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화 (235/254)

그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순한 대답의 어디가 우스웠는지, 남자는 그런 세화를 보며 눈을 휘었다.

그가 이렇게 웃을 때마다 세화의 시선은 깜빡 풀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에는 웃은 적이 없다던데 정말일까?

‘갑자기 혼례식을 망쳐야 한다며 주가로 가시기에 제가 얼마나 놀랐었는지. 심지어 그전에는 미소조차 제대로 지으신 적 없으신 분이 얼마나 환하게 웃고 계시는지 제 심장이 다 놀라서…….’

아가씨의 능력을 보고 가모로 모신 것이 아니라고.

저희 가주께서 그런 표정을 보이도록 하실 수 있는 분이란 이전에도 없었고 아가씨 말고는 이후에도 없을 것이기에 당연히 가모로 받들기로 하였던 거라고.

백만용이 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녀를 볼 때는 한 번도 이런 얼굴이 아닌 적이 없어 잘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가 이리 웃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던 백석저의 일원들을 떠올려보자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손을 단단히 맞잡은 채로 그가 그녀를 다시 제단을 향해 눈짓했다.

“갈까?”

그 말과 함께 멈춰 있던 악공들의 연주 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주가의 원로들에게 일어나라 말한 뒤 그가 이끄는 대로 함께 걸었다.

식순 역시도 그녀가 미리 숙지해 온 혼례식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거나 합환주를 마시는 과정도 없이 그들은 곧장 제단을 향해 계단을 올랐다.

백만용은 여전히 그들을 뒤따르고 있었지만, 백가의 원로들은 제단 아래에 멈춰 섰다.

하나 육문 중 백가의 자리로는 돌아가지 않은 채 그대로 제단의 계단 앞에 남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세화가 고개를 갸우뚱할 때 백기하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싫다는 일을 억지로 하게 하면, 그대는 내게 화를 내겠지? ……혹시 많이 낼까?”

“?”

“그냥. 갑자기 그런 게 걱정돼서.”

“안 낼 건데요.”

“안 낸다고?”

세화에겐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 답변이 조금 성의 없게 나갔다.

“당신이 판단하기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그렇게 했겠죠.”

“그래도,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일을 망쳐 가면서도 그렇게 하면, 그때는 화내겠지?”

“안 낼 거예요. 그만큼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했을 테니까.”

이 식이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백가 원로들은 왜 제단 밑에 남아 있는 건지.

이 남자는 또 왜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건지.

생각해 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뭐. 그럴 만하니까 하는 거겠지. 식이 끝나면 알려 줄 테고.’

궁금증은 여전했으나 머릿속을 비운 그녀는 애써 홀가분한 얼굴로 제단의 정상에 올랐다.

제단 위에는 혼인을 증명하는 백가의 영석이 놓여 있었다.

뒤따라온 백만용이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모님께서 먼저 향을 올려 주십시오.”

‘내가 먼저 하라고? 이건 남자 쪽에서 먼저 하는 것 아닌가?’

“어서요.”

잠시 망설였으나 그 재촉에 세화가 먼저 향을 올렸다.

백기하가 뒤따라 향에 불을 붙였다.

뒤이어 백만용이 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단상 위에 놓인 술을 두 개의 잔에 따라 주십시오.”

그것은 백기하가 했다.

한데 백기하는 합환주라 여긴 술을 그녀에게 주지 않고 다시 제단에 올려놓았다.

‘뭐지?’

그걸로 되었다는 듯 백만용이 다시금 속삭였다.

“영석 위에 손을 올려 주십시오.”

세화와 백기하가 동시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체온이 맞닿으며 서로의 손이 얽혀들었다.

“가모님,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넘기신 후에 서약언을 말씀해 주십시오.”

‘……술을 따로 마시라니. 합환주가 아니었어? 게다가 이번에도 나 먼저?’

또다시 들려 온 작은 목소리에 이번엔 도무지 참을 수 없어 그녀의 잠시 뒤를 향했다.

“어서요.”

하지만 전혀 문제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재촉하는 백만용뿐 아니라 식순을 그녀보다 더 잘 알 법한 백기하도 말이 없었다.

아무도 가르쳐 주는 이가 없으니 뭐.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혹시 백가의 혼례식은 이런 건가?’

답답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어, 술잔을 들어 마신 그녀가 순순히 먼저 입을 열었다.

“명신년 상월 이레.”

낭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악공들의 악기 소리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부족한 두 용호가 천신의 주관 아래 서로의 목숨과 마음의 결인을 맺고자 이곳에 섰습니다. 저 영휘 주가의 여식 세화는 육산 백가의 자손 기하를 일생의 반려로 맞아…….”

그 뒤로 세화는 그와의 생활에 충실할 것을, 약속의 형태로 입에서 끄집어냈다.

“언제 어느 때고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을. 위기 앞에서 달아나지 않고 어떠한 고난도 함께할 것을.”

마치 긴장한 듯, 영석 위에서 세화의 것과 맞잡고 있던 백기하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하여 우리가 영원불변토록 서로를 저버리지 않을 것을. 이곳에서 하늘에 고해 명백히 하려 합니다. 바라옵건대 부디 이 모든 언약이 영속되도록 천신께서 삼가 지켜 주시옵소서.”

그렇게 그녀의 말이 끝났을 때였다.

그녀의 서약언이 흘러나오는 동안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던 백기하가 단숨에 제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마셨다.

별안간 영석에서 손을 떼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몸을 굽혔다.

조용히 한쪽 무릎을 굽힌 채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이게 무슨.

깜짝 놀란 그녀가 백만용을 돌아보았으나 어느새 그도 두 무릎을 꿇은 채였다.

공손히 들어 올린 재상의 두 손 위엔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적룡의 영단과 비견되는 반투명한 새하얀 구슬.

백가의 신물, 백호의 영단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명신년 상월 이레.”

그녀의 당황을 물리며, 낮고 힘찬 목소리가 새하얀 예복을 입고 가주의 관을 쓴 백기하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부족한 백가의 자손이 천신의 주관 아래 제 목숨의 방향과 충정의 무게를 증명하고자 이곳에 섰습니다. 육산 백가의 가주 기하와 백가 혈족은 영휘 주가의 여식 세화를 일생의 주인으로 맞아-.”

“주인?!”

백기하의 입에서 서약언이 아닌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자 세화가 더욱 깜짝 놀랐다.

굳어진 그녀의 시선이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언제 어느 때고 그녀의 검이 되어 목숨으로 지킬 것을. 도리를 행하는 그녀를 항시 충심으로 보필할 것을.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그녀를 믿고 따를 것을. 하여.”

그녀를 향해 숙였던 그의 유려한 얼굴이 그녀를 향해 올라왔다.

단단한 목소리와 다르게 부드러운 표정을 한 채로.

“영원불변토록 함께할 수 있기를 백가의 신물을 증표로 맹세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천신께서는 이 언약을 천지에 새겨 부디 영원불멸토록 영속되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백만용이 목소리를 냈다.

“지켜 주시옵소서.”

제단 아래에 도열한 백가의 핵심 원로들과 육문의 자리에 서 있던 백가 일족 전체가 무릎을 꿇으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지켜 주시옵소서!”

“……당신.”

그때였다.

그녀의 당황이 끝나기도 전에 그사이를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명신년 상월 이레!”

천가주였다.

“부족한 천가의 자손이 천신의 주관 아래 충정과 목숨을 주인께 바치고자 이곳에 섰습니다. 장일 천가의 가주 수한과 천가 혈족은 영휘 주가의 여식 세화를 일생의 주인으로 맞아-.”

“!!”

그런 천가주의 손에도 천가의 신물인 영단이 놓여 있었다.

“하여 이 모든 언약을 천가의 신물을 증표로 삼아 맹세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천신께서는 이 모든 언약이 영원불멸토록 이어지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지켜 주시옵소서!”

천가의 가주가 그대로 무릎을 꿇자 도열해 있던 천가 일족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천가주까지 갑자기 왜.’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명신년 상월 이레.”

장가주가 첫 맹세를 빼앗겨 분하고 억울하다는 듯 크게 목소리를 냈다.

“부족한 장가의 자손이 천신의 주관 아래 충정과 목숨을 주인께 바치고자-.”

“!!”

그가 장가의 신물을 꺼내든 채 무릎을 꿇자 장가의 혈족들 역시 결연한 얼굴을 한 채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이 모든 언약이 영원불멸토록 이어지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지켜 주시옵소서!”

천가와 장가뿐만이 아니었다. 연이어 진가와 여가의 가주 역시도 서약언을 읊으며 무릎을 꿇었다.

“명신년 상월 이레-.”

익숙한 목소리가 그 뒤를 잇자 세화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버지.”

담담한 목소리로 서약언을 이어가는 주명윤의 시선은 부드러웠다. 천수아의 것도 마찬가지였다.

“하여 도리에 어긋나지 않고 충심으로 따를 것을 맹세하오니, 삼가 바라옵건대 천신께서는 이 모든 맹세의 언약이 영속되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지켜 주시옵소서.”

그 말과 함께 주명윤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주자윤을 비롯한 원로들과 주상현을 따르던 원로들 역시 함께 무릎을 꿇었다.

“지켜 주시옵소서.”

공간엔 바람조차도 멈춘 듯 고요가 흘렀다.

사람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높은 제단 위,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을 응시했다.

이 모습을 응시하던 최장명 역시 세화에게 깊게 고개를 숙인 뒤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이 뒤를 이었다.

그 뒤엔 이곳을 호위하고 있던 무사들이. 그다음엔 백가의 시녀들과 하인들 모두가.

그제서야 지켜보던 이들은 이 예식이 이상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 예식의 진짜 의미까지도.

그들 역시도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가장 정중한 모습으로 머리를 숙였다.

새로 등극하신 신영을 맞아들이기 위해.

“…….”

붉은 예복이 바람을 맞아 흔들렸다.

말을 잊은 그녀의 시선이 잠시 주위를 둥글게 둘러보았다.

세상이 조용했고, 자신을 아는 이들은 모두 제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모두의 머리가 그녀 하나를 향해 숙여져 있었다.

“……신영.”

그녀의 붉은 입술이 제가 앞으로 쥐고 걸어야 할 책임의 이름을 잠시 읊조렸다.

악공들의 연주는 언제 멎은 걸까.

세화는 도무지 그것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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