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8화 (218/254)

“이잇.”

그 찰나, 신영이 제 세 번째 손가락 위 반지를 손톱으로 긁으며 손목을 휘둘렀다.

촤아악!

반지에 들어 있던 독이 퍼지며 삽시간에 뿌연 연무가 그들을 뒤덮었다.

“!!”

천령이 황급히 뒤로 물러났으나 이미 얼굴 주변으로 거미줄처럼 핏줄이 도드라졌다.

눈과 코가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이런 바보 같은. 다 잡았다고 이렇게 바보 같은 실수를 하다니!

그 꼴을 본 신영이 안광이 형형한 눈을 희번덕거리며 서둘러 품을 뒤졌다.

‘이 버러지 같은 놈이…….’

독분의 영향으로 안구가 녹아내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통이 극심할 텐데도 천령은 숨조차 참아 가며 검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그런 꼴이 되고도 소리로나마 내 위치를 찾아보겠다 이거냐?’

“너 같은 것도 신영이라고.”

천령이 고통 속에서 부들부들 턱을 떨며 소리쳤다.

“역대 그 어떤 신영도 영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몸을 지키거나 위엄을 세운 적 없거늘. 이딴 비겁한 수를 쓰면서도 네가 신영이라 할 것이냐?!”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린 천령이 핏발선 눈을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완벽하게 독분을 뒤집어쓴 눈은 아무것도 비추질 못했다.

“네게 조금이나마 자존심이 남아 있다면 여기서 날 죽여 봐! 그렇지 않으면 내가 세상 끝까지라도 널 뒤쫓을 테니!”

“…….”

“설마 눈을 다친 내가 무서워 꼬릴 만 개처럼 달아난 것이냐?! 내 맹세컨대 여기서 날 죽이지 않는다면 네 후일도 편안하지 못할 것이다!”

천령이 무어라 소리치든 말든, 신영은 제게 남은 영력 모두를 소리를 죽이는 데 사용하며 움직였다.

더없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품 안에 들어 있던 신호탄을 모두 꺼내 들었다.

안가에 준비된 영기를 다 소진하게 되자 비루하나마 혹 도움이 될까 하여 챙겨 온 것이었다.

‘멍청한 새끼. 백날 그리 떠들어보라지. 그딴 말이야말로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말이다.’

가까스로 살기를 감춘 그가 천령을 노려보았다.

‘네놈을 죽이고 가라고? 그거야 당연한 거고.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서 네놈의 피와 살 한 자락까지도 모두 내가 흡수할 것이다!’

신영이 가져온 신호탄 전부를 한데 모아 손에 잡았다.

단번에 신호탄의 끈을 당겼다.

모든 영력을 동원해 소리를 막아 놓았던 터라, 강렬한 불꽃이 작은 신호탄의 끝에서 맹렬하게 번뜩였는데도 주위는 고요할 뿐이었다.

하지만 열기마저 감출 수는 없었다.

그 찰나의 불꽃으로 위치를 감지한 천령이 맨몸으로 불꽃에 달려들었다.

“!”

치이익-

피부를 순식간에 녹여 버리는 열기 앞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정면으로 뚫고 들어온 천령이 단번에 신영의 배에 검을 박았다.

“……커억!”

신영의 입가로 새빨간 선혈이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그 붉은 피가 풀이 무성한 바닥에 내던졌던 금이 간 영기에까지 튀었다.

쓸모를 다해 가던 영기의 위로 한 겹의 빛이 떠오르며 영기에 담겨 있던 힘이 전력으로 적을 공격했다.

콰앙!

마지막 힘을 다한 영기가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리는 것과 동시에 천령이 거세게 뒤로 튕겨져 나갔다.

완벽히 일그러진 피부 사이로, 새빨간 입술이 힘없이 벌어지는 듯했다.

흩어진 내장 조각이 섞인 검은 피가 죽죽 곡선을 그리며 그 사이로 흘러내렸다.

“……허억. 허억.”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땅을 짚은 천령이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목표를 찾기 위해 애를 썼다.

아스라하게나마 감지되던 신영의 기척이 지금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건가?

아니. 시체를 확인해야 한다.

천령이 바닥을 더듬거리며 신영을 찾기 시작했다.

‘저 지독한 놈이……,’

다섯 대의 신호탄을 맞고, 영기의 반탄 공격까지 맨몸으로 받아 내고도 저리 움직인단 말인가.

여전히 저를 찾으려고 눈을 희번덕거리는 천령을 보며 새하얗게 질린 신영이 입을 막았다.

“죽은 건가? 신영!! ……쿨럭!”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으나 신영은 감히 신음조차 흘리지 못했다.

‘영, 영력이고 뭐고 일단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

가까스로 겉옷을 벗어 내장이 튀어나오려 하는 복부를 꽁꽁 동여맨 그가 조심조심 천령에게서 멀어졌다.

“달아날 셈이냐?! 이 꼴이 된 나를 두고도 꽁무니를 빼겠다, 이 말이냐?!”

그때 뭔가를 느낀 것인지 천령이 세차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너 같은 빌어먹을 것이 마치 용인 척 신영의 자리에 앉아 있었으니 주가가 이 꼴이 된 것이다! 하늘도 네 교활함을 알 것이다! 너는 환계 그 무엇보다도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달아나는 신영의 등 뒤로, 핏물이 터진 눈을 섬뜩하게 부라리는 천령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네가 벌였던 그 많은 사악한 짓거리들의 대가는 고스란히 네게 쏟아질 것이다! 알겠느냐!”

‘저, 저 버러지 같은 놈이! 지금 누가 누구한테.’

가까스로 비틀비틀 달아나면서도 신영이 울분이 터지는 속을 다스리지 못해 이를 악물었다.

난 신영이다.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신영의 자리에 머무르며 환계를 지켜 왔는지. 네까짓 것은 그 고충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히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고 좋았는지 아느냐?!

내가 좋아서 아들을 희생시켰겠느냐!

그 오랜 고통의 시간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런 놈이 감히 나를 죽이겠다고?!

“신영!! 날 죽이지 않고 가면 후회할 것이다! 넌 꼭 후회하게 될 거야!”

얼마나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있던지, 이리 멀리 왔음에도 아직까지 저 빌어먹을 저주가 발목을 붙들려는 듯 들려오고 있었다.

‘제길. 제길.’

저 미친놈. 저 육시할 놈.

다음 안가까지만 가면 된다고. 그러면 그곳에 반드시 약이 있을 거라고.

발을 질질 끌면서도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겼으나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배 속이 불에 타는 듯했다.

‘아직 안 돼. 아직 난 죽을 수 없다! 죽을 수 없어!’

내가 어찌 살아왔는데. 그간 얼마나 많은 것들을 희생하며 살아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죽을 수 있을까.

죽을 수 없었다.

절대 그럴 순 없었다.

그렇게 간신히 저 천령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곳까지 몸을 옮기던 그때였다.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무언가가 그런 신영의 앞을 막아섰다.

환한 빛무리 속에서 흰 천이 펄럭였다.

마치 허공의 문을 열고 걸어 나온 것처럼.

창공을 가리는 구름인 양 새하얗고 단정한 예복을 입고 나타난 누군가가 깊고 고요한 푸른 눈으로 신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신영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너-. 네가 어떻게 여기에……!”

반사적으로 신영이 달아나듯 뒷걸음질 쳤으나 그의 뒤편에서도 환한 빛무리가 생겨나더니 붉고 화려한 예복이 꽃잎처럼 나부꼈다.

시체처럼 창백해진 신영이 가까스로 뒤를 돌았다.

신영에겐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얼굴이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가 풀린 신영이 쿵, 땅으로 주저앉았다.

“세, 세화야. 잠, 잠깐만. 내, 내 말 좀 들어 보거라.”

그가 제 앞에 나타난 두 인영을 향해 애원했다.

“안다. 내가 밉겠지. 하,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너는 아직 어쩔 수 없는, 정말 하기 싫어도 필요에 의해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을 모르겠지만…… 백, 백기하. 자넨 알지 않는가.”

그를 응시하는 둘에게선 온몸을 떨리게 만드는 살기도, 태산처럼 거대한 영력의 파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증오도 분노도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신영을 두렵게 했다.

천령에게 배를 뚫렸을 때도 느끼지 못한, 턱밑까지 쫓아온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위, 위에 서는 자의 고충에 대해 자넨 알지 않나.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잖아. 안 그런가? 그리고 또…… 그래! 힘겨운 일도 많았지만 둘이 만나게 된 것도, 둘의 혼약이 잡힌 것도 내 덕이 아닌가. 안 그래?”

“…….”

“왜 아무런 말들이 없어. 내가 그간 환계를 위해 노력해 온 것들도 좀 보아 다오. 내 허물만 들춰낼 것이 아니라. 그간 내가 환계에 쌓아 온 공까지-.”

그때, 여인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처음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걱정하지 말아라. 이것은 나의 복수가 아니다.”

“뭐?”

“대가를 치르는 것 또한 섭리일 뿐이니.”

여인의 흰 손이 겉옷으로 감싸인 신영의 복부를 향해 뻗어졌다.

“네 죄는 너 스스로가 판단하게 되겠지.”

세화의 흰 손끝에서 오색의 빛이 타올랐다.

“!!!”

끔찍한 비명이 신영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 * *

물처럼 흔들리는 나직한 풀들을 밟으며 발소리가 이어졌다.

기력을 상실한 채 가쁜 호흡을 뱉고 있던 천령의 몸이 잔뜩 긴장했다.

신영이 돌아온 것인가? 그놈이 결국 날 죽이러 돌아왔어?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흘러도, 기척조차 죽이지 않은 상대에게선 그를 공격할 의사가 느껴지지 않았다.

제법 가까이 다가온 듯한데 영력의 기운 역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죄송, 합니다만. 누구, 신지는 알 수, 없으나…….”

목소리를 내도 상대는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기척을 조금 더 크게 만들어 그가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게 누구이건, 신영은 결코 아니었다.

“……뭐 하나만 여쭈어, 도 되겠습니까.”

천령이 가쁜 호흡을 뱉으며 간신히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

다가온 이는 말이 없었지만, 그에 개의치 않으며 천령이 다시 한번 물었다.

“이곳, 주위에서 혹, 쿨럭쿨럭! 복부에 상처, 를 입은 젊은 사내 하나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근처에는 없는 것 같긴 했다.

주의 깊게 기억해 둔 그 신영의 숨소리나 영력의 느낌이 전해져오지 않았으니.

하지만 또 어찌 알겠는가.

그 끈질긴 것이 달아난 것이 아니라 추격을 피해 근처에서 죽은 척을 하고 있는 것일지.

“보았다.”

“세, 세화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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