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6화 (226/254)

도무지 이리 급하게 혼례식부터 치르려 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주명윤이 백가주에게 물었었다.

“한데 환계를 평화롭게 한다는 목적에 더 부합하는 것은 신영의 등극식이 아니겠습니까.”

“그건.”

“주가가 저리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을수록 한시라도 더 빨리 신영을 세우는 편이 혹시 모를 혈족들의 부당한 규합을 막고 사태를 더욱 빠르게 수습하는 길이라고 생각됩니다만.”

“……하면 등극식과 혼례식을 한 번에 치르면 어떻겠습니까. 마침 돌아오는 길일이 신영의 등극식에도 걸맞은, 화기가 맥동하는 적월의 길일이니까요.”

“…….”

그건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았다.

어찌 신영의 등극식과 육가 연합 맹주의 혼례식이라는 두 커다랗고 중요한 행사들을 그리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합쳐서 치를 수 있을까.

주명윤은 제 딸을 신영의 자리에 올리고 싶었다.

권력을 잡고 싶은 마음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아버지 된 마음만을 따지자면 더더욱 딸이 그런 자리에 올라 고생을 하느니 그저 아무런 책임도 없이 즐거운 매일을 보내길 바랐다.

하지만 위기 앞에서 누구보다 먼저 뛰쳐나가고, 사람들을 지키고,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흩어진 조화를 바로잡고.

바로 곁에서 딸이 해내는 일들을 지켜보며 주명윤은 처음 신영에 대해 실망했던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믿고 따를 수 있는 주군을 얼마나 원했던가.

헌데 그 당시 자신의 바람에 걸맞은 이가 바로 곁에 있었다.

그때의 자신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지도자의 자질 중 그 무엇도 빠지지 않는 완벽한 가주가 여기 있노라고.

그렇기에 더더욱 혼인식을 먼저 치르는 일이 망설여졌다.

아무리 가모라 불린다고는 하나 백가는 특히나 여성의 대외적인 활동이나 행동에 더욱 보수적인 곳이었으니.

이왕이면 신영의 위에 먼저 앉아서 주가와 환계의 우두머리로서 육가 연합의 맹주와 혼인하는 편이, 백가의 가모로서 신영의 자리에 앉는 것보다 딸에게 힘이 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도 쉬이 반박하는 말이 나오지 않긴 했다.

그건 분명 제 앞에 있는 사내의 눈 속에 들어찬 선명한 조급함을 읽어서였을 것이다.

‘백가주가 무슨 이야기에든 기승전혼례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건 이미 특별한 일이 아니긴 했지만…….’

잠시 망설이던 주명윤이 세화에게 말을 꺼냈다.

“별일은 없었다만. 혹 괜찮으면 네가 백가주를 설득해 줄 수 있느냐. 혼인식보다는 네가 신영의 위에 먼저 오른 다음에-.”

“예???”

세화가 눈을 깜빡이며 주명윤의 말을 막았다.

“제가, 뭐가 된다고요?”

“왜 놀라는 것이냐. 일전에 아비가 이미 말한 적이 있지 않니. 네가 신영의 위에-.”

“아버지. 전 신영이 될 생각이 조금도 없는걸요.”

“뭐??”

“그리고 등극식을 치른다 해도, 신영의 등극식과 혼례식을 분리해서 치르려면 그 사이에 시간의 간극이 꽤 되겠지요?”

“그건 그렇지. 두 식 모두 환계 전체가 주목할 큰 행사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저도 이런저런 논의보다 혼례식을 먼저 치렀으면 좋겠는데, 일단 혼례식부터 치르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내가 둘의 혼인을 반대하는 건 결코 아니란다. 하지만 아비의 판단으로는 네가 백가주를 설득해 준다면 좋겠구나.”

“예?”

“신영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부담될 수 있지. 그것은 충분히 이해한단다. 하지만 그리 벌써부터 그리 성급히 신영은 되지 않겠다고 결론 내릴 필요가 있느냐. 다른 가주들과도 대화를 나눠 보고, 필요하다면 충분히 고민해 볼 시간을-.”

주명윤의 말에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던 세화가 어느 순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버지,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뭐가 말이냐?”

“제가 그러니까-.”

“…….”

“저…….”

“…….”

“저, 혼례식부터 빨리 치러야 하는 이유가 생겨서요. 그러니까…… 사실. 이유가 좀….”

시선을 피한 세화가 제 배를 부여잡았다.

“…….”

잠시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명윤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너, ……너, 설마?!!!”

* * *

급히 백석저로 파발이 뜨고 이곳저곳으로 새가 날았다.

그날 바로 전 환계에 육가 연합 맹주의 이름과 주가 가주 대리 주명윤의 이름으로 혼례식이 공표되었다.

곳곳에 붙은 공표문을 읽은 이들이 이 일을 화제로 떠들었다.

“우리 주가의 아가씨와 육문 수장의 혼인식이라고? 이거 대단히 경사로군.”

“육문이라 할지라도 결국 주가를 무시하지 못한 거지.”

“가문이 아니라 그 아가씨이시기 때문 아닐까? 자네도 들었잖아. 그 아가씨께서 적룡이시라며. 교룡을 그냥 한 방에 이렇게 저렇게 하셨다는데?”

그 말에 누군가가 입을 삐죽거렸다.

“헌데 사실 난 그 이야기가 좀 미심쩍더라고.”

“뭐가?”

“정말 그분이 적룡이신 걸까? 그럼 어째서 적룡으로 거듭나신 것을 공표하지 않는 거지? 그 중요한 소식을?”

“무슨 말이야. 직접 보았다는 이들이 한둘이 아닌걸. 아, 혹시 혼례식에서 공표하시려는 건 아닐까?”

“그래. 아주 오랜 시간 만에 강림한 적룡이시잖아. 지금 주씨의 위상이 추락한 만큼 그 위엄을 되살리기 위해 모두의 앞에서 더없이 멋지게 밝히시려는 것일 수도 있지.”

“하지만 뭔가 이상하잖아. 적룡이라는 분이 신영의 위에도 앉지 않고 가주 대행은 또 다른 분이 하고 계시고.”

“맞아. 알고 보면 육문 수장과 혼인하는 아가씨의 뒤를 받쳐 주기 위해 만들어 낸 소문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몇몇 목소리들이 여전히 의심을 쏟아 냈으나, 주변의 이들은 거기에 쉽게 동조하지 않았다.

“그 교룡의 사기가 영지에서 싹 사라진 걸 보고도 그런 말을 해? 그럼 그 저주들은 누가 정화했단 말이야.”

“그래. 육문의 수장이 정화한 거면 그렇다고 하겠지. 굳이 신수가 아닌 아가씨를 신수라고 포장하겠어? 정말 신수가 되셨으니 신수라고 하는 거겠지.”

“그래도-.”

“그러면 차라리 우리도 혼례식에 가 볼까? 혼례식까지 들어갈 순 없겠지만 근처에 있으면 무슨 소식이든 가장 빠르게 들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래. 만약 들리는 이야기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주가 아가씨야말로 거대한 영력을 바탕으로 이 환계에 생명력을 되돌려 주신 분이 아니신가.”

고개를 끄덕인 이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우리의 은인이시기도 한데 혼례식에 선물 하나 드리지 않으면 말도 안 되지. 우리도 하례물을 가지고 가 보자고.”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눈 이들이 그렇게 혼례식이 열린다는 백석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꾸준히 못마땅한 목소리를 내던 이들은 그들과 반대로 갈라져 어딘가로 달려갔다.

어느 거대한 저택으로 부리나케 들어가서는 제가 들은 것들을 고했다.

너른 방 안에 모여 있는 이들 사이로 낮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지켜보고만 계실 겁니까.”

못마땅한 속내를 감추지 않고 있던 그들 중 누군가가 그리 목소리를 내었다.

신영이 한 일과 자신은 관계가 없다 부인하며 판결대 행을 피한 주가의 원로들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상황에서 내가 뭘 어쩌겠소.”

“하지만 확실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분명 그 아이가 적룡으로 변한 모습도, 새로운 신수로 변한 모습도 보긴 했지만 돌아온 이후는 너무 잠잠하지 않습니까.”

“그 강변의 일로부터 벌써 한 달입니다, 한 달.”

“그렇게 거대한 재생력을 사용한 이후이니. 신수로서의 힘을 잃어버린 것이 분명합니다.”

“맞습니다. 주가 역사서에도 그런 일들이 많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주경현이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도 그 추측에 힘을 실어 줍니다. 정말로 그녀가 적룡이라면 천리안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예, 그 아이가 신수의 힘을 쓸 수 있다면 신영을 한 달이나 도주하게 방치한 것이 어떤 이유로든 맞지 않습니다.”

“신수가 점차 환계에서 사라져 갔던 이유가, 세상을 조금 더 유지하기 위해 신수들이 그들의 거대한 영력을 대기 속에 녹아들게 하며 자신을 희생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짐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녀도 이와 비슷하게 힘을 잃은 것이 분명합니다.”

듣고 있는 주상현이 침묵하자 원로들이 한마디씩 더 보태며 그를 설득했다.

“상황도 이렇게 되었고, 우리가 뭘 어쩌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가주만큼은 우리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아시는 분이 되셔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명윤 원로야 강직하고 훌륭하신 분이지만……. 음. 가주의 자리에선 어쩔 수 없이 손을 더럽혀야 하는 일들도 있는 법인데 그분 성격으로 그런 것을 용납하시지 못할 게 분명합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일들도 많은데 그분이 가주가 되신 후, 신영과 측근들만 읽을 수 있는 기록까지 다 확인하게 된다면. 그래서 혹 그 일들조차 모두 공론화가 된다면 주씨들은 이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합니다.”

“다행히 명윤 원로께서 주가에 크게 실망하시긴 하셨으나 권력에 대한 욕심은 없는 분이시니. 당신의 여식이 신영의 위에 앉을 것이 아니라면 대화를 통해 상현 원로를 지지해 주실 것입니다.”

“그 아가씨가 힘을 잃은 게 아니라면? 아직 힘이 있다면?”

주상현의 물음에 원로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왜 혼례식이 먼저겠습니까? 누가 앉기 전에 신영의 등극식을 먼저 치르려 서두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힘이 사라졌기에 혼례식으로 먼저 합당한 지위를 주려 하는 것입니다. 대뜸 힘도 없는 아가씨를 신영의 위에 앉힐 수는 없으니 육가 연합의 가모가 주가 가주와 신영의 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기 위해서요.”

“…….”

“상현 원로. 결단을 내리시지요.”

“시간이 더 지나 가주 대행이 그대로 가주로 굳어지면 그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

“상현 원로!”

“일단-.”

한참을 침묵하던 주상현이 목소리를 끌며 말했다.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해 둡시다. 나는 내 욕심 때문에 신영의 자리를 탐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무슨 그런 말씀을.”

“당연하지요. 상현 원로의 대의를 우리가 다 압니다.”

“맞습니다. 상현 원로께선 그저 주씨들이 그래도 얼굴은 들고 다닐 수 있도록 힘든 역할을 맡아주시려는 것 아닙니까.”

모두가 그리 한마디씩 하자 주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원로들께서 그리 내 마음과 결심을 잘 이해해 주시니, 다른 건 몰라도 주가의 가주 자리는 주씨들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내 손에 가져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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