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8화 (228/254)

* * *

백석저에서부터 영공 지방을 지나 세화가 있는 주가의 저택까지는 단출한 인원이 전속력으로 말을 달려도 나흘이 꼬박 소요되었다.

한데 백기하가 얼마나 빨리 날아가, 관련된 이들을 재촉하고 마차를 출발시켰는지.

예물을 가득 실은 마차들의 행렬이 그것과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

‘백가주가 도착할 때까지 일주일 정도는 시간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일을 진행하던 주명윤은 먼저 도착한 전령이 가져온 소식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왔다고? 아니, 어떻게?”

그가 황급히 저택 문밖으로 달려나갔다.

신부에게 가는 혼례물이라는 것을 알리듯, 붉은 천이 장식된 마차가 끝도 없이 이어지며 저택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백가의 예장을 한 수행원들의 모습, 경사를 알리는 악곡들을 연이어 연주하는 악공들의 모습 또한 볼거리 중 하나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규모의 예물 행렬에, 구경하는 이들이 빼곡히 몰려들었다.

신영의 측근 잔당들을 쫓느라 흉흉하게 가라앉아 있던 주가 영지의 분위기가 모처럼 밝아졌다.

육가 연합 맹주의 혼인식이라서 그런가.

예물만도 격이 다르다 느껴질 정도인데, 본 예식은 대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러질까.

모두가 일생의 볼거리가 될 거라 예측하며 벌써부터 감탄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행렬의 제일 앞에서 의젓하게 앉아 지켜본 백만용의 볼이 씰룩거렸다.

“원로 어른.”

“어찌 예물 행렬의 사자로 자네가 온 것인가. 백가주가 혼례식의 준비에 들어갔으니 자네는 백석저를 관리하고 예식을 총괄하는 일을 맡았어야지.”

주명윤이 질색하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이곳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고생이 많았네. 잘 받았으니 자네는 이만 돌아가고 다른 이를-.”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원로 어르신.”

백만용이 진심으로 놀란 듯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이것은 그저 그런 혼례식이 아닙니다. 기나긴 환족의 발자취에 한 획을 그으신! 그런 저희 가주의 위대한 일생에 단 한 번밖에 없을! 게다가 그 상대가 누구십니까. 하늘이 맺어 주신 그분의 반려이시자 그 누구보다 고결하고 존귀하신 데다가 능력 출중하고 위대하신 저희 가모님! 그분의 생에도 다시 없을 그 무엇보다 중차대하고 역사적인 환계의 대경사가 아닙니까. 그런 예식의 중요한 한 부분인 예물 전달식에 사자로 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 백만용에게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저는 제가 맡은 역할의 무게를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 일로 알게 된 것입니다! 백석저는 제가 아니어도 여러 뛰어난 인재들이 관리를 돕고 있고 예식의 총괄 역시도 오문의 가주분들께서 힘써 주시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런 많은 훌륭한 이들의 조력 속에서도 가주께서는 오로지 저를 믿고 신임하시며 진정으로 자신의 대리를 맡을 자는 저밖에 없다고 생각하셨음을요! 돌아오신 가주께서 예물의 전달자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를 택하셨을 때, 하여 저에 대한 가주의 뜨거운 믿음과 인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 저 백만용은…… 앗 원로 어르신, 어딜 가십니까. 원로 어르신!”

채 머릿속으로 내용이 이해되기도 전에 계속해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목소리에 주명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저 헛소리를 매가 잡아 주어야 하는데.’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미운 정이라고.

자꾸 듣다 보니 제법 익숙해지기라도 한 건가. 저 현란한 말소리가 없으면 왜인지 가끔 뭔가 어색하고 아쉽기도…….

‘아니, 아니지. 미쳤나. 내가 지금 무슨!’

저도 모르게 든 생각에 주명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재상을 등 뒤에 두고 달아나자, 백만용의 목소리가 그런 주명윤의 뒤를 총총 따라왔다.

“아니, 원로 어르신! 어딜 가시는 겁니까? 저를 버려두고 가시면 어찌합니까?”

“버리다니요. 백가에서 이리 빠르게 예물을 보내 주셨으니 저희 쪽도 서둘러 출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준비가 어디까지 되었는지, 오늘 안에 출발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니 마음이 급해져서 가는 것입니다. 방은 준비되어 있으니 재상께서는 시종을 따라-.”

“앗. 그러면 가모님께 가시는 겁니까? 저도 데려가 주십시오. 저희 가모님께서 무탈하신 모습을 저도 꼭 두 눈으로 먼저 확인하고 싶- 명윤 원로 어른? 원로 어른! 같이 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주명윤의 발걸음이 한층 빨라졌다.

* * *

“그 상태로 영력을 조금 더 끌어올려 볼 수 있겠어?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세게. 조금만 더? 그래. 그 정도.”

주인을 찾아간 매, 최장명은 지금 제게 일어나는 일이 당황스러워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인계의 복식과는 전혀 다른, 처음 입어 본 환계의 전통 예복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환계 예식의 식순을 전혀 모르는 자신이 예물의 전달자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도 되는지 걱정과 동시에 긴장도 되었고.

신부의 대리자를 뜻하는 주가 예장 곳곳에 주명윤의 문장이 붉은 자수로 새겨져 있었다.

최장명은 인계에서는 항상 상투를 틀었었고, 환계에 와서도 머리는 늘 하나로 단정히 묶고 다녔었다.

그랬던 긴 머리가 이번만큼은 멋들어진 솜씨로 반만 틀어 올려져 관이 씌워졌다.

그런 그의 몸을 오색의 빛을 흩뿌리며 은은히 드러난 영력이 감싸 안았다.

세화를 따라와 있던 영무가 “오.” 하고 감탄했다.

“이렇게 단장하고 영력까지 두르니 마치 환계에서 손꼽히는 무장 같은데요. 지켜보는 육문의 아가씨들이 다 반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세화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이렇듯 과시하는 것처럼 힘을 두르게 하진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영무야. 가서 적련도를 가지고 오렴.”

이미 이것에 대해 언질을 받았던 영무가 냉큼 달려갔다.

긴 검을 두 손에 들고 돌아와 세화를 향해 내밀었다.

묵직한 무게의 그것을, 세화가 최장명을 향해 내밀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였다.

“이것은…….”

“받아. 이제 자네의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처음으로 주가의 원로 자리에 오르셨을 때부터 사용하시던 검이지.”

“예?! 그리 귀한 것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받아도 돼. 이것은 아버지께서 먼저 자네에게 주라 하신 것이니.”

“명윤 원로 어른께서요?”

최장명의 의아한 시선이 검 위로 떨어졌다. 자신은 무인이 아닌데도 검을 주셨다고?

물론 인계에서도 제 몸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검과 활을 익히긴 했었다.

환계로 넘어와서도 갑작스레 생겨난 영력을 다루는 법과 영력과 무기를 혼합하여 사용하는 법을 급히 배우기도 했었고.

하지만 그는 지금껏 상인으로 자랐고, 그 외엔 달리 배운 것이 많지 않았다.

하여 세화의 자리가 정해지고 나서,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그에게도 큰 과제였다.

“자네에게 무인이 되어 달라는 뜻으로 검을 주는 것이 아니야. 그저 자네의 뒤에 언제든 우리가 함께할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주는 것이지.”

그 말을 하는 세화의 시선이 다정했다.

눈빛이 조금 흔들린 최장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뒤에 있다는 것이…… 어떤 뜻이신지.”

“인계로 추방되었던 이들이 내 어머니와 함께 이곳으로 돌아온 것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예. 그야.”

“그이들을 자네가 이끌어야 할 것이 아닌가.”

“예?”

짧은 대답에서 최장명의 당황이 물씬 배어났다.

아무리 상단의 후계자로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상단의 주인으로서지, 가문을 이끌고 누군가를 보호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지금껏 환계에서는 가문이 없는 이들에 대한 대우가 결코 좋지 못했지. 하지만 가문이 없다는 것이 어디 그들의 잘못인가.”

“……아가씨.”

“누군가가 나보다 무엇을 조금 덜 가졌다고 해서. 태어난 환경이 달랐다고 해서. 살아온 인생이 달랐다고 해서. 신영처럼 그들을 짓밟아도 되는 것은 아니지.”

커다란 비극으로 이어졌던 일들은 돌이켜보면 가문이 없는 이들을 낮잡아보는, 환계 전역에 깔려 있던 그 시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피의 진하기와 영력의 크기에 따라 저보다 못한 이를 동등하게 보지 않고, 때로는 같은 생명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그 인식부터 바꾸지 않는다면 교룡과 신영이 벌인 간 큰 짓들은 언제든 누구든 되풀이할 수 있을 터였다.

“해서 나는 가문이 없는 자들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먼저 만들어 주고 싶어. 그 역할을 자네가 해 주게. 나아가서는 본가와 방계를 나누는 경계 역시도 허물어뜨려 볼 생각이니까.”

“세화 님.”

“분명 쉽지 않겠지.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거고. 하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누구든 반드시 시작했어야 하는 일이니까.”

세화의 입가가 부드럽게 허물어졌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최장명을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자네의 힘이 필요해. 날 도와주겠어?”

최장명의 울대가 조금 움직였다.

“아가씨께서 원하신다면. 그게 무엇이든. 어떤 내용이든.”

그가 고개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굽혔다.

“전력으로 함께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최장명의 시선 속에서는 조금 전 보였던 당황과 두려움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때 영채의 목소리가 가볍게 날아들었다.

“아가씨! 백가에서 예물이 왔어요! 하나같이 엄청 휘황찬란해요! 나와 보세요!”

남자 측 예물의 도착이야말로 혼례의 시작이 아닌가.

소식을 들은 세화의 눈가가 다시금 부드럽게 휘었다.

그녀도 바라 마지않는, 그와 부부로 엮이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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