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0화 (230/254)

깜짝 놀란 최덕문이 몸을 돌렸다.

‘어떻게? 장명이의 이름을 저 여인이 대체 어떻게?’

몸을 빼앗을 수는 있었으나, 그들은 기억마저 빼앗지는 못했다.

하여 사랑하는 가족이 나타난다 한들 이름은커녕 정체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한데 이 여인이 장명이를 알아?’

여인의 몸이 들썩였다.

“이제 겨울이라, 우리 장명이가. 헤어질 때 감기에…….”

“…….”

“감기에 걸려 있었는데.”

여인의 젖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날이 추워져서, 괜찮은지 한 번만, 한 번만 보게 해 주세요.”

‘대체 어떻게 그 사실까지.’

노행수의 울대가 움직였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날의 상황을 누군가 말해 준 것이 분명해.’

하지만 어떻게, 그리고 누가 그 사실을 알려 준단 말인가. 그런 일을 누가 기억한다고.

“대체 어떻게.”

거기까지 내어놓는 목소리가 너무나 떨려서, 최덕문이 중간에 말을 멈췄다.

마른침을 삼켜 목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당신이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지?”

“이렇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여자는 내 혼을 없애지 않고 한 몸에 두었었죠.”

“…….”

“믿기지 않을 거란 거 잘 알아요. 나였어도 그랬을 테니.”

“…….”

그녀가 천천히 제 상황을 설명했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내 몸은 죽어 가고 있었다고.

해서 당신이나 아이를 만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그저 더는 나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모두를 담장 안에 가두고 불을 지르는 게 최선이었죠.”

“…….”

“한데 그날 하늘 가득 퍼지는 빛을 쐬고 난 뒤 몸이 나아졌어요.”

“내가 여기 있는 줄은 어찌 알고.”

“주가 저택에서 저 아이를 보았었는데, 그때 달아난 이들이 백석저로 갔다는 말을 듣고. 혹 당신도 이곳에 있나 하여서…….”

“그러면 몸이 나아지고 곧장 이곳으로 왔으면 되는 것 아닌가? 주가 원로들과 백가 무사들이 불을 지른 범인을 계속 찾고 있었는데. 왜 계속 모습을 감추고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지?”

“그들에게 붙잡히면요? 당신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 주었을까요?”

“…….”

“그래서 그랬어요. 그렇게 잡히면 당신 얼굴을 한 번도 못 보고 판결대로 가야 할 것 같아서. 갈 때 가더라도 당신과 한 번 안아 주지도 못한 우리 아들 얼굴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보고 가고 싶어서.”

칠부인이 온 얼굴을 적시며 더듬더듬 그리 말했다.

“그래서 이곳까지 내 발로 왔어요.”

“……정말 당신이라고?”

“믿지 못할 말이라는 거 알아요. 믿어 달란 말은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깊은 애정이 젖어 든 눈 속에 담겨 있었다.

“그냥 한,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나요.”

그걸 아주 오래 기다려 왔어요.

당신을 다시 만나고. 아들을 다시 만나고.

그렇게 우리 세 식구 다시 만나서 얼싸안는 그 날을.

“……장명이도 한 번만 보여 주세요. 괜찮은지만, 정말 괜찮은지만 확인할 거니까. 얼마나 잘 컸는지만. 그것만 확인할 테니까.”

그럼 뭐든 할 테니.

어떤 죽음을 원한다 해도 그대로 따를 테니.

“…….”

그렇게 말하는 여인을 최덕문은 아직 모두 믿을 수가 없었다.

몸 뺏기로 다른 이의 몸을 차지한 이들 모두 저리 간악하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나.

무슨 짓을 해서건 살아남으려 갖가지 거짓말을 반복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리 아닐 것이라 반복해 주지시키면서도. 그리움에 사무친 몸은 덜덜 떨며 저 여인을 믿고 싶다 말하고 있었다.

최덕문이 한달음에 달려가 제 아내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진, 진짜 당신이야? 정말 당신인 거야?”

남편의 팔에 끌어안긴 여자는 이제 제대로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저 눈물만 쏟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여인을 힘주어 끌어안으며, 최덕문의 얼굴도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장명아!”

그는 나이도 잊고 엉엉 소리를 내다가 목이 쉬어라 고함을 쳤다.

“장명아!”

가주의 집무실 문이 열리고 장신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부부가 서로를 힘껏 끌어안고 우는 것을 보며 최장명도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 * *

세화와 백기하의 혼례식이 있는 날은 하늘에 구름조차 보이지 않았다.

새파란 하늘이 끝을 모르고 뻗어 있었다.

바람은 찼지만 온 사방에 만개한 꽃들이 가득해 장관을 이루었다.

주변 영지들은 혼례식을 구경하러 온 이들로 넘쳐나, 거리 곳곳에 발 디딜 곳이 많지 않았다.

혼례식에 참석할 자격이 되는 이들은 일찍부터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백석저로 몰려들었다.

초대받지 않은 이들도 혹 신랑과 신부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며 백석저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아직 정오가 되지 않았을 무렵, 멀리서 이어지는 악곡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소리쳤다.

“신부가 온다! 신부의 행렬이다!”

대로 양옆을 빼곡히 메운 이들이 썰물이 밀려나듯 반으로 갈라졌다.

그 사이로 거대한 신부의 가마가 수많은 수행인들과 신부 오라비들의 인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행을 이끄는 두 신부 오라비의 얼굴은 누가 봐도 제법 우스웠다.

화가 나면서도 기쁘고, 또 열이 받으면서도 기쁜 얼굴.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면서도 혼례식에 한 점 흠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처럼 착실히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뒤를 주가의 원로와 무사들이 짙은 붉은색 예복을 입은 채 말을 타고 뒤따랐다.

주가를 상징하는 수십 기의 깃발이 행렬 곳곳에 서 있었다.

마치 주가의 격은 한 번도 추락한 적 없다 말하기라도 하듯 악공과 시종, 무사들, 혈족들의 행렬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그 사이에서 행렬을 따르는 원로들의 표정만은 그리 밝지 못했다.

주가 원로 주상현은 길 양옆으로 몰려든 이들을 응시하며 입안으로 여러 차례 혀를 찼다.

지금껏 주가와 혼례를 치른 이들은 신부와 신랑의 위치에 상관없이 모두 주가의 영지에서 식을 치렀다.

비록 주가의 처지가 이 꼴이 되긴 했으나 그런 관례조차 무시하다니.

‘아무리 임시라도 그렇지. 대체 명윤 원로는 가주가 되어 이런 일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 한 건가? 육문 수장의 장인이 되면서?’

이런 식으로 주가 혈족들이 외부에서 식을 치르는 것은 환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교룡과 신영의 일로 주변에서 말이 많은데, 이런 때일수록 더욱 가주가 나서서 혼례는 주가 영지에서 하자 주장해야 했거늘.’

그가 그리 들릴 듯 말 듯 불만을 웅얼거렸을 때였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아, 아니. 저들이 지금 뭘 입고 있는 겁니까?”

“흑색? 상복에나 쓰이는 흑색을 입었다고?”

말을 탄 채 엄숙한 표정을 하고 다가오는 이들을 보며 원로들이 모두 당황했다.

그들의 의복엔 성수의 문양이 금사로 몹시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화려하다 한들 수의 바탕이 되는 옷감은 모두가 흑색이었다.

어찌 혼인식에서 불길하게 흑색을 입는다는 것인지.

무리의 가장 앞쪽엔 최장명의 모습이 있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벌게진 주상현이 주변에 가득한 인파를 신경 쓰지 않으며 호통쳤다.

“네놈이 아무리 유배지에서 살다 와 환계의 규칙을 모른다 해도 그렇지! 어찌 그따위 옷을 입고 지금 이 앞에 나타나는-.”

“내가 허락하였네.”

“백가주!”

그 흑색 예복을 입은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 말을 탄 채 앞으로 나왔다.

백기하였다.

“어째서 여기 계십니까. 예식이 시작하기 전에는 신부의 얼굴을 보아선 안 된다는 걸 모르시는 겁니까?”

“그녀는 마차 안에 있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무슨 상관인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혼례식의 법도를 이리 무시하신다는 건 저희 주가를 무시하시는 것이나--.”

“자네 무얼 잘못 알고 있군.”

백기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마치 손을 대지 않고도 얼굴을 후려치는 듯한 시선에 주상현의 몸이 주춤 떨렸다.

“뭘, 뭘 말입니까?”

그런 그를 보며 백기하가 피식 웃었다.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백기하의 몸에서 순식간에 예기가 사라졌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거지. 내 몸과 영혼까지도 이미 그녀에게 속박된 것을. 이곳으로 그녀를 오게 한 것도, 내가 가진 것을 모두 그녀의 발치에 헌납하기 위함인데. 그 마음을 너무 몰라주지 않나.”

주변에서 숨죽인 채 백가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인파가 그 말에 저들끼리 얼굴을 붉히며 환호했다.

하지만 주상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을 만큼 탈진한 몸을 간신히 말 위에서 지탱했다.

“신부께서 도착하시기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네. 하여 들뜬 마음에 마중 온 것이니 원로께선 너무 탓하지 말아 주시게.”

말과 함께 백기하가 몸을 돌렸다.

최장명을 비롯한 흑색 옷을 입은 추방자들이 가져온 돈주머니를 꺼내 환호하고 있던 이들에게로 흩뿌렸다.

반짝이는 금화를 보며 기쁜 비명을 지른 이들이 얼른 돈을 주웠다.

신랑의 큰 씀씀이에 환호하며 다시금 꽃을 뿌리는 것으로 감사를 표현했다.

모두가 즐거운 와중에 주상현만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의 시선은 위엄 있게 등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는 백기하의 뒤통수에 닿아 있었다.

‘저 백가 놈의 행동을 보아하니. 내가 가주가 되지 않으면 주가의 꼴이 점점 더 우스워지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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