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게 가라앉아 가던 천령의 의식이 번뜩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제게 답을 해 주는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한 이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세화 님? 쿨럭! ……세화, 세화 님이십니까?”
“그래.”
아아.
그의 눈가가 뜨끈하게 젖어 드는 듯했다.
이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믿어도 된다.
“그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살아 있습니까? 달아, 났습니까?”
“…….”
“세화 님.”
“이미 죽어 있더구나. 네 검에 죽은 거겠지.”
“!”
천령이 믿을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정, 정말입니까? 정말 그, 놈이 죽은 것입니까?”
“그래.”
아아.
피부가 녹아 두려울 정도로 흉하게 변한 천령의 얼굴이 세차게 일그러졌다.
“세, 세화 님.”
“말하거라.”
“주, 인의 몸을 당신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옛정을 잊지 않으신다면 부디 그분의 몸을…….”
“그래. 내가 수습할 것이다.”
“……감, 사합니다.”
고통에도 젖어 들지 않던 눈가로 뜨끈하게 무언가가 차오르는 듯했다. 결국 조금 흘러내렸다.
천령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야 주인을 만나러 갈 면목이 생겼다.
이제야.
혼자 얼마나 외로워하고 계실까. 더 일찍 함께해 드렸어야 했거늘.
“소가주님.”
내 주인.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하였습니다.
비참하게 죽어 간 그의 복수까지 끝마쳤으니 이제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삶에 미련이 없던 그의 몸 역시 지금 죽어 가고 있었으나, 그 잠시간의 시간도 몹시 아깝게 느껴졌다.
천령이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제 혀를 씹었다.
울면서 웃은 그가 긴장한 몸에서 힘을 풀었다.
급격히 생기가 사라져 가는 그의 눈앞으로, 주가의 저택을 밝히는 수많은 횃불이 놓여 있는 듯했다.
저택의 긴 복도 너머로 익숙한 누군가의 얼굴을 본 것 같다고 느끼자마자, 말발굽이 거침없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거세게 귀를 울렸다.
어느새 그의 앞에는 익숙한 등이 있었다. 죽어 가는 어린 자신을 살려 아무것도 아닌 그에게 성씨를 주고 제 호위로 삼아 준 익숙한 등이.
천령이 그 등을 따라 달렸다. 그 어떤 것도 거리낄 것 없다는 것처럼 한번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 * *
그는 마치 누군가를 마중하듯, 눈조차 감지 않은 채 웃으며 생을 잃어버렸다.
그 모습을 세화가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눈처럼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뻗어 천령의 두 눈을 감겨 주었다.
“제 주인을 만나러 갔나 보군.”
단단한 팔과 커다란 손이 세화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가 가볍게 힘을 빼며 그 팔에 몸을 기댔다.
“제 아비만큼 사악한 자는 아니었어요. 동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주경현의 마지막이 참 비참하긴 했네요.”
“그대는 이미 그를 도왔잖아. 더 이상 신경 쓸 것 없어.”
그녀의 시선이 그 말에 조금 더 깊게 가라앉았다.
그것을 어찌 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제 계획을 위해 그를 이용했던 것을.
“세화야. 언제가 되었든 내 신부는 반드시 너다. 난 너와 혼인할 거야.”
그가 그리 반복하며 속삭이던 시절엔 그녀에게 좋은 일도 참 많았다.
늘 바쁘셨던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의 빈자리를 그때는 그가 채워 주었었다.
마치 사랑이라 느껴질 만큼.
더 없이 그가 소중해질 만큼.
“세화야.”
과거에서 돌아온 첫날, 그녀를 부르며 다가오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린 듯했다.
“세화.”
그 목소리의 흔적을 다른 목소리가 덮었다.
지금의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목소리가.
그녀가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단단한 목 가까이에 제 머리를 기대며 흰 눈처럼 시원한 그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새로운 성수의 일부로 녹아들었어야 할 그녀를 살려낸 것은 또다시 이 남자였다.
세화가 완전히 새로운 신수가 되어 하늘을 노닐었던 그 날의 기억을 상기했다.
그때 그녀는 그와 함께 있었다.
죽음도 불사하고 소멸까지 각오하며 만들어 낸, 하나의 신수 안에 든 두 개의 영혼.
하나가 힘을 사용할 동안, 하나가 반탄력을 막아 내는.
그것이 그녀의 자아가 사라지지 않게 하는 열쇠였다.
하지만 그들은 꽤 위험할 뻔했다.
어째서인지 처음엔 역린과 함께 그의 어깨에 넣어 둔, 그녀의 불사를 건 두 번째 소원이 발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를 떠올려 보다가 그가 그 빛 속에서 꿈처럼 해 줬던 말들을 기억해 냈다.
“소원을 빌었어.”
“소원이요?”
“응.”
“무슨 소원이요?”
“그대가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하기를, 하고.”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조차.
자신은 제외한 채 온전히 그녀의 행복만을 빌었던 것이다.
그렇게 저 말로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두 번째 소원까지 그녀에게 넘기면서.
하여 생을 포기하고 있던 그녀가 두 번째 소원을 입 밖으로 꺼내놓기 전까지 소원은 발동하지 않았다.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그를 살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생을 다시 부르짖지 않았다면 그대로 둘이 함께 소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왜 그래. 저놈의 마지막이 마음에 많이 걸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럼?”
그녀가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깊은 물과 같은 투명한 푸른 눈이 그녀를 염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끝의 끝까지 그녀만을 걱정했던 이 남자 덕분에 지금 그들이 함께 있었다.
이곳에 있다.
살아 있다.
그 단어들이 주는 커다란 마음이, 가슴 안에서 메아리치며 점점 더 확산해 가는 것만 같았다.
덧없이 스러지는 목숨을 보고 난 뒤라서일까.
호시탐탐 밖으로 뱉어질 기회만 노리고 있는 그것을 도저히 이길 수 없어서 그녀가 물었다.
“내가 오늘 말했었나요?”
“뭐를?”
“사랑한다고요.”
“…….”
“사랑해요.”
귓가를 붉힌 더없이 수려한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말 안 했어.”
자세히 보니 눈가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붉은색이었다.
“하루마다 말하기로 한 거야? 그럼 오늘 건 아직 못 들었으니까 다시 말해 봐.”
조금 전에 두 번이나 말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의 단단한 몸을 끌어안은 채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내가 더.”
그녀의 가느다란 등을 끌어안은 그가 마치 그리 토로하지 않으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대답했다.
“내가 더 사랑해. 그대를 그렇게 사랑해.”
다른 이에겐 싸늘하고 냉랭한 목소리가, 그녀에게만은 부드럽지 않은 날이 없었다.
증오만이 과거를 지워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는 걸 이 남자가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알려 준 방향을 향해, 긴 길을 함께 걸어 나가겠지.
그의 단단한 가슴 안쪽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싶어서.
빨라지는 호흡 사이로 흐트러질 체향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저 그를 안고 싶어서.
그녀도 그를 더욱 힘주어 끌어안았다.
자신을 감싸는 온기가 언제까지고 제게 머물러 있기를 바라면서.
* * *
긴 밤을 갈라 내는 새벽하늘이 어김없이 새털처럼 보드랍게 찾아들었다.
하지만 새하얀 백가의 저택을 감싼 공기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이르게 시작된 백석저의 아침은 고요했다.
시간을 알리는 종도,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도 없었지만 많은 사용인들은 조용히 일어나 제 할 일을 시작했다.
쓸데없는 말은 일절 없었을뿐더러 오가는 이들은 행동조차 부산해 보이지 않도록 조심에 조심을 더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같이 신영의 측근 잔당들이 잡혀 와 판결대에 세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명과 욕설이 난무하는 시간이 이어진 끝에 밝혀지기 시작한 신영의 만행은 모두를 놀라고 소름 돋게 하기 충분했다.
“……어때? 재상께서 오늘 조금이라도 식사를 하셨니?”
백만용을 모시는 시녀가 방에서 가지고 나온 쟁반을 한 눈으로 살폈다.
누군가 건드린 흔적 없이 차갑게 식어 버린 음식을 본 시녀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도대체 이게 며칠째인지.
“또 손도 대지 않으셨어.”
“큰일이다. 잠을 제대로 주무시질 못하니 식사라도 잘 챙기셔야 할 텐데.”
“……가주께서 어서 돌아오시면 좋을 텐데.”
아악. 아아악!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날도 채 밝지 않은 바깥 어딘가에서 또 비명이 올렸다.
두 시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환기를 위해 잠시 연 큰 창 너머로 금세 피 냄새가 몰려들었다.
“…….”
시녀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판결대가 처음 세워졌을 때만 해도 이리 상황이 험악하진 않았다.
하지만 죄인들의 백가를 향한 저주가 이어질수록.
가주의 부재가 한 달 하고도 보름이 넘게 이어질수록, 판결대를 적시는 붉은 피의 흔적도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