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9화 (229/254)

* * *

“아가씨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예.”

최장명은 백석저에 신부 측 예물을 전달한 후 잠시 제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

최덕문을 비롯한 추방자들은 대부분 주가의 영지에서 살던 이들이었고, 지금도 반 이상은 무슨 일이 있었건 고향 땅에 다시 정착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 왔다.

하지만 지금 주가의 영지는 신영의 잔당들을 쫓는 일로 더없이 어수선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죄인들이 판결대로 끌려오고 있었던 탓에 백만용은 그들에게 일단 백석저의 별관을 먼저 내주었다.

주가 영지의 소동이 잠잠해질 때까지 잠시 머물 수 있도록.

하여 오랜만에 환계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들은 한동안 얼떨떨했다.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으니까.

그런 이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최덕문뿐이었다.

그는 인계에서도 자신들에게 정착금을 나누어 주며 생활을 도와주지 않았던가.

그런 최덕문의 아들이 지금은 육문의 수장과 혼인하는 아가씨의 최측근이라 하던데.

‘그 아가씨께서 우리들의 몸을 치료해 주시고 대기 중의 영기가 진해지도록 만드신 신수시라지?’

그러면 최행수의 아들에게 부탁해 우리를 좀 거두어 달라 부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최행수의 아들이 기반 없는 우리의 뒷배가 되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최덕문 역시도 난감한 고민과 불안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명윤 원로께서 아들을 환계로 데려가신다고 할 때만 해도 그는 들떠 어쩔 줄을 몰랐다.

짐승의 모습을 하는 것은 오직 신수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신수는 아니라 할지라도 내 아들은 사람의 모습과 짐승의 모습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모두가 장명이의 몸에 담긴 영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게 되겠지!’

그의 자신과 기대가 거품처럼 풍성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던 그때, 그는 천수아 부인을 따라 환계로 넘어왔다.

“…….”

그리고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짐승으로 변할 수 없다뿐이지. 제 아들 이상으로 대단한 영력을 가진 무사들이 빼곡했으니까.

지위나, 가문이나, 영력이나. 하나 같이 아들은 감히 비교할 수도 없는 이런 자들 속에서 제 아들도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내게 말은 안 하지만 분명 텃세도 있을 터인데.’

주가의 상황이 저렇게 되었으니 명윤 원로에게 의지하는 일도 쉽지 않아 보였고.

상인으로만 자라 온 아들은 제 주인 말고는 환계에 기댈 곳이 없었다.

하여 남보다 몇 배는 노력해야 할 아들에게 괜한 부담을 얹어 줄 수는 없다 여겼었는데.

‘그렇게 속을 끓이고 있었건만. 아가씨께선 그런 것들마저도 다 생각해 주시고 계셨구나.’

세심한 그 배려에 노행수의 눈가가 조금 떨렸다. 이런 분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어떻게 모를까.

게다가 예물의 전달자라는 것은 보통 가장 신뢰하는 측근이 맡아 진행하는 역할이 아닌가.

최덕문은 당연히 명윤 원로의 오랜 측근이었던 사단윤이 그 역할을 맡을 줄 알았다.

한데 아가씨께서는 예상을 깨고 환계의 행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제 아들에게 맡겨 주었다.

제 아들에게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만들어 주려 한 것이다.

“대단하신 분이시구나.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환계에서야 추방자였으나 그도 인계에서는 수많은 노비와 고용인들을 거느린 거대한 상회의 주인이었다.

순식간에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며 처지가 바뀌었음에도 그는 한 번도 노비들의 시선에서 무엇을 생각해 본다거나 그들의 인생을 바꾸어 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인정이 없다거나 성정이 차갑다거나 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것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어느 누가 굳이 어렵게 돌아가려 할까.

신영도 그랬을 것이고, 판결대에 올랐던 주가 혈족들도 그랬을 것이다.

수장이 되어 많은 일을 편히 진행하려면 계층의 수직 구조가 더욱 단단하게 맞물려 있는 편이 좋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건만.

세화는 이 계층 자체를 모두 횡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라 알려 온 것이다.

“곧 공석이던 자리가 주인을 찾겠구나.”

보잘것없는 제 처지로 언급하기 예민한 사항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더욱 확실히 알게 되는 것도 있었다.

저 같은 이들에게까지 손을 내밀어 줄, 억울한 일을 막아 주고 세상의 질서를 그들에게도 적용시켜 줄 그런 ‘신영’이 누구인지.

그 자리가 진실로 누구의 것인지.

아들에게서 그분이 그 자리에 오르지 않으려 하신다는 얘기도 전해 듣긴 했으나.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나뿐만은 아닐 테지.’

그러니 결국 자리는 주인을 찾아갈 거라고, 그 때를 기대하는 최덕문의 얼굴에 뿌듯한 행복감이 스며들었다.

“참, 아버지. 그리고 아가씨께서 혼례식 때는 모두 이것을 입으라시며 의복을 보내셨습니다.”

최장명의 뒤에는 세화가 그들에게 보내는 의복이 커다란 함 여러 개에 나뉘어 들어 있었다.

“모두? 혹 추방자들 모두 혼례식에 참석하라시는 것이냐?”

보통 경사가 아닌 만큼 참석하는 이들이 많아 자리를 만들기 쉽지 않으실 텐데.

‘그 사이에 딱히 인연이 없는 추방자들을 굳이 앉히시겠다고?’

세화의 의도가 궁금한 최덕문이 함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라 아들을 돌아보았다.

아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그도 감탄과 감격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를 꺼내 들었다.

“그래. 입어야지. 암, 당연히 입어야지. 아가씨께서 우릴 이리 생각해 주시는데 당연히 입어야지!”

최덕문이 그렇게 연신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백석저의 시종 하나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장명 무사님, 최 행수님. 가주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최장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백가주는 지금껏 한번도 그를 불러본적이 없다.

“나를? 백가주께서?”

“예. 행수님과 함께 지금 곧 가주의 집무실로 오시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엔 최덕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까지?”

“예.”

“무슨 일인지는 말씀이 없으셨고?”

“따로 말씀은 없으셨지만……. 죄인의 확인을 맡기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죄인의 확인이라니? 신영 저택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증언을 받으시려는 건가?”

“그건 아니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시종은 최장명을 한 번 응시했다.

가모의 최측근이신 분이니 이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다 여긴 것인지 바로 말을 이었다.

“지금껏 무사단이 쫓고 있던 범인이 제 발로 이곳에 도착하였는데, 그 여인이 인계로 추방되었다가 돌아온 이들 중 최덕문이란 분을 만나게 해 달라고. 그렇게만 해 준다면 아는 것을 다 말하겠다며 고집하여…….”

그 말에 최장명의 안색이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바뀌었다.

최장명이 부리나케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영문을 모르는 최덕문도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 * *

막상 백가주의 집무실에 도착한 최장명은 차마 먼저 들어가지 못하고 제 아버지를 기다렸다.

곧이어 아버지가 당도하자 머뭇거리는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먼저 들어가시죠, 아버지.”

“너는? 너도 함께 부르시지 않았느냐.”

“저는…….”

최덕문은 답지 않게 아들이 망설이는 모습을 이상하게 지켜보았다.

뭔가를 설명하려던 최장명은 결국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아버지께서 먼저 들어가신 후 들어가겠습니다.”

왜 저렇게 힘겨운 얼굴일까.

그것이 의아하면서도 최덕문은 아들의 말대로 먼저 백가주의 집무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

그리고 마치 귀신을 본 듯 멈춰 섰다.

그곳엔 영력을 봉인하는 쇄령을 차고 있는 어떤 여인이 있었다.

석상처럼 굳어진 그의 시선이 마구 흔들릴 때, 그 여인 또한 그를 발견하고 턱과 입술을 떨었다.

여인이 제 목을 쥐어짜며 그를 불렀다.

“여보…….”

여인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가기 시작한 최덕문의 어깨를 백기하가 잡아 멈춰 세웠다.

“신영의 칠부인이네. 그리고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미안하네만…… 몸 뺏기를 당한 그 누구도 돌아오지 못했어.”

그 말은 이 여인 역시 더 이상 자네의 부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최덕문을 부르는 저 호칭 역시 그저 판결대를 피하기 위한 술수일 거라는 경고이기도 했고.

최덕문도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몸 뺏기를 자행한 이들이 모두 얼마나 간악한 성정을 가졌는지.

그들은 판결대에 끌려가서도 자신들은 진짜라며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하고 떠들어 댔다.

그러니, 분명 제 부인의 얼굴을 한 저 여인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최덕문은 다가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평생을 사무칠 정도로 그리워하던 이가 아닌가.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았으면 소원이 없겠다, 그리 여겼었는데.

“여보, 나예요.”

여인이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붉어진 눈가로 투명한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보.”

자신을 보는 저 시선도. 표정도 그대로인데 어떻게…….

최덕문이 터질 것처럼 손을 움켜쥐었다.

몸 뺏기를 한 이들이 수없이 했던 말과 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난 그런 걸 한 적이 없다. 내가 맞다. 기억을 조작당했다. 난 그저 나다.

그런 이들에게서 진실을 토해 내게 하는 것은 두 번은 못 볼 광경이었다.

‘한데 이제 그걸 내 부인의 몸에 하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피가 나올 때까지 입술을 문 그가 힘겹게 몸을 돌렸다.

간신히 백기하를 향해 말했다.

“백가주님. 저는, 더 보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더 이상은. 제 아들 역시도요.”

“잘 알겠네.”

백기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집무실의 한편을 지키던 무사들이 여인에게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죽어도 좋아요!”

여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 죽이셔도 좋습니다. 목을 베셔도, 독을 먹이셔도, 어떠한 방법으로 저를 죽이셔도 좋습니다.”

바닥에 여인이 흘린 눈물이 흥건하게 번져 갔다.

“그래도 죽기 전에 제발 딱 한 번만. 저희, 저희 장명이 얼굴 한 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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