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3화 (233/254)

“주가 원로 주익현. 세호 27년에 안길 지방의 원로로 발탁.”

“?”

의아한 이들의 시선 속에서 최장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세호 32년, 가문 없는 이들 일백여 명을 납치해 안길의 자택에서 영단을 추출. 안길 지방 상단 일곱 곳에 영단을 유통했다는 죄를 씌워 가산을 몰수. 행수 유지한과 그의 혈육 외 관계자 마흔아홉명을 판결대가 아닌 자택으로 끌고 가 사사로이 고신하고 영단을 추출. 세호 92년, 신영의 영단 공급책이 되어-.”

“네놈, 지금 무얼 하는 것이냐! 닥치지 못하겠느냐!”

핏기가 빠져나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익현이 세화를 향해 삿대질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그래도 네 혼례식이기에 적당히 하고 참으려 하였거늘!”

가문 없는 이들을 죽이고 영단을 추출한 것은 예전이었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일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주가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르는 이때 저게 사실로 밝혀지면 난 죽은 목숨이다!’

“이런 곳에서 가문의 원로를 모함하다니! 백가의 가모가 된다는 생각에 네년이 돌았구나! 나고 자란 가문을 그리 음해하고 나면 네 처지가 퍽 나아질 줄 아느냐!”

세화는 대답 없이 그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그 눈빛에 다급해진 건 오히려 주익현이었다.

그가 제 주변의 다른 원로들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아니, 왜 여러분은 내가 이런 음해를 받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계십니까! 주가 원로가 이 많은 이들 앞에서 이런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무렇지 않으신 겁니까? 이것을 방치하면 다음 차례는 누가 될지 몰라서 그리 몸을 사리시는 겁니까?”

‘……바로 그래서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원로들이 목에 핏대가 서도록 외치는 주익현의 눈을 일제히 피했다.

그들 역시도 지금껏 주익현과 같은 짓을 해 오지 않았나.

‘지금 저 어린것은 자기 손에 우리 원로들의 약점이 쥐여 있다는 것을 주익현을 본보기 삼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 난장에서 주목받는 것은 물론, 결코 다음 순번이 되고 싶지 않았다.

“상현 원로! 원로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실 겁니까!”

지명받은 주상현의 눈빛이 찰나 흔들렸다.

그도 몹시 난감했다.

‘저 어린것이 저런 일들을 어찌 저리 소상하게 알아냈지.’

게다가 가문이 없는 이들에게서 강제로 영단을 뽑아낸 횟수로 따지면, 모르긴 몰라도 여기 있는 원로들의 것을 다 합한 숫자보다 자신이 더 많을 터.

어린것의 눈빛을 보아하니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지가 않았다.

“상현 원로! 무어라 말씀 좀 해 보세요!”

주익현이 그리 다그치던 그때 세화의 발밑에서 잔잔한 미풍이 생겨났다.

희미한 바람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돌며 포석 위의 먼지를 띄웠다.

곧 들이닥칠 태풍을 의심치 못하게 하는 명확한 분노의 전조였으나 이것을 발견한 이는 아직 없었다.

세화의 붉은 입술 사이로 피식 웃음이 흘렀다.

“성품의 근본과 본질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 냉소에 망설이던 주상현의 눈썹이 치솟았다.

세화가 그런 주상현을 향해 다가갔다.

“자꾸 주가를 음해한다느니, 가문을 모욕했다느니 하는데. 그런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한 건 오히려 너희 자신이 아니냐. 옳은 일에는 누구도 나서지 않아 놓고 그 피해를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는 일만큼은 개나 소나 한마음으로 열심이구나.”

‘개, 개나 소?’

“주세화!”

주상현이 분노로 시뻘게진 눈을 부라렸다.

“너, 지금 가문의 어른들에게-.”

“가문의 어른.”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그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너 따위가 뭐라고. 과거에 네가 무슨 일을 어떻게 벌였는지, 내 입에서 자세히 폭로될까 봐 곤란할 때는 입을 닫아걸고 제 안위 챙기기 급급한 너 따위가 대체 뭐라고 내게 어른 대접을 기대해.”

“네, 네년. 네년이-.”

힘주어 움켜쥔 주상현의 주먹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이 어린것은 결코 주씨가 아니다.

혈족들의 허물을 덮어 줄 마음이 조금도 없는, 오히려 사람들의 앞에서 가문의 원로들을 대놓고 짓밟는 이런 것이 육문의 가모가 되도록 어찌 놔둘 수 있을까.

터질 듯 이를 악문 그가 세화 가까이 바짝 다가갔다.

주위를 의식한 듯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에게 경고했다.

“너야말로 이따위 행동으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해 보아야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를 이렇게 모욕 주는 것으로 영력을 잃은 네 위치를 영원히 감출 수 있을 것 같으냐.”

“영력을 잃어?”

“그래. 우리도 지금껏 허물없이 살아온 것은 아니나 그것만으로는 우리 모두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이리 후환을 만들고 나면 너 역시도-.”

“그거였나? 너희의 자신감의 이유가?”

하도 기가 막혀서, 세화가 조금 웃었다.

“어쩐지 이상하게 기고만장하다 했더니.”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발치에서 피어나던 옅은 미풍이 소용돌이처럼 솟아올랐다.

긴 혼례복의 소매가 격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전신에서 끓어오르는 영력을 발견하고 주상현이 경악했다.

“이, 이게 무슨. 너…… 너 힘을 잃었던 것이-.”

“너와 혈족들의 그따위 생각이 주가를 오늘날 이 꼴로 만든 것이다.”

콰앙!

결국 불꽃의 기둥이 직선으로 솟아올랐다.

“!!”

발밑의 포석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힘으로 터져 나갔으나 채 바람의 결계를 통과하지 못한 그것들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세로로 좁혀진 세화의 새까만 동공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 주상현을 직시했다.

“…….”

주상현이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졌다.

시선을 돌리고 싶었으나 돌릴 수가 없었다.

턱이 덜덜 떨리고, 그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천, 천리안.’

주가의 반석이 된, 세상의 만물을 읽어 내는 바로 그 힘.

육문의 가주들 역시도 땀으로 젖어 드는 등을 의식하며 눈을 깜빡였다.

제게로 향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제 밑바닥까지 까발려지는 듯한 두려움이 몰아쳤다.

“그래도 기회를 주려 했다. 죄의식 없이 다른 이의 몸을 빼앗고 그 안에 들어앉은 이들보단 나을지도 모른다고. 환경과 상황에 휩쓸렸을 뿐, 갱생의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으니까.”

타오르는 불꽃과 바람의 소용돌이 속에서 세화가 주상현이 물러나는 만큼 한 걸음 한 걸음 그를 향해 다가섰다.

“한데 내가 완벽히 틀렸구나.”

그런 그녀의 걸음마다 포석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하여 이곳에서 판결대를 연다.”

“……뭐?”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하늘이 울었다.

쿠르르르릉.

“!!”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던 하늘이 갑작스레 재로 뒤덮이기라도 한 듯 회색빛으로 덧칠되었다.

삽시간에 태양 빛이 가려지고 태풍이 오기 전처럼 싸늘한 북풍이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당황한 이들이 두려움에 하늘과 세화를 번갈아 응시했다.

“나는 너희가 가문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지켜보며 뭔가를 깨달을 줄 알았다. 본심은 다를지언정 겉으로라도.”

세화의 붉은 입술이 다시 한번 열리자 주상현이 깜짝 놀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분명 저 여인의 입에서 나온 말이건만 그것은 소리 같지가 않았다.

몸 전체를 울리며 그를 강제로 복종시키려 하는 명령과도 같았다.

그가 이곳에서 다른 이들에게 외쳐 대던 환계의 질서, 어떤 강제적인 법칙과도 같은.

“주씨 스스로 더 이상 신영의 위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판단과 함께 타 가문에 신영의 선출 권리를 동등하게 넘길 줄 알았다.”

세로로 갈라진 동공에선 신령한 기운이 흘렀다.

말하는 이를 결코 거역할 수 없을 듯한 그 위압감에 원로들을 포함해 주변의 모두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굳어졌다.

“그래. 한번 비천한 것은 결코 매나 용이 될 수 없다 하였던가.”

그것을 말하며 조금 웃은 세화가 붉은 소매를 들어 올렸다.

발밑에서 붉은 영력의 기둥을 밀어내듯 오색의 빛이 무섭게 타올랐다.

물길을 따라간 힘이 하늘에 닿자, 어두운 잿빛 하늘이 문이 열리듯 갈라졌다.

찬란한 빛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어, ……엇!”

자신들을 감싼 빛에 놀란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이 제 몸을 내려다볼 때였다.

그들을 뒤덮은 빛 하나하나가 시야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환한 빛을 터뜨렸다.

그 순간은 아주 찰나였으나 눈을 가린 이들에겐 억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찬란한 오색의 영력을 흩뿌리는 매의 무리가 그곳에서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세화가 두 눈을 둥글게 휘었다.

“세상엔 변하는 것도 있는 법이지.”

너희와 달리.

그리고 수많은 매들의 가장 앞에 선 최장명의 모습 역시도 서서히 변화했다.

다른 추방자 무리와는 확연히 다른 거대한 날개깃을 펼친 채.

삐이익- 위협적인 눈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

지켜보는 이들은 하나같이 제 눈을 의심한 채 그대로 굳어졌다.

뭔가가 일어나긴 했는데 보면서도 제가 본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한 본신이 바뀌었어? 그게 말이 돼?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건 노인이 다시 아이로 돌아가거나 여인이 갑자기 사내로 변하는 것처럼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있을 수 없는 일’을 현실로 만들어 낸 세화가 몸을 돌렸다.

“자, 그러면 다음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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