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새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날의 빛 이후 교룡의 결계가 할퀴고 간 대지의 흉터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완벽히 자취를 감추었다.
대기 중에 풍성하게 차오른 생명력 덕에 산천의 신록들은 나날이 푸르러지기만 했다.
하지만 계절을 잊고 활짝 피어난 꽃들이 제 향기를 흘릴 새도 없이, 곳곳에서 피어난 자욱한 검은 연기들은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풍경을 덮었다.
환계의 모든 영지가 평화로웠으나 주가의 영지만은 그렇지 못했다.
“잡아라!! 신영의 삼보관이 저기 있다!”
그 목소리가 울리자마자 무기를 든 이들이 한곳으로 빠르게 모여들었다.
신영의 후계자라는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리를 빼앗고.
원로와 무사들은 다른 환족들의 몸을 빼앗아 수명을 늘려 왔고
방계들은 그간 가문이 없는 환족들을 납치해 본가에 영력과 몸을 제공해 왔다니.
다른 가족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추방하면서까지 그런 짓을 해 왔단 말인가?
“난, 난 아니야! 난 정말 몰랐어! 신영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정말 몰랐어!”
“신영께서?”
“헙!”
무기를 든 이들에게 둘러싸인 삼보관이 황급히 부인했으나 오히려 더 흉흉히 변하는 시선들을 깨닫고 황급히 제 입을 막았다.
“참으로 훌륭한 충성심이야. 모두를 버리고 저만 살겠다 도망간 신영을 아직도 그리 높여 존칭하고 따르다니.”
“그, 그게…….”
젠장. 차라리 그 신영이 이곳에 있기만 했다면 모든 죄를 신영의 탓으로 넘길 터인데.
하지만 그 신영은 결계가 사라지고 회복되는 세상을 모두가 지켜보는 사이, 부리나케 제 살길만 찾아 달아난 뒤였다.
이대로 가다간 저들의 분노를 내가 모두 받을 것이 아닌가. 차라리 그가 잡혀야 하는데!
삼보관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 핏대 세운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을 밀어내며 누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딸을 빼앗긴 채 추방되었던 자윤 원로였다.
“자, 자윤! 자윤 자네 잘 왔네. 날 기억하지? 나 삼보관 주기동일세. 혹시 오래 못 보았다고 잊어버린 건 아니지? 신영의 연회에서 우리 바로 옆자리에 앉은 적도 있지 않나.”
주자윤은 차가운 얼굴로 제 앞에 있는 이를 응시하다가 냉랭히 말을 잘랐다.
“시끄러우니 하고 싶은 말은 판결대에 가서나 지껄여 봐.”
“뭐?! 자윤. 자윤 자네 날 모르나? 내가 어디 주가의 이름에 기대 그리 나쁜 짓을 할 것처럼 보이-.”
“끌고 가라!”
“자윤! 자윤 원로! 주자윤!”
영력 섞인 밧줄로 포박된 삼보관이 비참한 목소리를 내며 끌려갔다.
이미 주가의 원로들은 자의로건 타의로건 육문의 판결대에 서기 위해 백석저로 보내진 상황이었다.
남아 있는 무사들은 검까지 내던진 채로 고두하며 제 발로 투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육문의 지휘관들은 이들의 목을 베는 대신 모두를 판결대로 압송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주가의 원로들 중에서도 몸 뺏기에 당해 가족들을 잃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환계 전체에 그간 신영이 해 온 일들을 알릴 때 증인으로 세우고자 한 것이다.
주가 본연의 영력 외에 다른 가문의 영력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이들. 어느 순간 영력이 폭발적으로 증진된 이들.
평소 신영의 측근으로 지내 왔던 이들. 언젠가부터 신영의 저택에 머물게 되었던 이들.
승냥이 떼처럼 제게 떨어질 이득을 기다리며 팔부인들에게 아첨하던 이들.
조건을 세부적으로 추렸음에도 꽤 많은 이들이 거기에 해당되었다.
삼보관의 뒷모습을 차갑게 응시하던 주자윤의 등 뒤로 발자국 하나가 다가섰다.
전서구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멀어졌던 그의 호위였다.
“도망간 신영을 쫓는 이들에게서 온 연락인가?”
“아닙니다. 누군가 일보관의 행방을 알려 왔습니다. 신영 쪽은 지난번 안가에 들어간 상태로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고요. 지원을 보낼까요?”
미꾸라지처럼 몸을 숨기는 데만 재빠른가 보군.
자신들을 영지 밖으로 내보낼 때도 얼마나 일 처리가 빨랐던가.
신영의 그런 행태를 떠올리고 차갑게 코웃음 친 주자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 일보관과 이보관도 잡지 못했다. 신영은 일단 그곳에 있는 자들에게 맡기고 우린 서둘러 행방이 드러난 놈을 먼저 잡는다!”
“네!”
그가 먼저 말 위에 오른 상태로 사람들을 향해 명령했다.
“주가의 원로들은 아직 영지선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자네들은 근처를 샅샅이 뒤져 모두 판결대로 압송하게!”
“예!”
무기를 든 이들이 일제히 대답한 것과 동시에 주자윤의 호위들이 잇달아 말에 올랐다.
거침없는 말발굽 소리가 싱그러운 푸른 잎 사이를 빠르게 지나쳤다.
신영에 기대 잔뜩 배를 불리고 욕망을 채우던 이들은 생각보다 더 많았고 일이 다 해결되기 위해선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결연한 표정으로 바람처럼 달려가는 이들의 머리 위를 따뜻한 햇살이 따라붙었다.
* * *
촤아악!
날카로운 나뭇가지 하나가 천령의 볼을 긁었다.
갈라진 틈새로 붉은 피가 흘렀으나 천령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고 영력을 높이는 그의 시선이 포식자의 그것처럼 맹렬하고 날카로웠다.
허억허억.
그가 쫓는 이는 이미 상처가 깊은 짐승의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곳곳에 숨겨둔 안가가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많은 영기를 사용하는지 도무지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미 더 달아날 힘이 남지 않았다 여겼건만 이리도 시간을 끌게 되다니.’
달아나는 신영의 뒷모습을 떠올린 천령이 이를 사리물었다.
모든 세상이 빛으로 뒤덮이던 그 순간에, 스러지는 결계 사이로 쏜살같이 도망가던 그 비겁한 모습을 보자마자 뒤를 따랐다.
‘더는 시간을 주지 않겠다. 반드시 이곳에서 잡는다. 반드시 죽인다!’
그런 천령의 상태도 만신창이였다.
목표물이 어딘가로 숨을 때마다 그곳에서 꺼내 온 영기들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 내야 했던 터라 처참해져 간 것이다.
하지만 조금도 쉴 수가 없었다.
“천령아.”
노쇠한 신영의 몸으로 저를 부르던 제 주인의 눈이 보이는 듯했다.
마지막까지도 제 아비에 대한 믿음을 놓지 못하던 그 눈이.
“아버지께 무슨 연유가 있으셨을 것이다. 그렇지? 나를 이리 만드신 덴 어쩔 수 없는, 아주 중대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야. 그렇지?”
천령아.
천령아.
애달프게 반복되던 목소리가 천령의 눈빛을 더욱 예리하게 벼렸다.
제 주인이 채 성공하지 못했던 그 마지막 일을, 반드시 제가 해야만 했다.
그때였다.
퍼엉!
천령을 향해 작은 불덩이의 모습을 한 영력이 신호탄처럼 날아왔다.
“!”
간신히 몸을 비틀어 피했으나 빠르게 그를 스쳐 지나간 것이 옆구리를 온통 태우며 상처 입히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치이이익.
“……크윽.”
‘아직도 남은 영기가 있었단 말이야?’
하지만 저자의 몸 역시 지금 정상이 아니었으니.
‘지금 쳐야 한다!’
그렇게 판단한 천령이 제 검에 영력을 담아 거침없이 휘둘렀다.
“허억!”
가로막는 것들을 부수며 코앞까지 밀려드는 영력의 파동에 신영이 황급히 들고 있던 것을 들어 그것을 막아 냈다.
쩡-!
남아 있던 단 하나의 영기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쩌적 금이 가 버렸다.
‘이런 끈질긴 놈! 저 거머리 같은 놈!’
다음 안가까지는 거리가 꽤 남았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신영이 이를 물었다.
‘호위라도 있었으면 달랐을 텐데.’
그래도 다행인 것은, 썩어가던 옆구리의 상처가 그날의 빛에 함께 치유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비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이상 제 난감한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터.
‘차라리 얼굴을 불로 지져 흉이라도 만들까.’
아니, 잠깐.
신영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고 보니 저 천령 놈이 경현이 놈의 옆을 오래 지키지 않았던가.
‘차라리 내가 이 얼굴로 애원하면 어떨까. 분명 이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르니까.’
잠깐 시간만 벌면 된다.
‘그래. 그러는 거야. 반지에 독이 담겨 있으니 저놈의 마음이 약해진 순간 그걸 뿌리고, 쓰러진 놈의 영력을 먹어 치운 후 죽이는 거야.’
그리고 숨어 어떻게 정체를 숨길지 천천히 고민해보면 되는 것이다.
교활한 신영의 눈매가 휘어지던 찰나였다. 바람처럼 날아든 칼날이 그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악!”
퍽!
졸지에 앞으로 고꾸라졌으나 통증을 느낄 새도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짙은 수풀 사이로 천령의 모습이 나타났다.
만신창이가 된 천령의 상태를 확인한 신영이 처량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천, 천령아.”
넘어진 모습 그대로 주저앉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주경현이 살아생전 천령을 부르던 그 시선으로.
그 목소리로, 애처롭게 천령을 불렀다.
“천령아. 너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것이냐.”
“…….”
“우리 좋지 않았느냐. 내가 대체 네게 못 해 준 게 뭐냐. 뭐에 화가 나서 내게 이러는 것이야.”
“…….”
“내가 아버지의 자리를 노렸던 것이 그리 네게도 용서받지 못할 대죄였느냐.”
그 말에 멈칫 천령의 발이 멎었다.
눈을 빛낸 신영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천령아,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얼마나 큰 꿈을 꾸고 있었는지. 내가 신영이 되면 바꿀 세상의 규율과 법칙을 떠올리며 우리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더냐. 난 단지 그 세상을 조금 더 빨리 끌어오려-.”
“그 입으로!”
“천령아?”
“감히 내 주인을, 아들을 잡아먹어 놓고, 그 입으로 뻔뻔하게 내 주인을 거론하고 흉내 내는 것이냐?”
“!”
“네가 내 주인의 거죽을 뒤집어썼다 한들, 어찌 내가 주인을 알아보지 못할까.”
이를 간 천령이 단숨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널 이곳에서 죽여 내 주인의 앞으로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