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7화 (237/254)

고요하고 거대한 사당 안은 몹시 밝았다.

향이 올려져 있어야 할 제탁이 보였으나 지금은 그 위에 영석 하나와 두 개의 술잔뿐이었다.

거기에 백가를 상징하는 흰 천과 백등, 또 주가를 상징하는 붉은 천과 홍등이 가득했다.

그녀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물었다.

“이게 다 뭐예요?”

“…….”

“?”

대답이 없어 돌아보니 그는 조금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요?”

“……화 안 내?”

제단으로 올라갈 때와 같은 질문이라는 걸 깨닫고 그녀가 피식 웃었다.

“안 낼 거라고 했잖아요.”

“내도 돼.”

“싫어요. 누구 좋으라고 해 달라는 대로 해 줘요?”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그의 눈매가 조금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본 그녀가 얼른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왜 그랬는지 아니까 화 안 내요. 나지도 않고요.”

세 자매에게 말을 듣기 전에도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자매들에게 백기하의 심중이 어땠는지, 왜 이 식을 강행했는지를 듣고 나니 더욱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 그랬을 테니까.

아무리 적룡의 영단을 가진 자가 신영의 위에 올라야 한다며 주변에서 시끄럽게 굴어도.

초대 적룡의 본신을 드러낸 그녀를 가주로 삼으려 해도.

제 아버지가 계시고 다른 연륜 있는 가주들이 있는 한, 그녀는 주가의 가주에도 신영의 위에도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영력의 크기로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그 규칙 자체를 그녀는 좋아할 수 없었으니까.

“……나도 그대를 그 자리에 억지로 올리고 싶진 않았어.”

백기하가 작은 몸을 조심스럽게 제 팔 안에 가두며 속삭였다.

붉은 천을 사이에 둔 채로 체온이 맞닿았다.

“그 자리는 너무 높고, 멀고.”

살이 맞닿은 곳을 통해 서로의 심장 소리가 뒤섞였다.

가만가만, 세화의 어깨에 숨을 털어 넣은 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힘껏 뛰며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지 모르는 자리니까.”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따뜻하게 매만졌다.

“하지만.”

부드러운 숨이 붉은 천을 넘어 그녀의 볼에 닿았다.

“그대가 너무 빛나서. 꼭 필요한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이가 그대밖에 없어서. 그래서 할 수 없었어.”

“내가 적룡이라서요?”

“아니.”

“그럼, 사람들이 말하는 성수로 변할 수 있으니까?”

“아니. 그대는 그 누구도 결코 그대가 겪었던 것처럼 억울하게 두지 않을 테니까.”

백기하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몸을 조금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나조차도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해. 세상에 완벽히 공평한 법은 없다고. 위에 선 자라면 대의를 위해, 조금 더 많은 이를 위해 때로는 누군가를 억울하게 하는 일도 감수해야 한다고.”

“…….”

그녀의 손끝이 제 몸을 둘러싼 그의 단단한 팔을 조금 매만졌다.

“하지만 그대에겐 그 사실이 결코 당연하지 않았지. 누구도 그대와 같은 일을 겪게 하지 않으려 노력했잖아.”

그녀에게 쥐여진 그 자리는 그런 이들이 앉아야 하는 자리라고.

그대가 나만의 것이 아닌 건 섭섭하지만.

그렇게 결국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 버리게 될까 봐 걱정스럽지만.

그래도 할 수 없었다고.

그렇게 토로하는 나직한 목소리를 듣다가 그녀가 물었다.

“그래서 이걸 준비한 거예요?”

사당 안에 준비된 이것은 혼례식이었다.

“아무리 필요한 일이었다고는 해도 우리의 중요한 식을 내가 망쳐 버렸으니까.”

“언제 준비한 거예요? 누군가 오가는 건 보지 못했는데.”

“내가 했어.”

“당신이 직접요?”

백등 홍등을 직접 엮고 휘장을 달았다고?

놀라는 세화의 손을 잡고, 그가 제탁 앞으로 이끌었다.

그녀를 한쪽에 세우고, 그가 그 옆에 섰다.

“백가의 신물을 건 맹세는 이미 해 버렸으니까. 그래서 사당이어야 했어. 사당에서 한 맹세는 결코 어길 수 없으니.”

따뜻하게 그녀를 바라본 백기하가 미리 준비한 술잔 하나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제 얼굴을 가린 붉은 천을 들어 올리려는 손길을 막으며 덧붙였다.

“이건 마시지 말고 입술만 축여.”

“합환주를요?”

“응. 입술만 축이고 내게 주면 내가 마실게.”

왜냐고 물으려다가 오늘 하루 이상한 일투성이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에 붉은 천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바라본 백기하가 조용히 술잔을 들어 마셨다.

그녀가 붉은 천 위로 가볍게 입을 댔던 술잔 역시도 그가 받아 마셨다.

그녀와 그의 손이 천천히 영석에 닿았다.

시선을 정면으로 들어 올린 그가 수많은 선조의 존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명신년 상월 이레. 부족한 백가의 자손이 천신과 선조의 주관 아래 제 목숨의 방향과 마음의 무게를 증명하고자 이곳에 섰습니다.”

거기서 세화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왜 또 서약언이랑 다른 말을 하지? 결인을 하려는 것 아니었어?’

“저 육산 백가의 자손 기하는 영휘 주가의 여식 세화를 반려로 맞아, 그 어느 때라도 결코 그녀의 길을 막아서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그녀와 함께 스러지는 결과를 낳는다고 해도.”

“!”

이해할 수 없는 서약언에 눈을 깜빡인 그녀가 정면을 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영석 위에서 그녀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

“자신이 지금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신영의 위에 앉아 많은 고민을 반복할 그녀에게 늘 확신을 주겠습니다. 그대의 결정은 항상 옳다고. 그 결정들로 인해 환계의 기틀을 어지럽히게 된다 해도.”

“…….”

가만한 그의 시선 역시도 조용히 그녀에게 와 닿았다.

“그녀가 어떤 일을 하여도, 그 일을 그 누가 비난한대도 그 모두의 손에서 항시 그녀를 지켜 내겠습니다. 언제 어느 때고 조금도 다치지 않도록.”

“…….”

“그녀가 망설이는 그 자리에서, 이 여인이 폭군이 된다 하더라도 절대 두려워하지 않고 긴 길을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영원불변토록.”

“…….”

“그렇게 그녀가 저와의 혼약을 후회하지 않도록 일생 온 마음과 정성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

“하여 이 맹세를 천신과 선조들의 앞에서 명백히 하려 하니, 부디 이 모든 언약이 영속되도록 천지에 아로새겨 지켜 주시옵소서.”

“…….”

어쩐지 가슴 안쪽, 혹은 목 근처가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이 이상한 맹세가 그녀의 손끝 역시도 조금 떨리게 했다.

그녀가 붉은 천 안에서 입술을 씹을 때, 영석에서 떨어진 백기하의 손이 천천히 다가와 붉은 천을 들어 올렸다.

천으로 가려져 있을 땐 괜찮았는데, 그의 부드러운 두 눈을 보자마자 이유를 알 수 없게도 눈가가 젖어 들었다.

“그게…….”

제 표정을 숨길 수 없어진 그녀가 젖어 든 눈을 드러낸 채 불평했다.

“그게 다 무슨 바보 같은 맹세에요? 내가…… 내가, 환계의 기틀을 어지럽히게 된다면 당신이 날 말려야죠.”

조금 소리 내어 웃은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적자줏빛 두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그때 말했잖아. 무엇이든,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그게 무엇이든. 그대는 날 설득할 필요 없어. 그대가 하고 싶은 것 다 해.”

“그대가 잘못된 길을 걷는다면 어차피 누군가 우릴 꺾으러 오겠지. 하지만 그때도 걱정하지 마. 내가 그댈 지킬 거니까.”

백기하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흰 이마에 뜨거운 낙인을 남기고, 양 볼과 코끝에도 제 체온을 나눴다.

“장부인과 장인어른의 불호령에서도 내가 항상 지켜 줄게.”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녀가 조금 웃었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이 남자는.

대체 어떻게 항상 그녀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걸까.

옳은 길을 가도록 지켜 주겠다는 말보다 폭군이 되어도 그녀를 지지하겠다는 그 말이.

어떤 길을 걸어가더라도 그가 함께할 거라는 그 말이 그녀를 이렇게 안심시킬 줄 미리 짐작이라도 했던 걸까?

그녀의 얼굴이 더욱 거세게 젖어 들었다.

당황한 그가 물었다.

“왜, 왜 울어. ……이런 혼례식 서약언은 싫었어?”

이 순간에도 이런 걸 묻는 이 바보 같은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게로 바짝 끌어당기고, 그가 했던 것처럼 이마와 양 볼에, 코끝에 입술을 눌렀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볼에도 묻어났다.

그가 당황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 눈물이 좀처럼 멎어 들지가 않았다.

“나도 그렇게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제 볼처럼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그렇게. 그렇게.”

그 말에 서약언이 싫지 않았다는 걸 알아차린 그가 안심한 얼굴로 긴장했던 표정을 풀었다.

그 감정이 너무나 분명해 그녀는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손끝이 닿지 않는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말아요.”

목이 졸리는 것처럼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높은 곳에 갔다면.”

“…….”

“그건 날 당신이 그곳까지 올려 줬기 때문이니까.”

모든 건 당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늘 이 말을 하고 싶었다고.

모든 걸 포기했던 내게 당신이 와 줘서.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뭔가 많은 말을 전하고 싶은데. 마치 바보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안다는 듯 그가 한 문장으로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정리했다.

“그대 마음 알아.”

젖은 그녀의 얼굴을 그의 따뜻한 손이 와서 닦아 냈다.

“나도.”

따뜻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누르는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대가 있어서 행복해.”

그녀가 생각했다.

길고 거칠던 길을 걸어야 했던 그 모든 시간들은 오늘을 위해서였을 거라고.

그렇다면 모두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아무렴 이해할 수 있고말고.

눈물로 젖은 입술 위로 그의 것이 다가왔다.

처음 하는 입맞춤도 아닌데, 처음보다 더 가슴이 떨리는 건 왜일까.

입술이 맞닿았다.

그 순간 모든 소리와 풍경이 사라지고 눈앞 남자의 심장 소리만이 남는 듯했다.

그녀가 예감했다.

이 남자와 함께 걸어갈 앞으로의 길은 더욱 행복하기만 할 거라고.

백등과 홍등이 한데 어우러진 이 작은 혼례식장 안에 그녀가 바라던 전부가 있었다.

그것이 만족스러워 두 눈을 감았다.

겹쳐진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뜨거운 호흡을 그녀가 반가이 맞아들였다.

<검은 달이 뜨면 -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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