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2화 (232/254)

그때였다.

“그 손 치우지 못하겠느냐? 네가 뭔데 감히 우리 천주백장강진 소가주의 손을 잡으려 해?”

“뭐라고?!”

“소가주의 부친께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계시고, 육친만큼 가까운 숙부도 여기 버젓이 눈알을 부릅뜨고 서 있거늘 네가 뭔데 감히 부친의 역할을 대신하려 하느냐?”

번개같이 튀어나온 천가주가 주상현의 손을 치워 버렸다.

두 눈을 반짝이며 세화에게 손을 뻗었다.

“잡으려면 이 손을 잡거라. 주씨라는 성만 같다고 대뜸 이 중요한 자리에 나서려는 파렴치한 것의 손보다는 내 손을 잡아야한다.”

“이, 이……. 나는 주가의 원로다. 감히 그따위 막말을 내뱉다니!”

“우리 천주백장강진 소가주 아래로 다 부족하기 그지없는 것이 지위를 논하자며 꼴값을 떨고 있구나. 위치를 따지자면 나는 천가의 가주다. 감히 원로 따위가 가주들을 제치고 혼례식에 난입해 예식을 중단시키고도 입만 살아 그따위 말을 내어놓느냐?”

“……꼴, 꼴값.”

기가 막힌 주상현이 입만 뻐끔거렸다.

주위에서 모두 그런 제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그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시선을 명윤과 세화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가만히 그를 보기만 하고 있었다.

‘계획된 거구나. 정말로 계획적으로 우리를 모욕 주기 위해 이곳으로 부른 거야!’

“가문의 어른이 이따위 대접을 받고 있는데도 그런 태도라니. 네가 아주 작정을 하였구나! 계속 그따위로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 굴 생각이라면 나를 위시해 우리 주가의 원로들은 이 혼례식에 참석하지 않겠다!”

주가 원로들도 모두 동의한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성수가 수 놓인 검은 예복 소매가 두 사람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원로, 좋은 날입니다. 이런 식으로 식을 망치지 마시고-.”

식을 망쳐? 내가?

“닥쳐라! 이 쓰레기 같은 놈!! 감히 천한 피를 가진 죄인 따위가 내 앞을 막아서느냐!”

주상현의 온몸에서 불꽃 같은 주가의 영력이 폭발하듯 타올랐다.

바닥의 포석이 타닥!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그는 모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도 관계치 않고 소리쳤다.

“태초부터 환계 밑바닥을 전전해 온, 천하고 더러운 것들 주제에! 이런 예식에 참가하게 되니 네까짓 게 뭐라도 된 것 같으냐! 어디서 감히 가주와 원로의 대화에 끼어들어!”

그의 붉어진 눈이 이번엔 천가주를 향했다.

거침없는 붉은 영력이 천 가주를 향해 날아갔다.

“너는 숙부라 하였느냐? 네가 아무리 저 아이를 천가의 핏줄이라 우기고 싶어도 저 아이는 주씨다!”

깜짝 놀란 천가주 역시 영력을 끌어 올렸으나 주가 원로의 영력은 천가주보다 훨씬 크고 사나웠다.

“지금껏 그 어떤 혈통도 주씨 혈족과 혼인할 땐 제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 가문에 편입되었다. 왜 그런 줄 아느냐?!”

제게 덮쳐 온 불꽃 같은 영력을 채 다 막아서지 못한 천가주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걸음 두 걸음 물러났다.

“주씨가 가장 위대하기 때문이야. 이 환계에서! 주씨만이 그래도 되는 혈통이기 때문이다!”

주상현은 주변에 있는 모든 이가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화가 나 이곳에 있는 이들을 모두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

모두가 모인 이곳에서 내가 주가의 면을 바로 잡으리라.

어차피 적이 되려 하는 거라면 결코 쉽게 우릴 누를 수 없을 것임을 보여야 했다.

가진 힘을 모두 털어서라도!

“신영과 소가주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여럿 벌였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 한 명의 잘못으로 주가의 역사가 모두 부정되어야 하느냐?!”

악공들의 손도 천천히 멎었다.

주위가 씻은 듯 고요해졌다.

“소명 31년, 환계 전체가 악기(惡氣)에 둘러싸여 위태로웠을 때 스스로 자연으로 회귀하시면서까지 근원 영력을 모두 풀어 환계를 지키신 분이 누구냐. 백진 9년, 대기가 비틀어져 모두가 결계에 갇혔을 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육문 대신 주가 소가주와 주가 무사 일천 명이 목숨을 희생해 상황을 바로잡았다. 영사 11년은 또 어떠냐. 그때의 참혹했던 상황의 기록을 너희가 기억은 하느냐!”

주상현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듯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껏 주가는 환계를 위해, 너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거늘. 너흰 고작 한두 세대에 걸친 누군가의 잘못을 부풀리며 그 희생 전부를 모르는 척할 생각이냐? 그 몰염치한 일이 너희 위신 자체를 깎아내릴 것이라는 걸 생각한 이가 아무도 없느냔 말이다!”

이를 듣고 있는 군중들 중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그의 등을 밀어주듯 기세를 살렸다.

“관습과 질서는 그것이 세상을 바로 돌아가게 하는 이치이기 때문에 지켜져 왔다! 아무리 주가의 위상을 끌어내리고 싶다 하더라도 이따위 천한 피의 죄인 무리들을 환계 대대로 이어져 온 칠문과 나란히 서게 하다니!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어 주상현은 주명윤을 노려보았다.

“딸을 보면 부모를 안다고. 명윤 원로도 하는 짓이 뻔하군요! 그리 꼭두각시처럼 육문의 지배를 받아 혈족들을 외면할 작정이라면 당장 주가 가주의 자리를 내려놓으십시오! 더 이상 당신에게 주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맡길 수 없으니!”

그러다 주상현은 아직까지 제 근처에 서 있는 최장명을 발견했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아직도 주제를 모르고 여기에…….”

이를 사리문 그의 온몸에서 붉은 영력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최장명과 천가주를 동시에 덮칠 듯 날아간 힘은 무형의 벽에 가로막히며 폭발했다.

콰앙!

‘뭐, 뭐지? 백기하인가? 지금 누가 내 힘을 튕겨 낸…….’

주상현이 그 힘의 파동을 버텨 내며 잠시 제 얼굴을 소매로 가렸을 때였다.

“위엄 있는 신영과 주가 무사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해 잘 들었습니다.”

침착한 목소리가 그 고요 속에서 군중의 귀를 정확히 파고들었다.

“한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세화였다.

“그 위대한 기록 사이에서 원로는 대체 무엇을 하셨길래 이리 잘난 척을 하시는 겁니까?”

“뭐, 뭐야. 잘난 척?”

“전쟁 이전, 육문에서 행방불명된 아이들의 수색을 요청했을 때도. 하여 십 년 동안 육문의 무사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했을 때도. 원로들의 사병과 신영의 무사들은 단 한 명도 참여하지 않았죠. 신영이 대전에서 가문이 없는 이들을 산 채로 태워 죽일 때도. 원로들의 저택에서 노비들이 아무 이유 없이 화풀이의 대상이 되어 죽어 나갈 때도.”

한 걸음 두 걸음 걸어 나온 그녀가 주가 원로들을 돌아보고는 주상현을 향해 물었다.

“여기 그 상황을 바로잡고자 나섰던 분이 계십니까? 심지어 천한 피라며 당신이 욕한 이들은 신영에 의해 억울하게 가족이 희생되고 죄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이들이 아닙니까. 한데도 원로는 뻔뻔하게 그런 말을 당당히 입에 담으시는 겁니까? 선조의 공으로 자신들의 과오를 덮어 무마시키려 하면서?”

“그것이 오명인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장담하느냐!”

그때 주상현의 뒤에 시립해 있던 원로 중 하나가 무리 속에서 튀어나오며 삿대질했다.

“저 천한 죄인 놈들 중 몇몇이 불민한 일을 겪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모든 이들에게서 증거가 발견된 것도 아니거늘, 작은 죄를 부풀려 우리를 압박하려 해?”

“작은, 죄?”

“그렇다! 선조의 공으로 내 과오를 덮는다고? 그럴 만하니 그러는 것이다! 왜 핏줄이 중요한 것인데! 그것이 그 가문 일원들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그가 세화를 향해 소리쳤다.

“개가 용이 될 수 있느냐? 쥐가 매가 될 수 있어? 한번 용은 영원히 용이고 천하고 더러운 것은 환계의 마지막 순간에도 천하고 더러운 것들이다! 왜냐! 그것들은 늘 그리 살아왔기 때문이다. 선조들의 행위야말로 그 혈족들을 대표하는 가장 근원이요, 본질인 것을!”

“…….”

“개돼지는 그 어떤 순간에서도 개돼지란 말이다! 우리와는 다르게!”

잠시 멈췄던 세화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붉은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판결대로 끌려가는 죄인들을 보면서도 이런 말이 나오다니.

‘이자들은 전혀 변하지 않는구나.’

한숨 같은 그녀의 웃음이 조금 더 이어졌다.

저 말에 동의하듯 자신을 향해 공격적인 시선을 보내는 원로들을 일별한 그녀가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길고 애처로운 속눈썹이 풀잎처럼 흔들렸다.

하지만 얇고 흰 눈꺼풀이 다시 올라갔을 땐.

“최장명.”

더 이상 그 눈에 감정은 들어 있지 않았다.

많은 일을 겪고도 조금도 변화 없는 이들의 행태에 그녀도 분노가 치밀었다.

“예, 아가씨.”

세화의 부름에 검은 예복을 차려입은 최장명이 단번에 앞으로 나섰다.

“여기서 이 원로의 행적을 읊어라. 이름은 주익현이다.”

“예?”

단정한 얼굴 위 부드럽게 꺾여진 최장명의 눈썹이 당황으로 조금 좁혀들었다.

세화가 서월에게서 빼앗았다가 이후 백가로 옮겨 온, 판결대로 보내지지 않은 주가 원로들의 그간의 행적을 미리 그가 받긴 하였다.

‘어쩐지 계속 소지하고 있으라 하시더니만.’

하지만 혼례식을 위해선 이들이 더이상 난장을 만들지 않도록 진정시키는 편이 나을 텐데.

‘아가씨께서는 더욱 싸움을 붙이실 생각이신가?’

고민이 들었으나 망설임은 없었다.

그가 곧장 명받은 바를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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