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34/254)

시선을 받은 원로들이 달아나듯 우르르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깨어진 포석이 발끝에 걸리며 정신을 차렸다.

아까보다 더 희게 질린 주익현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너, 네, 네, 네가 아주 작정을 하였다 느끼긴 했다만 이런 연극까지 준비했느냐? 그래서 저놈들을 미리 불러다 놓은 거였구나!”

그런 주익현을 본 원로들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이 뒤로 그들이 고개를 들고 살아가려면 누군가 저리 소리쳐야 하긴 했다.

……그게 절대로 자신이 되고 싶진 않았지만.

“연극?”

“아, 아, 아무렴. 이게 연극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지금껏 역대 그 어떤 신영도 환족의 본신을 바꾸지는 못하셨다. 넌 지금 네까짓 게 그분들보다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거냐?”

“…….”

“그, 그래. 아까부터 백기하가 보이지 않는다 싶었더니 그놈이 이 연극을 돕고 있는 것이구나! 폭풍을 부르는 건 백가 신수의 능력이니, 하늘이 이리 갑자기 어두워진 것도 앞뒤가 맞아 들어가는군!”

“…….”

이를 갈 듯 소리치는 주익현을 향해 세화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강한 빛으로 우리의 시야를 가린 뒤 추방자 놈들과 저 매의 무리를 바꿔치기한 모양인데 나는 그런 얄팍한 수법엔 속지…… 어, 어엇.”

쉬지 않고 입을 놀리던 주익현의 발아래로 뿌연 빛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몸 전체가 선명한 빛에 휩싸였다.

거대한 날개깃 사이로 풍성한 영력의 기운을 흘리는 매의 무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연회장이 다시 한번 빛에 휩싸였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던 이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언제 매의 무리가 있었냐는 듯 추방자들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

주익현이 사라진 곳엔 크지 않은 노란 뱀 하나가 푹 꺼진 포석 위에 볼품없이 놓여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원로들이 우수수 멀어졌다.

새하얗게 질린 그들의 얼굴엔 조금의 핏기도 없었다.

“이, 이- 이…….”

이게 대체.

“그래서.”

세화가 그런 그들 중 하나를 턱으로 지목하며 물었다.

“이 상황이 진짜인지 연극인지. 더 알아보고 싶은 이가 누구지?”

“……!”

평연한 적보랏빛 시선을 받은 원로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들도 주익현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도 안 된다고. 미리 영단을 나눠 주고 연극을 준비했을 거라고.

필사적으로 조금 전 목격한 현상에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가져다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주상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아도 어떤 시선들이 그들에게 와 닿는지 낱낱이 알 수 있었다.

구경하는 이들의 통쾌해하는 눈빛. 백가 무사들의 비웃는 듯한 눈빛.

그 속에서 주가의 원로들마저 이미 전의를 잃어버린 듯했다.

주상현이 시붉은 눈을 부릅떴다. 억울하고 분하기까지 했다.

‘저년이 뭔데.’

저 어린것이 뭔데 지금껏 이어져 온 환계의 규칙들을 한순간에 뒤엎으려 하는가.

저 어린것이 대체 뭐길래. 얼마나 살아서 뭘 그리 많이 알기에!

“인정 못 해.”

이전처럼 존중받지 못할 삶이라니. 저 천한 것들과 형편이 다르지 않은 삶이라니.

그것이 목숨을 내놓는 것과 뭐가 다르지? 우리에게 대체 뭐가 남느냔 말이다.

움켜쥔 주상현의 손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선 이를 난도질하고 싶어서, 핏발 선 눈이 위로 솟았다.

“……저 더러운 죄인들처럼 이깟 천한 뱀으로 살 바엔 차라리 혀를 끊고 죽는 게 낫다!”

순식간에 광풍이 불어오더니 쉼 없이 옷자락이 팔락거렸다.

저년의 얼굴이라도 한번 긁어 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주가 원로로써 죽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주상현이 원신이 폭발할 각오로 제 모든 힘을 끌어 올렸다.

“누가 너 따위를 신영으로 인정할 줄 아느…….”

그와 동시에 세화의 붉은 소매가 다시 한번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주익현이었던 뱀의 옆에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초라한 뱀 한 마리가 땅을 기었다.

“그래서. 이 다음은 누구?”

“……!”

더 이상 전의를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하나둘씩 걸어 나온 원로들이 그녀의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뭐, 뭐든 하겠습니다.”

“명을 내리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주변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려올 만큼 숨 막히게 고요했다.

그 고요 속에서, 일제히 고두한 이들을 내려다보던 세화가 물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에 걸쳐 너희가 강제로 갈취한 것들도 모두 다시 내놓겠느냐?”

“!”

“그러겠느냐.”

“……그, 그리, 하겠습니다.”

“가문이 없는 이들에게서 몰수한 가산과 강제로 빼앗은 영력, 그것으로 인해 그들이 괴로워했던 시간에 대한 보상까지 내놓으라 해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예리했던 시선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우레를 울리던 시꺼먼 구름이 점차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거센 폭풍우가 지나간 것처럼 은은한 빛을 머금은 하늘이 점차 드러났다.

세화가 입을 열었다.

“많은 것을 뒤집으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울어졌던 저울의 추를 조금 끌어 올리려는 것뿐이니.”

다시금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기라도 하듯 대기를 울리며 전달됐다.

“지위의 높고 낮음과 힘의 크기를 이유로 더는 억울한 이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 그것만이 지난 시간 주가가 벌여 온 과오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음성은 조금 전처럼 냉랭하지 않았다.

원로 하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잠시 바라봤다.

세화의 말처럼,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중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은 듯했다.

“한 가지만…… 여쭙고 싶습니다. 저들은 영원토록 저 뱀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세화는 그렇다 아니다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

“뭔가 깨닫는 바가 생기면 다시 모습이 바뀔지도 모르지.”

“그렇, 습니까.”

그 말을 들은 원로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저울추를 조금 들어 올릴 뿐이라고 했으나, 원로들이 그것을 시행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그녀가 바라는 방식은 지금껏 그들이 영위해 왔던 방식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가졌던 것을 모두 내놓고 난 이후의 삶은 당장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원한이나 욕심 때문에 사사로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살길이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군.’

의지할 곳이라곤 없어진 그들에게,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이런 꼴이 되고 싶지 않아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치긴 했지만, 생각해 보면 영력의 크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던 주가가 아니던가.

그들 주씨 중 가장 영력이 높은 이가 눈앞에 있었고 그녀는 그들을 죽이거나 무너뜨릴 계획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새로운 규칙을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다른 원로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조금 전과는 다르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분부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이전에 보였던 떨떠름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때였다.

“이제야 상황이 정리된 듯하군.”

지켜보는 이들의 심장 소리마저 손에 잡힐 듯 고요하던 공간 속에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의아해진 이들이 깜짝 놀라기도 전에 엉망이 된 포석 위를 조금도 개의치 않고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난 뱀 두 마리와 주가의 원로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이 낯선 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마치 이렇게 될 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처럼.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새하얀 예복의 긴 옷자락이 그의 걸음걸이마다 흔들렸다.

유려하고 준수한 얼굴 위로, 처음 보는 듯한 화려한 관이 씌워져 있었다.

세화의 앞까지 다가온 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그녀의 표정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잡아. 이젠 내 차례가 왔으니.”

백기하였다.

세화가 제게로 내밀어진 손을 잠깐 보다가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어디 갔었어요?”

“내가 어딜 가?”

“놀리지 말아요. 이 혼례식이 뭔가 이상한 건 나도 알겠으니.”

혼례식에 대해서는 자신이 다 알아서 할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오라더니.

본래대로라면 이 남자는 그녀보다 먼저 제단 위에 올라가 있었어야 했다.

주가와 제 다툼이 이리되기 전에 이곳의 주인 된 권리로 먼저 끼어들어 해결해야 했고.

한데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다니?

게다가 칠문의 사람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건만 뒤에 달고 있는 행렬은 또 뭐란 말인가.

가장 가까이에는 백만용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고, 그 뒤로 백가의 핵심 원로들이 정중한 모습으로 쭉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그녀의 의아한 표정을 눈치챘는지 백기하가 제 손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나오지 않은 거야.”

그의 깊고 다정한 눈동자가 그녀를 부드럽게 응시했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바라 왔는지 그대는 알지?”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이 식을 망칠 일은 조금도 하지 않을 거란 것도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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