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223/254)

등 뒤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몸을 돌렸던 무사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

그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해 따라서 몸을 돌렸던 상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옷을 입은 누군가가 커다란 대문 밖으로 발을 디디고 있었다.

화려한 붉은 예복차림에 나비처럼 작은 발을 붉은 신 안에 감추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틀어 올린, 마치 꿈결처럼 몹시도 아름다운 여인.

다채로운 금장 장식이 들어간 붉은 겉옷 때문일까.

문틈에서 걸어 나오는 것만으로도 마치 어두운 삭월의 밤하늘 아래 피어나는 커다란 꽃송이 같았다.

새하얀 피부 때문인지 빛과 유리로 빚어진 세심한 공예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사가 놀란 것은 제가 지금껏 떠들고 있던 화제의 주인공이 등 뒤에서 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째서일까. 그때와 다른 분처럼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세화를 둘러싼 분위기가 제가 보았을 때와는 또 달라져서였다.

마치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온듯, 그때와는 뭔가가 근원적으로 바뀐 듯한 편안함과 부드러움이 여인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눈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도, 무릎을 꿇고 싶을 만큼 당당하고 위엄있는 모습도 그대로였으나.

보는 것만으로 어쩐지 그의 가슴 속 저 한구석을 뜨겁고 진하게 건드리는 듯한 이런 감정은 그때는 미처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

그가 그리 굳어 있는 사이 시선 속의 인물은 그를 유유히 지나쳐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사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작고 붉은 신 아래로, 그녀의 걸음마다 피어나는 작은 풀과 여린 꽃망울들을.

백가 무사와 이야기를 나누던 상대 역시도 그 장면을 목격했다.

“……헉.”

지금까지 이자가 목청을 높여 칭송하던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기 계셨었구나. 그 말들이 모두 사실이었구나.

그들의 당황을 뒤로한 세화는 봉문한 채 남겨 두었던 주가 안, 자신들의 저택을 떠나 쭉 걸어갔다.

점점이 남겨지는 푸르고 따뜻한 여린 잎들이 서두르지 않는 그녀의 발걸음을 따라갔다.

그녀의 걸음이 향한 곳은 신영의 저택이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백가의 무사들이 그녀를 알아보고는 자리를 피했다.

신영의 저택은 영기로 지켜진 담장만 남은 채 모든 것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무너져 있었다.

하나만 터뜨려도 목표물을 모두 태워 재로 만들 때까지 꺼지지 않는 신영의 불이 아닌가.

그것을 수십 개나 쏟아부었으니 이런 꼴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처참한 꼴이 될 줄이야.’

무사들은 여전히 저택을 이렇게 만든 범인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영기까지 세워 놓고 본격적으로 화마를 일으킨 범인이 제 흔적을 남기고 가진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찾아보지 않을 수는 없겠지.

내부에 있는 이들이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빈틈없이 막은 것을 보면 보통 원한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닌 듯했으니.

잿더미가 된 담장 안쪽을 가만히 응시하다 문 앞에 섰다. 곧 붉은 신이 영기가 막아서고 있던 문틀을 넘었다.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던 신 아래로, 차갑게 식어 버린 하얀 재가 들러붙었다.

엉망으로 그을려 무너진 저택의 잔재들을 돌아보았다.

채 부서지지 않고 남은 새까만 숯 몇 개와 끝없이 황량한 재투성이 공터만 눈에 담겼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건물의 잔해뿐 아니라 무수히 많은 뼈가 잠겨 있겠지.

그 순간 마른 바람이 그녀를 쓸고 지나갔다.

바람 안엔 비명과 원망, 저주, 슬픔, 고통과 아우성이 가득 녹아 있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수많은 손이 땅 위를 배회하는 모습이 그녀의 적자줏빛 눈에 담겼다.

뼈밖에 남지 않은 그것들은 그녀의 몸을 잡아끌어 당장이라도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내려가고 싶은 듯했다.

“꺼져라.”

짤막한 말에 배회하던 손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너희와 같은 곳에 가지 않는다.”

신영의 저택은 교룡의 저주에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던 곳이었다.

그녀가 신수가 되어 모든 것을 정화하던 그 순간에.

신영의 불에 휩싸여 있느라 정화되지 못한 단 한 곳의 장소이기도 했고.

가만히 원혼들의 한기가 서린 땅을 지켜보던 그녀가 손을 조금 들어 올렸다.

“하나 가는 길은 열어 주겠다.”

가만히 땅을 짚었다.

그 주위로 따뜻하고 포근한 빛이 맺혀 든다 싶더니 이내 부풀어 주변으로 퍼져 갔다.

화아―

재투성이 땅을 아침 안개 같은 빛이 덮자 땅이 조금 진동했다.

이내 흑백의 재들이 마치 바람을 타듯 살짝 떠올랐다.

잘랑 잘랑.

혼들이 불을 밝히며 맑은소리가 주변을 울리기 시작했다.

반딧불처럼 빛을 낸 원혼들이 천천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사기와 원혼들이 정화되고 흩어지는 과정은 그렇듯 조용히 이루어졌다.

정화가 시작된 이상 그녀는 더 이상 그곳에 필요하지 않았으나, 세화는 한참이나 그곳에 서서 그 장면을 눈에 담다 돌아섰다.

* * *

하얀 달이 호수 면을 떠가다가 연잎을 건드렸다. 잔잔히 떨리는 연잎이 연꽃의 향을 흐트러뜨렸다.

정자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세화가 문득 느껴지는 따스한 기운에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하늘 위로 새하얀 신수가 그녀를 향해 날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백기하.”

그녀를 담은 신수의 눈가가 부드럽게 변하는 듯하더니 곧 정자 옆으로 가뿐히 내려앉았다.

짐승의 모습이 새하얀 달빛 아래에서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길게 기른 검은 머리가 연꽃향이 무르익은 공기 속에 흩날리고 곧 설산처럼 새하얀 예복이 드러났다.

짧은 시간 만에 더없이 수려한 미남자의 모습을 갖춘 그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아버지가 당신을 쫓아내기라도 했어요?”

“그 무슨 말씀을.”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을 새도 없이, 남자가 서둘러 정자 안으로 들어왔다.

“장인어른께선 이미 나를 하나밖에 없는 사위로 생각하고 계시던데. 내가 말도 꺼내기 전에 그대와의 혼인식은 언제 치를 거냐며,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다 하셨어.”

“……정말요?”

“그럼. 하여 재상이 가장 빠른 길일을 잡아 식을 준비하기로 했고.”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워낙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깊고 단단해 다른 걱정은 없다고, 그저 그대를 잘 부탁한다고 하시더군.”

여전히 난간에 몸을 기댄 세화에게로 성큼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가녀린 몸을 안아 올렸다.

“날이 추운데 왜 여기 이러고 있어. 내가 불을 넣고 갔는데 방에 있지 않고.”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이 조금 서늘한 듯하자 그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작고 여린 손을 제 손안에 담은 그가 그 사이로 후, 입김을 불어 넣었다.

“영력이라도 쓰고 있지. 왜 이리 가만히 바람을 맞고 있었어?”

“내가 지금 몇 겹의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이 예복을 벗고 있지 말라고 해 놓고, 그 찜통에 나를 넣어 둘 생각을 한 거예요?”

어떤 식으로 불을 유지하고 간 것인지 남자가 불을 땐 방안은 너무 뜨거워 반 각도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성의를 생각에 그 안에서 한 시진은 버티다 나왔건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직접 해 본 적 없을 법한 이 남자가 저를 위해 쪼그려 앉아 아궁이에 장작을 넣었을 생각만 하면 입꼬리가 자꾸 허물어졌다.

결국,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행복하게 웃음을 내보이는 투명하고 부드러운 얼굴. 그 그늘 없는 모습에 백기하의 눈이 멍하니 고정됐다.

어찌할 바 없이 닿고 싶어서. 지금 그녀에게 닿고 싶어서. 그가 그녀의 볼에 촉, 입술을 내렸다.

“오는 길에 보니 이미 정화를 마쳤던데. 함께 하기로 했잖아. 조금 날 기다려 주지 그랬어.”

남자의 눈빛이 성글게 틀어 올려진 머리 아래, 눈부시게 하얀 가는 목덜미에 닿았다.

그곳에 입술을 가져다 대자 웃음을 흘리던 그녀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힘든 일도,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닌걸요. ……아.”

다디단 체향이 아찔하게 코끝을 자극하며 그에게 밀려들었다.

그의 손이 긴 머리를 고정한 비녀를 뽑았다. 윤기 나는 흑발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대가 그럴까 봐 서둘러 돌아온 것인데.”

머리카락을 손에 감고 그녀의 귓가와 목선을 따라, 조금 끌어 내려진 의복 안쪽 새하얀 어깨에까지 입술을 누른 남자가 투정처럼 언급했다.

말은 별것 아닌 듯하고 있었으나 그는 기실 정화된 저택을 발견하고 덜컥 겁이 났더랬다.

정화는 새로운 신수에게 속한 힘으로, 그가 함께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 홀로 사용했다간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르는 힘이었다.

여인은 그의 그런 불안감을 모르는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기하도 힘이 들어간 제 눈꼬리를 허물어뜨렸다.

하지만 그녀를 잃어버릴 뻔했던 강변의 상황은, 결국 되찾았음에도 그의 혼 깊숙한 곳에 치유되지 않을 상흔을 남겨 둔 상태였다.

“정말 별것 아니었어요. 만분의 일의 경우라도 위험이 따를 만한 일이었다면 당신을 기다렸을 거예요.”

여인이 천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있는 눈 속, 흔들리는 그의 시선은 모르는 채로.

그 행복한 목소리를 흐트러뜨리기 싫어서 그는 제 불안감은 드러내지 않으며 다시금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녀를 잃을 뻔했던 불안은 제법 오랫동안 그를 괴롭힐 듯했으나 이렇듯 서로의 피부를 맞대고 있는 동안엔 조금 흐려지는 듯도 했다.

편안한 얼굴로 더 이상 과거를 떠올리지 않는, 모든 것을 떨쳐 낸 듯한 여인은, 이전에도 아름다웠으나 지금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이 아름다움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지.’

“…….”

그의 울대가 조금 움직였다.

그 빛 속에서는 그녀와 함께였는데. 한 몸이었는데.

하나의 신수가 되어 세상을 뛰어다녔고 서로와 떨어질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었는데.

그 강렬한 일체감을 경험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마치 시험을 통과하듯 다시금 형체를 갖추게 된 그들은 서로와 분리되었고, 완벽했던 일체의 기억은 둘로 갈라진 통렬한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왜 그래요. 백가에 다녀오느라 힘들었어요?”

“……그랬나 봐.”

“고생했어요. 내가 안아 줄게요.”

그녀의 가는 팔에 안기며 그가 손을 한 번 휘둘렀다.

새하얀 결계가 정자를 감싼 호수 주변을 돌며 그들의 모습을 감춰 버렸다.

겹겹이 걸쳐진, 혼례복을 닮은 붉은 예복을 그가 성급히 벗겨 냈다.

“그러고 보니 왜 이 예복을 벗지 말라고 한 거예요?”

“…….”

“응? 왜요?”

“…….”

더 이상 조금도 더 기다릴 수 없는 혼례식을 먼저 재촉하러 간 사이.

그녀를 혹 보게 될지 모르는 이들이 혼례복을 닮은 이 예복을 보길 바랐다. 혼인했다 여기길 바랐고 그러면서 같은 예복을 입은 자신을 떠올리길 바랐다.

제 입으로 꺼내 놓기는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빛나는 달빛 뒤로 붉게 물든 그의 귓가를 먼저 발견한 탓일까.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의 목에 흰 팔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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