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빛을 머금은 듯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은 손안에서 물처럼 매끄럽게 쏟아져 내렸다.
“와. 원래도 부드러웠지만 지금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예요.”
“혼인식 때 머리 꾸밈은 꼭 제게 맡겨 주세요. 제가 이미 생각해 둔 모양이 있어요.”
빛 속에서 나온 그녀의 머리는 이전보다 훨씬 길어져 있었다.
마치 까만 밤이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에 영선과 영채의 시선 안에 감탄이 그득 담겼다.
둘은 그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가는 빗으로 세심하게 빗어 내렸다.
옆에서 그녀가 입을 의복을 준비하고 그에 맞춰 장신구를 고르고 있던 영무가 감회가 새롭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렇게 다시 뵙고 혼례식 준비까지 할 수 있다니.”
“거기다 아기님이라니. 그 작던 우리 아가씨가 아기님을.”
“영채야, 울지 말랬잖아. 좋은 일만 계속되는데 왜 자꾸 울어.”
“그러는 너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진짜. 너무 감개가 무량해서.”
영채의 엄지와 검지가 틈을 두고 조금 벌어졌다.
“맞아. 우리 아가씨, 요만하셨는데. 그런 아가씨가.”
“……그만하지는 않았지.”
세화가 둘 사이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영무는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영채의 손가락 사이 간격만을 바라보며 젖어 드는 눈가를 닦았다.
“그리 작던 아가씨께서 탈피도 하시고. 신수도 되시고. 혼례식도 치르시고. 이젠 아기님까지. 요만하던 아가씨께서 아기님을!”
“…….”
세화의 시선이 잠시 부산하게 흔들렸다.
“얼마나 예쁘실까. 통통한 볼에 새까만 눈동자를 깜빡이며 우릴 보시겠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내 손가락을 움켜쥐시기라도 하면!”
“혹, 혹시. 아기씨께서 자라셔서 내 뒤를 따라 걸어 주시기라도 하면 어쩌지?”
“호, 호, 호 혹시! 나한테 손을 뻗어 주신다거나. 내 이름을 부르시면-.”
심장을 부여잡은 영무가 꿈을 꾸듯 덧붙였다.
“분명 언젠간 말을 하실 텐데. 몽글몽글한 입술을 열어 ‘염무야’ 하고 혀짧은 소리를 내시면-.”
으아- 세 자매가 동시에 탄성을 냈다.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은 그녀들이 붉어진 얼굴을 하고 마루를 쾅쾅 두드렸다.
필사적으로 편안한 얼굴을 꾸며 내고는 있었으나 좌불안석이 따로 없던 세화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엇! 아가씨, 어디 가세요. 아직 단장이 끝나지 않았는데요.”
“아니. 잠시 차를 좀 마실까 해서-.”
“헉. 그런 잡일은 저희를 시키셔야죠. 앉아 계세요, 앉아 계세요. 지금 세상 귀한 아가씨께서 세상 귀한 아기님을 품고 계시는데 어찌 그런 일을 손수 하려 하세요.”
“네. 아가씨께선 그저 편안히 숨만 쉬세요. 눈짓으로만 지시하셔도 저희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빠릿빠릿 움직이겠습니다. 그래야 아기님께서도 자라는 데만 신경 쓰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
연거푸 들려오는 아기님 소리에 세화의 시선이 자꾸만 바닥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어 조용히 방 한곳에 닿았다가 돌아왔다. 그랬다가 다시 방 한곳으로 움직였다.
이 방에는 비단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어머니 천수아가 방 한곳에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제 말이 끝나자마자 어딘가로 달려가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황급한 발걸음이 향한 곳은 백기하가 가족들의 상봉을 위해 자리를 피해 있던 방이었다.
벌게진 얼굴을 한 주명윤이 단번에 백기하의 멱살을 잡아챘다.
어리둥절한 백기하의 몸이 노장의 손안에서 좌삼삼 우삼삼 흔들렸다.
“백, 백가주! 이, 이것 때문이었습니까! 그래서 혼례식을 서두르신 겁니까!”
“예?”
“이, 이…….”
강하게 다문 잇새 사이로 순간 제 욕을 들은 것 같아서 백기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쉬운 얘기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런 이야기는 미리 언질을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랬다면 제가 진작에 협조…… 아니 협조는 무슨! 아직 나이가 쉰도 되지 못한 제 여식을. 그보다. 그…… 혼례식을 반대할 마음은 없지만 이건……!”
“장인어른. 지금 무슨 말씀을.”
“아직도 그리 시치미를 떼시는 겁니까! 그러지 마시고 어서 가셔서 예물이나 보내십시오.”
“예물이요?”
“일단 혼인식은 합시다! 돌아오는 가장 빠른 길일에!”
“!!!”
백기하가 숨을 들이켰다. 가장 빠른 길일은 스무이튿날 후였던 것이다.
“그런데 백가주. 혼인식 준비 전에.”
“네! 장인어른!”
“한 대만 맞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딸을 위해 많은 것을 해 준 것도 알고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것도 알지만, 그렇다고 울화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세화 그 아이가 탈피를 마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힘든 일에서 돌아와 이제 막 세상을 보기 시작한 그 아이를…….’
그 복잡한 속도 모르고 백기하는 열렬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인어른!”
혼인식을 한 달 안에 한다는데 한 대가 대수일까.
백 대 천 대를 때리셔도 된다고.
백기하는 혹 높아진 제 영력에서 오는 반탄력 때문에 소중한 장인어른의 주먹이 다칠지도 모른다며.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몽둥이를 가져오겠다, 저의 뛰어난 반사 신경이 혹 저절로 몸을 피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지금 당장 밧줄로 묶겠다, 같은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덧붙이다가 기어코 화를 키웠다.
“됐으니 지금 당장 출발하십시오. 남자 측 예물이 먼저 당도해야 우리도 예물을 보낼 것이 아닙니까.”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던 백기하의 입꼬리가 결국 참지 못하고 위로 솟았다.
그가 또다시 네, 네. 고개를 흔들었다.
“어린 시절을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하고 많은 힘든 일을 홀로 겪게 한 아이입니다. 저희에게 참 아픈 손가락입니다.”
“……장인어른.”
“그러니 백가주께선 최대한 빨리 예물을 보내 주시는 일에만 집중해 주십시오. 그곳에 남은 제 두 아들놈 역시 가시는 대로 엉덩이를 걷어차 이쪽으로 보내 주시고요. 저희도 준비하고 있다가 예물이 주가 영지로 들어서는 순간 곧장 출발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부족함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침착함을 되찾은 주명윤을 보며 백기하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녀를 언제까지고 제 목숨보다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여하튼 그 일 뒤로 백기하는 세화에게 최대한 빠르게 돌아올 것이라 웃어 보이고는 백가로 급히 떠났다.
아무리 그래도 그다음 길일이 반년 후만 아니었더라면 이리 급히 움직이진 않았을 텐데. 가장 빠른 길일과 그다음 길일 사이에 간격이 너무 길었다.
하여 최대한 빨리 일을 진행하기 위해 사고를 치긴 했는데…….
‘……그런데 왜 어머니께선 아무 말씀도 없으시지?’
부모님께 이런 큰 거짓말을 해 본 적이 없다 보니 해 놓고도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고 죄송스러운지.
그녀는 제 어머니 아버지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그때 열어 둔 창 너머로 약간의 소란이 밀려왔다.
“뭐지?”
영무가 무슨 일인지 상황을 알아보고 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영선과 영채도 갑자기 떠들썩해지는 듯한 외부에 신경을 기울이는 듯 말이 없어진 사이, 세화가 조용히 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응?”
“…….”
“왜 그러느냐.”
“……그게. 저…… 죄송해요.”
“뭐가?”
“…….”
천수아가 답지 않게 말을 삼키는 제 딸을 부드러운 시선을 하고 기다려 주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서요.”
세화가 그리 대답하자 천수아의 시선이 아래로 조금 휘어졌다.
그녀의 눈이 세화의 배에 닿았다가 조금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 딸의 얼굴에 닿았다.
편안한 웃음을 머금고 있던 입꼬리가 조금 더 위로 휘었다.
마치 당사자조차 눈치채지 못한 무엇을 미리 짐작한 이처럼.
그녀의 부드러운 시선이 세화를 떠나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미소가 흐르는 입술이 열렸다.
“너의 인생이다. 네가 후회 없이 산다면 그걸로 되었다.”
“……어머니.”
“네가 무탈하게 돌아온 것만으로도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아무것도 더 욕심내지 않을 것이다.”
따뜻한 그 말에 세화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녀가 다시 한번 제 어머니를 부르며 무어라 질문을 던지려 할때였다.
“아가씨. 지 행수가 왔습니다! 나와 보시겠어요?”
영채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방 안으로 흘러들었다.
* * *
주가의 영지에 남아 있던 지 행수는 혼례식 소식에 그 무엇도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누군가를 따라야 한다면 이분을 따르고 싶다.
존경할 수 있는 주인을 위해 충성을 다하고 싶다.
그런 소망을 가지게 되고 나서, 정말로 그 아가씨께서 신영의 위에 오르실 거라는 말이 퍼져 나가고 있는 시점이 아닌가.
어찌하여 등극식보다 혼례식을 먼저 치르시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아가씨의 일이라니 저 역시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그런 그녀의 뒤로 무게가 상당한 마차 세 대가 부리나케 쫓아와 도착했다.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혼례식을 준비하신다는 말씀에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이리 막무가내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영선에게 머리 시중을 받고 있던 세화가 소식을 듣고 나와 지 행수를 맞이했다.
“내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하례물을 가지고 백가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바깥에서 명윤 원로님을 뵈었는데 아가씨께서 여기 계시다고 알려 주시더군요.”
지난번 변용 능력자를 구해 준 것도 그렇고, 제게 보이는 깊은 신뢰와 호감에 세화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
“어서 오게. 나도 자네를 다시 보니 좋군.”
“그저 필요하실 때 절 기억해 주신다면 기쁘겠습니다만.”
“그럼 혹 내 청을 하나 들어줄 수 있겠는가. 말하는 것을 좀 구해 주었으면 하는데.”
“청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천지를 뒤져서라도 구해 오겠습니다.”
“하하. 그 정도로 어려운 것은 아니야. 다만 시일이 좀 촉박해. 그래도 해 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하명하십시오.”
지 행수의 태도는 이미 고객을 대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단단한 충심을 선명히 담은 채로 지 행수가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