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1화 (231/254)

처음 가주 위를 자신이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만 해도 그저 다른 원로들의 청 때문이었으나, 지금은 점점 그 자리가 꼭 필요하다 여겨졌다.

‘그래. 사람들이 가득 모였을 때, 그 앞에서 가주 위를 청할 테니. 내가 가주가 되어서도 똑같이 굴 수 있는지 두고 보자.’

주상현은 매섭게 날이 서는 제 시선을 애써 아래로 내려 감췄다.

* * *

높은 위치에 있는 주가의 원로라고는 하나 사실 그들은 영지 밖으로 나가 본 적조차 많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은 모두 주가에 있으니 나가 봤자 별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겨울 초입의 백석저는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새하얀 대리석 저택은 이 계절에 태어난 듯 싱그러웠고 계절에 맞지 않게 만개한 꽃들이 저택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혼례식을 위한 장식들이 화려하게 늘어서 있었으나 조금도 난잡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감탄만을 자아내는 풍경 앞에서, 백석저를 처음 본 주가 원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지. 겉보기에만 잘 꾸며 놓기는 쉽지. 어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주가의 풍경과 비교한단 말인가.’

게다가 연합 수장의 혼례이니 육문이 모두 참석할 거라 예상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절 몇몇이 올 것으로 생각했건만, 이런 장면이라니.’

너른 혼례식장엔 모든 가문의 무사들이 가문의 상징색을 몸에 두른 채 시립해 있었다.

이런 위엄 있는 장면을 보았던 게 언제였던가.

신영의 등극식조차 이렇게 절도 있었던 적이 없었다.

‘게다가 저 많은 흑색 옷은 다 뭔가. 어찌 저런 천한 것들이 이 자리에 있어?!’

주상현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추방자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마치 자신들도 환계 칠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 가문의 일원이라는 양 예복을 갖춰 입은 채로.

애써 표정을 관리해 왔던 주가 원로들의 얼굴이 거기서 한 번 더 일그러졌다.

“얼마 전 신영의 등극식엔 육문을 다 합쳐 고작 수행원까지 셋만 참석해 놓고. ……이곳만 보아서는 지금 치르는 것이 신영의 등극식인 줄 알겠습니다.”

“게다가 저 죄인들은 다 뭡니까. 저들이 혼례식과 무슨 연관이 있다고 이곳까지 불러 놓았단 말입니까.”

“육문에서 우리 죄를 자각시켜 또 한 번 압박하기 위해 세워 놓은 거랍니까?”

저곳에 있는 흑색 예복의 무리는 그들이 직접 모든 걸 빼앗고 인계로 추방했던 이들이 아닌가.

신영의 명에 의해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간에 저자들은 그들의 과오이자 치부였다.

그것만으로도 껄끄러운데 가문도 없는 저런 천한 피들이 고귀한 원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다니.

게다가 신부의 마차를 둘러싸며 마치 자신들이 그녀의 뒷배라도 되는 양, 어깨를 당당히 편 모습이 더없이 기고만장해 보였다.

설상가상으로 미리 도착해 있던 명윤이 주상현과 원로들을 향해 신호했다.

신부를 호위하며 제단으로 인도하는 역할이 다 끝나지도 않았건만, 이만 빠지고 가문의 자리에 서라고.

의아했지만 무슨 일인가 하여 비켜서던 순간이었다.

흑색 예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 미리 얘기가 된 것처럼 앞으로 나왔다.

그런 뒤, 자신들이야말로 신부의 혈족인 양 그녀의 마차를 호위하기 시작했다.

말이 되지 않는 예식에 원로들이 입을 뻐끔거렸다.

어찌, 감히! 대체 예식을 어디까지 제멋대로 진행하려 하는가.

원로들의 분기가 단번에 머리꼭지까지 올랐다.

“저, 저!”

“상현 원로! 저래도 되는 것입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원로 여식의 이름이 주가의 가적에 올라 있는데, 어찌하여 저 근본도 모르는 천한 추방자들의 호위를 받는단 말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여기까지 와 있는데!”

“아무리 임시라지만 명윤 원로는 지금 주가의 가주가 아닙니까! 어찌 가주가 되어 우리에게 이렇듯 모욕을 주는 것을 그저 보고 넘긴단 말입니까.”

“상현 원로. 원로께서도 한 말씀 해 보세요.”

“쉬이.”

주상현이 이를 사리물며 속삭였다.

“이런 일을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나. 하지만 가주 위를 넘겨받으려면 결국 명윤과 육문의 동의가 필요해.”

“……그건.”

“나 역시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참고 있는 것이다. 하니 어디까지 하는지 한번 보자고.”

“하지만 원로. 주가의 위상에 먹칠이 되고 난 뒤 가주 위를 가져온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이런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원로께서 나서 주십시오.”

그때였다.

분노한 그의 뒤에서 조금도 감탄을 숨기지 않는 거센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가마에서 신부가 내리고 있었다.

악공들이 때를 맞춰 힘차게 악기를 연주했다.

처음으로 혼례복 차림을 드러내는 신부는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신부는 이곳으로 오는 내내 가마에서 한 번도 내리지 않았고, 혼례식장 앞에 마련되는 신부의 단장관에도 들리지 않았다.

한데도 어찌 저리 흐트러짐 하나 없이 단정하기만 할까.

그녀의 놀라울 정도로 투명한 피부 위엔 새빨간 예복과 대비되는 미미한 홍조가 떠올라 있었는데 그것이 그렇게도 여리고 부드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걸을 때마다 살랑이는 예복의 끝자락은 꽃송이를 가득 매달고 머리를 늘어뜨린 가지처럼 애처로웠다.

장식이 화려한 흑단빛 머리 그 아래로 보이는 사슴처럼 길고 가는 흰 목은 보는 이들의 입안을 바짝 마르게 했다.

제단으로 통하는 포석 위에 무슨 장치를 해 둔 것인지 그녀의 걸음이 닿는 곳마다 투명한 빛이 아침 햇살처럼 번져 나왔다.

여인이 제 앞을 지나는 동안, 그 길목에 선 칠문의 참석자들은 영원 같은 찰나를 홀린 듯 응시했다.

그때 주상현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 저!’

잠시 신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느라 늦게 알아차렸다.

이쯤에서 주명윤이 내려와 신부의 손을 잡고 제단에 올라야 하건만.

어느샌가 주명윤은 내려와 자신들의 앞, 가주석에 앉아 있고 신부를 뒤따르는 것은 흑색 옷을 입은 추방자들뿐이었다.

부모의 안내를 받지 않고 홀로 혼례식을 치르는 것은 가주에게밖에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명윤은 저 여식을 가주 위에 앉히겠다 선언이라도 하는 건가?’

주상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혼례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건만 그랬다가는 절대 제가 가주가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단번에 앞으로 나섰다.

고개를 숙인 채 신부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세화의 시선이 손에 잠시 닿았다가 주상현에게로 올라왔다.

붉은 입술이 열리며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물었다.

“뭐죠?”

주명윤을 한번 응시한 주상현이 대답했다.

“명윤 원로께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시는구나. 제단의 상단까지는 신부의 가족이 신부를 인도하여야 한다.”

“그래서 지금 원로께서 제 아버지를 자칭하시는 것입니까?”

공격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정말 궁금해서 묻는 듯, 살짝 천진하기까지 했다.

“너와 나는 한 핏줄이고 나는 너의 숙부나 다름없으니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냐.”

“…….”

“아무리 환계를 지탱해 오던 질서가 지금은 잠시 흐트러졌다고는 하나, 그런 때이기에 더 지켜야 하고 더 이어 가야 하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세화는 대답 대신 가만히 그를 보기만 했다.

“지금 이 예식에서 주가가 얼마나 모욕을 당하고 있는지 너도 모르지 않겠지. 내 충고 하나 하마. 너도 이런 식으로 네 가문을 함부로 하여 좋을 것이 없다.”

주상현이 입술을 짓씹으며 덧붙였다.

“육문의 가모 자리가 좋기만 한 자리인 줄 아느냐? 가문과 가문은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에 흡수될 수는 있어도 동등하게 하나로 섞일 수는 없는 법이다.”

“원로.”

“그냥 들어라. 네가 아무리 신수가 되었다 한들 백가주 역시 신수다. 그는 너보다 더 먼저 육문의 수장이 되었지. 혹 네가 그와 이후 반목하게 된다면, 그때 육문이 너를 지지하겠느냐? 아니면 백가주를 지지하겠느냐.”

주상현이 착각하지 말라는 듯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네 편은 너를 낳아 주고 길러 준 우리 주가밖에 없는 것을. 그 간단한 이치조차 파악하지 못하다니. 아니지. 너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저 추방자들을 뒤에 세워 네 세력을 늘리려 한 것이겠지.”

악공들이 당황했으면서도 연주를 멈추지 않아 주변에 대화의 내용이 퍼지지는 않았다.

하나 이미 주변 사람들은 식 중에 갑자기 무언가를 속삭이는 둘의 모습을 가만히 집중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돌아본 주상현이 손을 털며 재촉했다.

“어서 잡거라. 이 엉망인 예식을 조금이나마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하여 우리 주가가 네 곁에 있음을 알리거라.”

“…….”

“어서 잡으래도!”

그때였다.

연지를 바른 세화의 입술 사이로 구슬 같은 웃음이 흩어져 나왔다.

채 지우지 못한 웃음을 여운을 입꼬리에 남기며 그녀가 물었다.

“저도 하나 묻겠는데, 이것은 주가 원로 모두의 공통된 생각입니까?”

“뭐?”

“대답하십시오.”

“그렇다.”

붉게 칠한 세화의 입꼬리가 위로 솟았다.

“그렇다면 확실히 원로께서 이 어리석은 혈족을 깨우쳐 주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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