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0화 (220/254)

죄인들의 말로는 가주께선 세상을 뒤엎은 사기를 정화하시고 소멸하셨다던가.

강변의 전투에 참전했던 이들에게서 그들도 마지막 싸움의 편린들을 엿들을 수 있었다.

가모님께서는 적룡의 신수셨고, 주가의 교룡조차 가모님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고.

교룡의 시체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저주와 살기들이 온 강변을 썩게 만들고 환계를 멸망시키려 하였으나 가모와 가주께서 그것을 정화하셨다고.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찬사에 찬사를 더해 가며 그런 말을 한다 한들, 확실한 것은 모두가 귀환한 지금도 가주와 가모께서는 돌아오시지 않았다는 사실뿐.

무슨 힘을 얼마나 숭고하게 사용하셨든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장 중요한 두 분께서 돌아오지 못하셨는데.

“……돌아오시겠지?”

“그런 당연한 말을 왜 하니?! 저 죄인들이 퍼뜨리는 쓸데없는 말들은 조금도 귀에 담지 마.”

“그래.”

매섭게 대답은 하였으나 물은 시녀도 대답한 시녀도 표정이 어둡긴 매한가지였다.

“……가자. 재상께서 그래도 조금은 식사를 하셔야 하니까, 점심은 더 맛있는 것으로 준비해 보자고.”

음식이 그득 담긴 수레를 밀며 낯빛을 굳힌 그들이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 * *

창이 큰 백가 재상의 집무실은 백석저 내부에서 가장 소란스러운 곳이었다.

그는 판결대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는 방을 제 새 집무실로 정해놓고 모든 짐을 옮겨왔다.

“아아악!”

다른 일을 처리하는 중에도 판결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열린 창 너머에선 고신(拷訊)의 피 냄새가 몰려들었고 귀를 찢는 비명이 연신 이어졌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너른 방의 안쪽,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은 사내는 그저 제 할 일에 몰두했다.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백만용의 붉어진 눈 안쪽에는 실핏줄이 가득했다.

희로애락이 선명하던 얼굴에서도 일체의 감정이 사라져 있었다.

푸른 안광이 서슬 퍼런 얼굴로 서류를 검토하는 재상의 속눈썹 아래로 흘러나왔다.

그때 비명을 가르며, 나직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를 가져오는 것 외에는 시녀의 접근조차 막아 두었기에 저런 식으로 이곳에 찾아올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들어오십시오.”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며 장가주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 새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나 보군요.”

장가주의 표정만 보고서도 전해 들어야 하는 이야기의 내용을 짐작한 백만용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하지만 붓을 잡은 손끝이 조금 떨렸다.

혹여 도움이 필요하시기라도 할까봐, 그래서 빨리 돌아오지 못하고 계신 걸까봐. 그는 환계 전역으로 새를 날려 보내 제 가주와 가모를 찾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게 세상 다시 없을 쓸데없는 짓이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신수였는데, 저같은 게 그런 분들께 무슨 도움을 드리겠는가.

하지만 꼭 돌아오실 것이라는 믿음도 한 달 보름이 넘어가는 동안 백만용의 마음속에선 벌써 거의 다 닳아 사라지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수단은 다 동원하여 환계를 뒤져 보지 않고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기다리던 소식이야 곧 받지 않겠는가. 그것보다 자네야말로 식사는 하고 있는가.”

장가주가 그런 백만용의 옆으로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

노인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푸른 치유의 빛이 백만용을 휘감고 빛나다 천천히 흐려졌다.

“감사합니다만 제게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명윤 원로께서 주가로 가시게 되었으니 혹 괜찮으시다면 그분에게 영력을 사용해 주십시오. 지난 한 달간 원로 부처께서도 걱정이 많으셨을 테니까요.”

“그래도 그쪽은 자네보다 사람 꼴을 하고 있네. 자네 역시도 지금은 육문의 수장 대행이 아닌가. 몸을 돌보는 것 또한 자네의 집무 중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말게나.”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저는 가주께서 돌아오시기 전엔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명윤 원로는 신영의 저택에 화마를 일으킨 범인을 찾으러 가는 것인가?”

“예. 온갖 영기를 끌어내 사용한 것을 보면 분명 직책이 낮지 않은 이였을 텐데, 달아난 신영의 측근들을 모두 색출해 내고 있는 지금까지 꼬리조차 잡지 못했다니요. 분명 누군가 숨겨 주고 있는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

“부리던 이들을 싹 다 산채로 화장시켰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대체 무슨 비밀을 감추려고 한 것인지, 남은 비밀은 또 얼마가 있는지 그를 반드시 찾아 샅샅이 캐물어 볼 생각입니다.”

장가주의 주름진 눈매 사이로 호수처럼 깊은 시름이 스며들었다.

이 어린 재상을 자신 역시 얼마나 오랫동안 보아 왔던가.

그는 마치 소년이 단번에 어른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크고 단단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처분을 내릴 때마다 백만용의 피로한 눈 끝엔 잔인한 살기가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일전에도 백가주는 이 사내에게 뒤를 부탁하고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으나 그때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돌아오겠다 하였다고. 그러니 자신은 믿고 기다릴 것이라고.

장부인이 그렇게 말했을 때만 해도 분위기가 좋아지는 듯하였으나 벌써 한 달이 아닌가.

정말 돌아올 것이라면 이렇듯 흔적 한 자락 없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불안이 모두의 머릿속에 깃들어 있었다.

이 상황에서 장가주라고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을까.

그가 그저 소식이 닿는 대로 알릴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말라는 말이나 의미 없이 덧붙이고 나서려 때였다.

바깥에서 들려오던 비명이 비릿한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하하. 너희는 언제까지 갈 것 같으냐! 백가주도 죽고 없는 마당에 너희가 언제까지 이리 잘난 척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판결대에 세워진 죄인이 소리치듯 웃고 있었다.

“교룡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이냐. 주가의 피를 타고났음에도 주가를 배신한 그 원로의 여식도! 너희 가주도! 산산이 부서져 소멸한 것 아니겠느냐?! 그것이 아니라면 왜 너희 가주가 아직 나타나지 않겠어!”

백만용의 눈빛이 얼음처럼 냉랭하게 굳어졌다.

“당장 혀를 여든 가닥으로 잘라내지 않고 저리 떠들게 놔두다니. 무사가 제 일을 못 하는군요.”

“재상.”

조용히 일어선 백만용이 벽에서 활과 화살을 꺼내 들고 열린 창으로 다가갔다.

판결대에 올려져 있던 죄인이 창가에 나타난 그를 다른 이들보다 한발 먼저 발견했다.

“우리의 죄를 추궁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이 변변찮은 무사들을 죄 데리고 너희 가주의 흔적이나 쫓거라! 그래야 부서져 가는 혼백 한 조각이나마 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발작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주가 혈족의 눈이 번뜩 빛났다.

“산산이 부서져 소멸하였고, 그렇기에 결코, 찾지, 못할.”

자신은 어차피 어떻게 무얼 변명하든 죄를 덜지 못할 몸이 아닌가.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백가 재상 놈은 제 몸을 갈가리 찢어 놓을 테니까.

그렇다면.

“그 부서진 혼백의 흔적 말이다!”

“저, 저놈이!”

저주와도 같은 말에 참지 못한 장가주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방을 뛰쳐나갔다.

당장 판결대로 가서 저놈을 때려죽일 것이다 소리치면서.

하지만 누구보다도 분노해야 할 백만용은 가져온 활조차 들어 올리지 못하고 조용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화를 내거나 고함을 내지르지도 않고 아주 조용히 죄인을 그저 응시했다.

“신수가 사라진 육문이 언제까지 육문일 수 있을 것 같더냐! 때가 되면 너희 역시 모두 분열하여 주가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하하!”

백만용의 핏발 선 눈 뒤로, 살기로 가리고 있던 절망이 새어 나왔다.

악다문 입안으로 진한 핏물이 고여 들었다.

백만용은 기다리는 것은 잘할 수 있었다.

십 년이 넘는 전쟁 동안에도 그는 가주를 기다리며 모든 일을 처리해 왔다.

돌아오실 수 있다면.

살아 계시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살아서 돌아올 수만 있다면.

그 보증만 있다면 백 년, 이백 년을 못 기다릴까.

하지만 답을 확인할 수 없는 문제가 백만용을 빠르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저 죄인이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백가 전체가 눈치채는 중이겠지.

이래서야 어찌 가주의 뒤를 맡은 자라고 할 수 있을까.

저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다고.

이런 때일수록 그분께서 맡기신 일을 더욱 확실히 처리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그렇다고 해도.”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을 간신히 억누른 그가 천천히 활을 들어 올렸다.

“너 따위의 더러운 혀에 그분을 함부로 오르내리게 두지 않겠다.”

예기를 빛내는 화살을 시위에 걸고 죄인을 겨눴다.

하지만 자신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 아니던가. 제가 곧 저 화살에 꿰뚫릴 거라는 사실보다도 백만용이 보인 절망이 더 기꺼웠던 죄인이 힉, 힉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였다.

딩.

그들 모두의 귓가로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디링.

“?!”

뭐지?

나직한 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듯도 했고, 그저 대기가 진동하며 나는 것도 같았다.

낙숫물이 돌을 두들길 때 나는 소리와도 같았으나 그 어떤 소리와도 닮지 않은 듯 들리기도 했다.

“……!!!!”

백만용이 달려들 듯 창문 밖으로 몸을 뺐다.

흔들리는 그의 시선이 정신없이 주위를 훑었다.

‘……설마.’

딩.

‘설마!’

하나로도 모자라 백만용은 집무실의 모든 창을 날 듯이 달려가 모두 열어젖혔다.

하늘과 땅과 사방을, 흔들리는 시선으로 모두 훑어 냈다.

그 순간이었다.

피 냄새가 흐르고 불안한 공기가 가득한 백석저를 향해, 높은 하늘에 걸쳐 긴 무지개가 연결되었다.

비가 오지 않은 맑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건만.

거대하고 선명한 무지개는 백석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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