눈동자를 정면에서 응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벼랑 끝에 몰린 저희 집안에 손 한번 내밀어 주시지 않았던 분을 이제 와 어떻게 아버지로 모시겠습니까.”

“너……. 누가 아녀자 아니랄까 봐. 짧은 식견으로 네 복을 걷어차는구나. 네 지금 꼴을 보아라. 네게 지금 혼약자가 있느냐, 아니면 몸을 의탁할 친척이 있느냐. 가진 거라고는 엉망이 된 저택과 아직도 네 아비에게 앙심을 품었을-.”

“말씀이 끝나셨다면 이만 돌아가 주시지요. 저는 진짜 아버님의 장례 준비로 바빠 더는 저희 아버지의 형제, 같았다던, 어르신을 맞이해 드리기 힘들 듯합니다.”

말투는 정중했으나 대놓고 빈정이는 그 속 뜻에, 김흥수의 얼굴에서도 훈풍이 빠지고 노기가 들어찼다.

천천히 손을 움켜쥔 그가 한결 서늘해진 목소리를 꺼내놓았다.

“혹시 그 천인들을 믿고 이리 나오는 것이냐? 그렇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인외의 존재들이 자신들에 비하면 한갓 미물에 가까울 너를 얼마나 진심으로 대할 것 같으냐. 시간이 지나면 그들이 너를 기억이나 할 것 같으냐? 네 초라한 처지를 그들이 뭐 얼마나 살펴줄 것 같으냔 말이다.”

“염려 마십시오, 어르신. 또 무슨 비참한 꼴을 겪는다고 하여도 이번엔 어르신 댁 대문을 두드리진 않을 테니까요.”

“…….”

“멀리 나가진 않겠습니다. 제가 처한 상황을 그리 정확히 알고 계시니 결례를 탓하진 않으실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너.”

어린 것의 건방진 태도에, 이런 방종을 한번도 눈감아 본 적 없는 김흥수의 시선이 벼린 날처럼 스산해졌다.

본래대로라면 방자한 입놀림을 탓하며 그보다 더한 악담을 퍼부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말 한두 마디에 냉큼 버리기엔 저 어린것을 일단 데려와야 하는 이유가 너무 크구나.’

그렇다고 여기서 무언가를 더 시도해 보기엔 정치화의 표정이 너무 단단했다.

저런 표정의 인간은 어떤 일에건 쉽게 회유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긴 인생을 통해 알고 있었다.

결국 조용히 몸을 일으킨 김흥수가 정치화를 향해 서늘하게 덧붙였다.

“네가 보고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불안정한 상황에 내 식솔들까지 말려들게 할 순 없었기에 네 아버지를 돕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빚을 너를 건사하는 것으로 갚으려 하는 것 또한 내 진심이니 적당한 때 옛일을 잊고 내밀어준 손을 잡는 것도 방법이다. 자존심을 부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너도 알아야 한다.”

“…….”

“마음이 바뀌거나 내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오거라.”

말을 마친 김흥수가 방문을 나설 때까지도, 정치화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