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1화 (221/254)

어디 백석저뿐만일까.

영지 전부가 무지개에서 흐르는 찬란한 빛으로 둘러싸였다.

누군가 그런 하늘을 두리번거리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이…… 이게 대체.”

불가해한 맑은 울림 역시 끊기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디링. 딩. 디링.

이해할 수 없는 울림. 있을 수 없는 현상들.

쏴아아.

백석저 위로 고이던 무지개가 이윽고 포말처럼 부드러운 안개를 흩뿌리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눈이 일제히 그 상서로운 빛을 응시했다.

그것은 판결대 위의 죄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제대로 눈을 깜빡이지도 못하는 백만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절박한 그의 시선이 무섭도록 집중한 채 땅 위로 가득 쏟아진 무지개의 끝자락에 내리꽂혔다.

긴장감에 숨조차 쉴 수가 없어, 손끝이 터질 듯 창틀을 부여잡았다.

“…….”

그리고 마침내 신비한 무지개가 잔상만을 남긴 채 흐려졌을 때, 백가 재상은 창문에서 그대로 고꾸라질 뻔했다.

“가, 가주!”

그곳에 거대한 몸체를 가진 백호 신수가 나타난 것이다.

계단을 오르내릴 시간도 정신도 없었다.

그토록 부르짖던 체통도 집어던진 백만용이 백호에게 다가가기 위해 창문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이, 이럴 리 없어.”

판결대의 죄인이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백호를 응시했다.

“분명 혼백이 찢겨, 이 세상에서 사, 사라진다고…….”

백만용의 시선이 희번덕 돌아갔다.

저놈이 더러운 세 치 혀를 또 놀리다니.

하지만 미처 재상이 죄인에게 몸을 돌리기도 전에 백호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백호가 걷는 걸음마다 아무도 다가가지 못할 숨 막히는 위압감이 몰아쳤다.

거대한 몸에 넘쳐흐르는 영력의 파동은 그가 자신이 밟고 선 대지의 지배자라는 사실을 여실히 나타냈다.

이윽고 죄인의 앞에 도달한 백호는 마치 감히 누구의 혼백을 이야기하는 거냐는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커…… 컥.”

시선에 담긴 위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숨을 헐떡이던 주가 혈족이 결국 눈을 까뒤집으며 정신을 잃었다.

짐승의 성의 없는 시선이 쓰러진 죄인에게로 잠시간 향했으나 그뿐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여전히 저를 숨도 쉬지 못하고 바라보는 이를 발견하고는 몸을 변화시켰다.

보드라운 털이 가득한 거대한 발이 점차 작아졌다.

그것은 이내 단단하고 마디가 굵은 사내의 손으로 바뀌었다.

흰 예복이 진한 꽃향기와 함께 펄럭였고, 그에 감싸인 유려한 선의 미남자가 눈을 휘었다.

다정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만용아.”

그 부름에 백만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녀왔다.”

“…….”

이내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죄인들 앞에서 보였던 냉막함은 어디 갔는지, 그는 그저 바보같이 네, 네, 고개를 계속 주억였다.

“무탈히…… 무탈히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많이 기다렸지?”

목 끝까지 차올랐던 불안감이 일시에 사라지며 아이처럼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뇨. 아주 조금. 아주 조금 기다렸습니다.”

백기하가 백만용에게 다가왔다.

어깨에 닿는 따뜻한 손길에 백만용의 눈에서 눈물이 더욱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소리를 죽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체면조차 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소리를 냈다.

“왜 이리 우느냐. 그간 많이 힘들었느냐.”

“가, 가주.”

“그래도 한 가문의 재상이란 자가 바깥에서 이리 눈물을 보이면 어떡하느냐. 얼른 그치거라.”

“가, 가주. 가주.”

바라마지 않던 그 타박조차 기꺼워 백만용이 울면서도 웃을 때였다.

백기하가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로 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미장 어른께서 내일 주가로 가신다며?”

“예?”

백만용이 울다 말고 눈을 껌뻑였다.

‘지금 막 돌아오신 분께서 그런 정보는 대체 어떻게?’

“그럼 시간이 하루도 채 남지 않은 것이 아니더냐. 어서 울음을 그치고 외모를 정돈하거라. 너, 무릎 좀 같이 꿇어 줘야겠다.”

“예?”

백만용이 다시 한번 눈을 껌뻑였다.

“무릎, 이요?”

무릎을 누구에게.

그나저나 왜 갑자기 무릎?

왜죠?

“가주. 한데 가모님께서는…….”

“만용아.”

“예.”

“네 가모께서 가모가 되실지 말지는 네 이 듬직한 두 무릎과 소중한 너의 입에 달렸다. 나와 함께해 주겠느냐.”

“…….”

도무지 이것이 무슨 대화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가주께서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뭐든 할 수 있을 텐데. 뭐든 바칠 터인데. 매일 밤 그리 되뇌지 않았던가.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명만 하십시오. 이 백만용이 목숨을 걸고-.”

“목숨은 필요 없고 무릎과 입만 걸어라. 일단 일어나거라. 최대한 빠르게 허락받고 준비를 마치려면 시간이 없다.”

“…….”

도무지 무슨 상황이라시는 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가주가 시키시는 일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자신은 당장 수행할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얼굴엔 온통 눈물범벅을 해 놓고 백만용이 비장한 표정으로 제 가슴을 두드렸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 * *

그리하여 영문도 모르면서 결연한 백만용이 너른 방 한중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옆에는 상기된 표정의 백기하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앞에는 천수아, 주명윤 부처가 앉아 있었고 멀찍이 벽 근처에는 세 자매가 서 있었다.

붉어진 눈으로 백기하를 맞이했던 주명윤은 지금 백만용의 머릿속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상태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백가주, 그러니까…… 지금 제 딸아이랑 굳이 이 시기에 혼인을 하셔야겠다는 그런.”

“장인어른.”

백기하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매를 구겼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된 저의 까맣게 타들어 간 속과 애끓는 마음을 꼭 알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이 상황은 결코 제 본의가 아니고 이 청 또한 결코 제 본의가 아니라는 것을!”

오장육부를 끊어 내는 듯한 절절 끓는 침통함이 떨리는 목소리 안에 선명했다.

하지만 주명윤은 여전히 눈을 깜빡였다.

붉은 입술 사이로 뜨겁게 토로하는 말의 내용이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세 자매도 마찬가지였다.

천수아만이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마셨다.

주명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이제 와 반대를 하려는 건 결코 아닙니다. 백 가주께서 제 딸아이를 향해 보여 주신 마음도 있고.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좀 그렇지 않습니까.”

평화로운 시기에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혼인식을 치러 줘도 모자랄 딸아이에게 굳이 지금, 이렇게 갑자기?

매일매일 판결대에선 죄인이 비명을 질러 대고 피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데다가 신영과 몇몇 잔당은 아직 행방조차 알지 못하는 이런 시기에?

‘그래도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일단 세화가 살아 있긴 하다는 말이겠지.’

그 생각만으로도 안도감에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영문 모를 소리만 반복하는 남자가 아직 제 앞에 남아 있어 애써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런데 둘이 사라져서 홀로 돌아왔으면, 나머지 하나가 어떻게 되었는지부터 설명을 해 주셔야지. 상황 설명도 없이 당장 혼인식을 치르겠다는 말이나 하고 있나? 그럼 뭐, 허락하지 않으면 딸아이는 영영 못 볼 거란 소리인가 뭔가.’

그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 못마땅함이 시선에 배어났다.

그때 백만용은 발견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를 향해 필사적으로 눈을 찡긋거리고 있는 가주의 모습을.

백가 재상이 대뜸 고개를 숙였다.

“명윤 원로 어른. 저도 이리 함께 청을 드립니다. 상황이 다소 어수선하긴 하지만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존재의 소멸이다, 죽음이다, 말이 많던 그 사지를 가모님과 가주께서 힘을 합쳐 어렵게 뚫고 돌아오신 지극히 감동적이고도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위험을 헤치고 힘겹게 돌아오신 두 분이 마음껏 함께하실 수 있도록 두 분을 기다리는 동안 빠르게 혼례식을 준비해 두었어야 했는데, 이 모든 것이 그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 제 탓입니다.”

“백 재상.”

“아마도 가주께선 이 말씀을 드리고자 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지러웠던 환계의 질서도 지금은 많이 바로잡혔고, 주가의 일도 죄의 소재를 분명히 하며 주가 원로들을 판결하고 있는 실정이 아니겠습니까. 몰랐다고는 하나 신영을 따랐던 이들 중 과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만약 흠 없이 깨끗한 이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정통성 면에서나 영력의 크기 면에서나, 인품이나 지혜나 위엄이나 저희 가모님보다 나은 이는 있을 수 없는 데다가, 가모님께서는 신영의 상징이라는 적룡의 영단까지 이미 흡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그분 외에 신영의 위에 오르실 수 있는 분이 누가 계시겠습니까.”

백만용이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두 분의 행방이 묘연하실 때만 해도 몇몇 발칙한 이들이 헛꿈을 꾸었을지 모르지만, 가주와 가모님께서 이리 무사히 돌아오신 이상 신영의 위가 우리 가모님의 발밑에 바쳐져야 함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우리 가주께서 아시고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저 백만용이 가장 강력히 인지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과 혼인식이 대체 무슨 상관인지?”

“그리하여 가모께서 신영의 위에 앉으시는 것이 기정사실로 굳어진 지금, 아무리 주가가 저질러 온 수많은 악행들이 드러나며 육문이 그들을 심판하고 있는 상황이라고는 하나 신영의 위는 아직 주가의 가주를 뜻함이 아니겠습니까. 죄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다른 가문의 혈족들이 함부로 참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도움을 드리기는 더더욱 힘든 일이니, 저희 가주께서는 이런 때일수록 한시라도 빨리 혼인식을 올려 어지러운 환계를 평화롭게 하신다는 무거운 책임을 어깨에 얹으실 가모님을 조금이나마 돕고자 하는, 따뜻하고 숭고한 인도주의적인 마음에서 명윤 원로께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물론 이런 사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히 말씀드릴 수도 있겠으나 가모님께서 가주와 동행하지 않으신 데는 분명 이유가 있으실 테고, 이 순간에도 뭔가를 하고 계실 그분의 곁으로 한시라도 빨리 이동하시기 위해 급한 마음에 무릎부터 꿇게 된 것이 아니신가. 하지만 명윤 원로께서도 한 가문의 가주의 무릎이 가지는 무게를 아시고 계실 테니 결코 이를 경망스럽다 오해하시면 안 될-.”

진저리를 치는 명윤 원로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백기하의 시선이 반짝였다.

저 영특한 것, 장한 것.

저것이 백가 재상이지.

저 예쁜 것!

저래서 우리 만용이가 백가 재상이지!

“아,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 이해했으니 재상께선 그만하시지요.”

고개를 끄덕여 간신히 백만용의 입을 막은 주명윤이 백기하를 보며 물었다.

“한데 그래서 대체 세화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백기하가 이번엔 헛소리를 보태지 않고 대답했다.

세화를 떠올리는 그의 시선이 따뜻하게 휘어졌다.

“먼저 주가의 영지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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