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6화 (236/254)

종장.

백석저는 늦은 시간까지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은 달이 중천에 뜨는 시간까지도 돌아갈 생각은 않은 채 백가에서 제공하는 술과 음식을 원 없이 먹고 마셨다.

“아 그러니까 이젠 순서가 딱 정해졌지! 백천장강진여주! 이 순서야. 이제 못 바꿔!”

“이익, 이 천가야! 정말 우리 장가와 전쟁이라도 치르겠단 말이냐?!”

“아이고 그 무슨 말씀을. 어차피 천가가 이길 텐데 결과가 뻔한 싸움을 시작하게 할 수는 없지 않나. 자네도 자존심이 있을 텐데.”

“뭐야?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아는 법이지. 이런 자리에서 장가를 무시해?”

“나의 순발력과 상황 대처 능력이 더 낫다는 건 오늘 일로 이미 증명된 것이 아니냐. 다시 해 봤자 뭐.”

천가주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장가주의 위아래를 훑으며 덧붙였다.

“그래봤자 백천장강진여주 순서겠지.”

“이익!”

‘아이고. 저렇게든 싸우시다가 육문의 단합이 상상 이상으로 개판이란 소문이라도 돌면 어떡하자고.’

주위에 손님들이 가득한데도 점점 커지는 목소리를 듣다 못한 진가주가 조심히 주가의 자리로 다가가서 가주인 주명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헉!”

돌아본 주명윤의 눈이 붉어져 있어서 오히려 깜짝 놀랐지만.

“주, 주가주. 호, 혹시 우, 우셨습니까?”

“울다니요. 대장부가 어찌 그런.”

주명윤은 고개를 저었으나,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울었거나 울기 직전이거나. 둘 중 하나처럼 보였다.

“일단 잘 오셨습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술을 이미 마, 많이 드신 것 같은데요. 이런 건 그만 드시고 이제 방으로 돌아가 좀 쉬시면 어떻…….”

“술을 마시지 말라니! 이런 날 마시지 않는다면 언제 마시겠습니까.”

슬픈 목소리로 그리 말한 주명윤이 얼굴을 구겼다.

“그 어리던 것이 혼인하다니. 아니, 아직도 어린 것이. 아직 쉰도 되지 못했는데.”

“……예?”

“쉰도 안 돼 혼인을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내 새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아이를 이렇게 일찍 혼인을 시키다니.”

눈치를 살핀 진 가주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쉰도 어린데! 예순은 되어 혼인을 시켜야 했는데!”

“아, 아이고. 내가 할 일이 있었던 걸 깜박했네.”

여긴 틀렸다.

언제나 이성적인 듯 보이던 그 주명윤이 아니었다.

어쩐지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두 발자국 뒤로 물러서 있더라니.

빠르게 두 눈을 굴린 진가주가 손님맞이를 하느라 정신없는 백만용에게 볼일이 있는 척 걸음을 옮겼다.

“재상, 저분들에게 좀 가 보시게.”

“네? 왜 그러십니까?”

“왜긴, 이 사람아. 완전 난리가 난 거 모르겠는가?”

진가주가 난처한 듯 눈짓했다.

하지만 흘끗 가주실 내부를 확인한 백만용은 자연스럽게 그 요청을 한 귀로 흘렸다.

무슨 상관이람. 그분께서 오늘 백가의 가모도 되신 거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는데.

패자들을 모른 척해 주는 것도 승자의 아량이었다.

실컷 싸우라지. 우리 백가의 백가만 맨 앞에 들어가면 아무 상관 없으니까.

그리 판단한 백만용이 총총 멀어졌다.

“저는 너무 바빠서 이만.”

“아니. 백 재상! 좀 도와주시게! 백 재상!”

당황한 그에게 누군가 혀를 쯧쯧 차며 말을 건넸다.

하얀 술잔이 불쑥 내밀어졌다.

“본래 이런 곳에서는 제정신으로 있는 자가 제일 손해를 보는 것 아니겠는가.”

“강가주.”

“일이 생기면 저지른 자들이 알아서 하겠지. 신경 쓰지 말고 자네도 그냥 마시게.”

와장창!

누가 탁자를 뒤엎었는지.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어쨌건 천가주와 장가주가 함께 있던 탁자가 넘어갔다.

“…….”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여가주가 그 사이에서 제 술병을 챙기는 본 진가주가 내밀어진 술잔을 한숨과 함께 받아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도 잔을 냅다 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 * *

“이레 동안 연회라던데 계속 이렇게 시끌벅적하겠네요.”

창밖을 내다보던 영채가 세화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혹시 소란스러우시면 창문을 닫을까요?”

“아니야. 열어 두렴. 바람이 기분 좋은걸.”

그 말에 영채가 별이 그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백석저가 주가보다 훨씬 춥다는 말을 들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아직 겨울을 겪어 보지도 않아 놓구선.”

“하하. 그건 또 그렇네요. 겨울이 되면 마음이 바뀌려나요.”

“뻔하지 뭐. 지금도 겨울이 되면 여름이 더 좋다고 하고, 여름이 되면 겨울이 더 좋다고 하는걸요.”

그 말에 방 안 가득 웃음이 흘렀다.

“우리 아가씨께선 언제든 예쁘시지만 웃으시니까 역시 훨씬 아름다워지시네요.”

그제야 세화는 제가 오늘 식이 끝난 이후로 한 번도 웃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작스레 제 앞에 놓인 책임이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도무지 제가 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어 오늘 내내 심란한 마음으로 걱정을 짊어지고 있어야 했다.

“혹시…… 오늘 벌어진 일 때문에 화가 많이 나셨나요?”

가까스로 한숨을 삼키는 듯한 세화의 모습에 내내 슬쩍 눈치를 보고 있던 영선이 조용히 그녀의 앞에 와 앉았다. 세화의 무릎을 잡은 채 물었다.

“너흰 이미 모두 알고 있었던 거야?”

“그야 충성 맹세를 하려면 가문의 신물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하니……. 그런 의미에서 원로 어른께서 백가주께 연락을 받아 미리 저희에게도 언질을 주시긴 하셨어요.”

“그런데도 내겐 눈치조차 주지 않았다 이거야?”

그녀가 영선의 코끝을 아프지 않게 잡았다 놓았다.

“죄송해요, 아가씨. 하지만-.”

영선이 망설이자 영무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 뒤를 이었다.

“……백가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아가씨께선 권력에 욕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고, 책임감이 두텁고 신중하시기에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를 할 수 있는 일의 경계보다 명확히 하시는 데다가, 예를 중시하시기 때문에 모두가 동의한다 한들 다른 연세 많은 가주들께서 계시는 한 절대 먼저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실 리 없다고. ……하여, 이러는 것이 가장 좋을 거라고.”

“네. 그러니 무슨 일이 생겨도 이상하게 여겨 우왕좌왕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한 예식에 모두가 짠 듯이 미동도 없었던 거구나.’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끝이 조금 차가워진 제 손을 맞잡았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선 세 자매가 한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요! 당연한걸요!”

“……어떻게 확신하는데?”

“그야 백가주께서 아가씨를 그 자리에 올리시겠다며 모두에게 동의를 구하셨을 때 아무도 반대한 이가 없었으니까요.”

“없다 뿐인가요. 자신이 한발 먼저 맹세하지 못한 걸 땅을 치고 후회하시던걸요.”

“맞아요. 제가 아까 다과를 조금 가지러 갔는데 아직까지도 천가주와 장가주께서 다투고 계시던걸요. 탁자나 뒤엎지 않으셨나 몰라요.”

그 대답에 모두가 푸스스 웃던 그때였다.

“뭐가 그리들 재미있는 거니?”

나직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천수아였다.

“어머니. 아버지는 아직 술을 드시고 계세요?”

제 거짓말이 아버지를 아주 곤란하게 했다는 생각이 든 세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개를 흔든 천수아가 방 한쪽에서 겉옷을 가져오며 웃었다.

“내버려 두렴. 네 아버지도 지금껏 어디서 저렇게 술을 마실 수 있었겠니. 오늘 네 핑계로 기분을 푸는 것이다.”

“그럼 다행이고요. 한데 방안에서 왜 겉옷을 주세요?”

“몸을 차게 하면 안 된다. 창을 열어 둔 동안은 걸치고 있거라.”

“아. 혹시 제가 아까 술을 마시려 할 때도 그래서 말리셨던 거예요? 하지만 의원은 몇 잔 정도는 괜찮다고 하였는걸요.”

예식이 끝나고 연회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새로운 신영의 등극을 축하하며 가는 곳마다 인사를 받아야 했고 얼굴을 마주하는 이마다 술을 권하는 수준이었다.

부모님께 회임을 핑계로 들었으니 술을 마실 수 없음을 세화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 거짓말을 모두에게 알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분위기를 깰 수 없다는 핑계로 몇 잔 정도는 함께 마신 후 빠지려 하였는데 거기서 어머니가 나타나 단번에 술잔을 치우실 줄 누가 알았을까.

하여 식사로 배만 채우고, 거기 있는 이들이 술잔을 더 권하기 전에 방으로 돌아가 있으라는 엄명에 얌전히 방에 돌아와 있던 참이었다.

이걸 언제 솔직히 말씀드려야 하나. 이리도 마음이 불편할 수가.

‘다음부턴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 말자. 부모님께선 이리 내 몸을 걱정해 주시는데 나란 불효녀는 이런 거짓말이나 하고 있고.’

죄책감에 세화의 시선이 천수아와 마주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 모습에 천수아의 눈이 조금 더 부드럽게 휘었다.

웃음을 삼킨 천수아의 재미있다는 시선이 잠시 세화의 배로 향했다.

하지만 단단하게 다물려진 입술은 어떤 말도 세화에게 해 주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조용히 문 앞에서 목소리를 내어 제 존재를 알렸다.

“가모님, 안에 계십니까.”

영공 원로였다.

“이 밤에 원로께서 무슨 일이시지?”

영채가 서둘러 문으로 다가가 열었다.

아직까지 흐트러짐 없는 예복 차림의 영공 원로가 딸과 함께 서 있었다.

“두 분이 모두 어쩐 일이신가요?”

“잠시 저희와 함께 가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주께서 가모님을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아직 연회장에 있는 건가요?”

“아닙니다. 거기가 아니고.”

그는 말을 흐릴 뿐, 정확한 답을 하지 않았다.

“영공 원로?”

그때 천수아가 그녀의 등을 밀었다.

“얼른 따라가 보렴. 영채야, 영선아, 영무야. 너흰 가지 말고 여기 있거라.”

“어머니도 알고 계세요? 그가 어딨는지?”

“그래. 오늘 종일 고생하였을 텐데 어서 가보렴.”

고생이라고?

예식이 고되었으니 그럴 만하긴 했으나 왜인지 예식을 말하는 것이 아닌 듯했다.

온종일 궁금한 것투성이였는데 이 밤까지 이러다니.

“좋아요. 가죠.”

도대체 어머니께서 뭘 알고 계신 건지 알아보고 싶어진 그녀가 벌떡 일어나 영공 원로를 뒤따랐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공손히 고개를 숙인 그가 한발 앞서 걸으며 그녀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그들이 걷는 통로는 연회장의 활기를 조금도 이어받지 않은 듯 고요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걸음을 조심하는 원로의 발걸음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한참을 걸어 그들이 어디엔가 도착하자, 영공 원로가 몸을 비키며 세화에게 속삭였다.

“이곳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긴…….”

“백가의 사당입니다. 역대 가주들의 존체를 모신 곳이지요.”

그때 백효성이 팔에 걸치고 온 것을 펼쳐 그것을 세화의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시야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이걸 쓰시고 들어가시면 됩니다.”

‘뭐야. 그저 사당에 인사를 드리는 거였던 건가.’

“알겠어요. 그럼 두 분께선 여기서 기다리시는 건가요? 제가 인사를 드리고 나오면-.”

“아닙니다. 저희는 돌아갈 겁니다.”

“?”

돌아간다고? 날 여기 혼자 두고?

‘아, 혼자는 아니겠구나. 그가 안에 있을 테니.’

수긍한 세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생각도 못 해 본 충성 맹세도 그렇고, 이상할 정도로 비밀스러운 영공 원로 부녀의 태도도 그렇고.

‘오늘 하루 여우에 홀린 기분이네.’

그런 생각을 한 그녀가 조용히 사당 문을 열었다.

먼저 안에 들어와 절을 올리고 있을 그를 생각하며.

“…….”

한데 이게 다 무언가.

고요해야 할 사당의 안에는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늘어서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곧장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에게 흘러들었다.

“어서 와.”

여전히 혼례복 차림인 그녀처럼, 여전히 새하얀 혼례복 차림인 그가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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