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2화 (222/254)

* * *

백석저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환기할 때가 아니면 닫아 두던 창들은 모두 활짝 열렸다.

언제 그리 가라앉고 어두웠냐는 듯 열린 창마다 웃음소리가 넘나들었다.

코끝을 찌르는 듯한 진한 피 냄새는 사라졌고, 죄인들이 고신을 견디지 못하고 지르는 비명 역시 자취를 감췄다.

백석저를 향해선 하례물들을 실은 수레의 행렬이 끊이지 않고 몰려들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던 누군가가 회의실 안, 자리로 와 앉았다.

회의실의 밝은 불빛 아래, 다섯이나 되는 그림자가 모여 있었으나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가끔 크흠 크흠, 목 고르는 소리만 들려왔을 뿐.

따뜻한 김을 모락모락 피워 내던 찻잔은 관심 주는 이가 없는 상태에서 차갑게 제 온도를 잃어 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다리를 떨기 시작하자 앉아 있던 이들 중 하나가 과장되게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응시했다.

“지금 혹시 다리를 떠시는 겁니까? 육문의 가주라는 분이 체통도 잊고?”

시선 속에 내비친 말을 정확히 읽어 낸 노가주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닐세. 잠깐 우리 백주천장강진 가모를 생각하니 다리가 저린 듯해서 그걸 좀 풀어내느라. 아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 무슨 상관인가? 내 다리를 가지고 내가 떨겠다는데!”

발끈한 표정의 의미를 읽어 낸 진가주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자기 체면이 깎이지 내 체면이 깎이나.”

서로를 비난하고 질책하는 시선들이 바쁘게 허공을 넘나들었다.

나직이 혀를 찬 누군가가 그 다툼에 참전했다.

“이 꼴을 우리 천주백강장진 소가주께서 보시고 육문의 단합이 이리 개판이었냐며 괜스레 나까지 한 무리로 엮고 상종하기 싫어할까 봐 겁나는구먼.”

“뭐야? 천가주! 지금 나와 해보자는 건가? 게다가 말을 바로 해야지! 장가가 왜 강가 뒤에 오는 건데!”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 이가 드잡이질이라도 할 듯 상대의 옷깃을 잡으려던 순간이었다.

다행히 더 큰 싸움이 일기 전 회의실 문을 조용히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노가주들이 숨을 들이켰다가, 문으로 내달렸다.

“어, 어서 들어오십……! 응?”

문을 두드린 시종은 득달같이 달려오는 가주들의 기세에 놀라 들어오다 말고 주춤거렸다.

“무슨 일이냐. 백가주는? 백가주가 보내셨느냐? 왜 직접 오시지 않고 네가 왔느냐?”

“시간이 아니 되신대? 잠깐 이곳에 들르는 것도 안 되시겠대?”

죄 없는 시종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게 저……. 백가주께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재상께서, 가주께서는 바쁘시다고. 지금 바로 주가로 가셔야 해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니 다섯 가주께서는 더는 시간을 헛되이 사용치 마시라고-.”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기다리라고 해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와 이러면 우리가 섭섭하지 않으냐! 게다가 우리도 아무 근거 없이 몰려와 이러는 게 아니다.”

“그래. 우리도 다 정보가 있단 말이다. 명윤 원로가 내일 주가로 떠난다며. 백가주는 거기에 동행하기로 했고. 그럼 오늘은 아직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냐.”

“맞다. 우리도 다 듣고 온 것인데 네가 지금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가주님들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해선 잘 모르겠고, 들은 대로 말씀드린 것만으로도 저는 성심을 다하였다는 것을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저택의 모두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관계로 저도 이만 손을 보태러 물러가 보겠습니다.”

아무래도 더 있어 봐야 닦달만 듣겠다 싶었는지, 잽싸게 제 할 말만 한 시종이 문을 닫았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가주들은 다시 회의실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아무리 그래도 우리한테까지 이리 서운하게 굴 필요가 뭐가 있지.”

천가주가 그리 말하자 진가주가 부드럽게 웃으며 달랬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공물을 가지고 찾아드는 중이 아닙니까. 괜히 하나둘 만나기 시작하면 전부 너나 할 것 없이 왜 저이는 되고 자신은 안 되냐며 만남을 요청할 것이 뻔한데, 이 부분은 저희가 이해하지요.”

“그건 자네 같은 남이나 그렇지. 나는 숙부네, 숙부!”

장가주가 코로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치면 환계 칠문 중 인척 아닌 관계가 몇이나 되는가. 명윤 원로 부처의 선대로 올라가면 장씨도 있고 강씨도 있고 진씨도 있고 여씨도 있을 게 분명한 것을.”

“뭐라고요?”

“내 핏줄에도 천씨 부인께서 계셨지. 그럼 내가 천가주보다 나이가 많으니 형님인가? 뭐 그것도 좋군. 앞으로 숙부니 뭐니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내게 먼저 형님이라 부르게.”

입에 게거품을 문 천가주가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그렇게 본데없는 족보를 들이미는 겁니까. 우리 위대한 천가에서 장가주같은 옹졸하고 야비하고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설파하는 무식쟁이는 태어난 적 없습니다.”

“아니 뭐야?!”

눈에 핏대가 선 장가주도 벌떡 일어났다.

그때 점잖은 목소리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한데 우리끼리 이럴 필요가 있겠는가.”

강가주였다.

여태 가만히 말을 아끼다 몸을 일으킨 그는 찻잔을 내려놓은 채 회의실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어딜 가는 건가.”

“이곳에 있는다고 우리 가모의 손끝이나 볼 수 있겠습니까. 주가로 가 보려 합니다.”

“주가?!”

“명윤 원로도 백가주도 주가로 가겠다고 하면 분명 육문의 가모께서 거기 먼저 가 계시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얼굴이라도 비추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차라리 한발 앞서서 가 보려고 합니다.”

“!!”

왜 우리가 그 생각을 미처 못했을까.

깨달음을 얻은 가주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래. 모두 가 봅시다. 주가로 가면 싫어도 만나게 되겠지.”

그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모은 이들이 일제히 회의실을 뛰쳐나갔을 때, 다시금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백만용은 여전히 잠 한숨 못 이루고 일을 하는 중이었다.

식사도 뜨는 둥 마는 둥. 시녀들이 두고 간 차마저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은 이전과 전혀 달랐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얼굴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바쁘게 손을 놀렸다.

가주와 가모님의 귀한 혼인식에 어찌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존재하게 할까.

‘내 모든 것을 걸고 환계 제일의 의식으로 만들어 보이겠다. 신영의 등극식에 뒤지지 않는! 명료하고도 완벽하게 우리 가모님의 위대함을 그 누구도 몰라볼 수 없는 완벽한 의식으로 만들어 보일 테다!’

가장 빠른 길일을 잡고 항목별 예산을 거침없이 편성하고 그에 따라 사용인의 인원을 대폭 늘린 백만용이 흐뭇하게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 누구 있느냐?! 상진이 너 거기 있느냐?!”

백만용의 목소리에 시종이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이걸 가주들께 전해 드리거라.”

“……가주들, 이요?”

“두 분의 혼례는 어디까지나 백가의 힘으로만 치러 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나머지 가주분들께서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겠지. 그토록 가모님께 다들 무언가를 해 드리고 싶어 난리였는데 혼인식에서마저 배제하면 분쟁이 생길 것이 분명하지 않으냐.”

백만용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니 다들 육문 수장 부처의 혼례식에 한 팔 거들 기회를 주어야지.”

백만용의 말에 시종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저. ……재상 어른. 한데 가주들께서는 이미 백석저를 나서셨습니다.”

“뭐야? 백가가 이리 바쁜 와중에 대체 어딜 가셨단 말이냐?”

“주가로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주가?”

“네, 신영의 측근 잔당들을 잡아 오겠다며 무사들까지 데려가신걸요.”

시종은 그렇게 고했으나 백만용의 표정은 단박에 일그러졌다.

조금 전까지 가주를 불러 달라.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

그날 빛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무지개의 형상을 한 거대한 영력의 강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어찌 그런 힘을 다루는 것인지.

그것을 물어본다며 시끄럽게 굴던 것이 일각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잔당을 잡으러 주가로 떠났다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백만용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상 어른. 어딜 가십니까? 혼례식 준비는요?”

“당연히 혼례식 준비를 바로 시작하여야지. 너는 그것을 영공 원로께 가져다드리고, 거기 적힌 대로 먼저 준비를 시작하시라 말씀드려라!”

“재상 어른께서는요?”

혼인식도 곧이고, 두 분의 금슬도 그리 좋으시니 곧 후계자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건만.

‘백가의 경사가 육문의 경사인 것을. 그런 가주와 가모님의 사이를 눈치도 없이 방해하려고 해?’

“난 주책 떨러 간 노친네들을 잡아 오겠다!”

얼굴을 구긴 백만용이 부리나케 저택 입구를 향해 달려나갔다.

* * *

그간 백석저가 그리 어두웠거나 말거나. 주가 영지 내에 파견된 백가 무사들의 기세는 최고조였다.

그들은 백가 재상의 명을 받아 주가 자윤 원로를 돕는 일들을 맡고 있었다.

신영의 측근 잔당을 추적하고 죄의 유무를 먼저 판단해 영지에 남길 것인지 육문의 판결대로 보낼지 결정하는 일이었다.

중심이 되는 것은 제유 원로를 포함해 가족을 몸 뺏기로 잃은 이들이었고 백가 무사들은 어디까지나 그들을 지원하는 역할이었다.

하여 그들의 역할은 그리 도드라지지는 않았으나.

“저, 잠깐 시간 있으십니까?”

주가 영지에 남아 있던 이들이 쭈뼛거리며 백가의 무사들에게 다가갔다.

기적이란 누구에게든 공평했기에, 강변까지 가지 않은 주가 사람들도 함박눈처럼 떨어진 빛 가루를 맞은 뒤 몸이 회복되고 땅과 자연이 살아나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러니 자연히 이 현상의 원인에 궁금증을 품게 될 수 밖에.

하지만 강변에 있던 이들 중 반은 판결대로 끌려갔고, 남은 주씨들은 신영의 측근들을 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서 백가 무사들에게 다가와 본 것인데, 백가 무사들은 이런 자긍심 넘치는 상황에서 뒤로 물러나는 이들이 아니었다.

“그래. 그때 당신들도 우리 가모님의 모습을 보았어야 했는데. 가모님이 얇고 긴 나뭇가지 하나로 그 흑룡을 제압하시는데 그 장면이 정말.”

“한데 정말 적룡이셨습니까? 적룡은 아주 오래전에 모두 사라졌던 것이 아니고요?”

“환계 전역에 떨어진 그 무서운 검은 사기들을 진정시키신 것도 모자라 교룡의 결계로 생기를 빼앗겼던 이 땅에 이토록 풍성하게 생명이 만개하게 하셨는데. 적룡이 아니셔도 그 위업을 칭송해야 할 판에 아직도 믿지를 못하다니.”

답답했지만 백가 무사들은 이들을 탓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들 역시 출진 전까지만 해도 가모라 불리는 젊은 아가씨를 조금도 믿지 않았었으니까.

하지만 허황되다 느껴졌던 소문들이 모두 사실인 것을.

아니, 사실보다 축소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 이상 다른 이들 역시 그들과 같은 전철을 밟으며 가모님께 실수하거나 심기를 상하시게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 강변에서 가모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실 각오로…….”

그때였다.

끼이익.

그들이 서 있던 큰길 앞, 어떤 저택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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