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216/254)

울음도 슬픔도, 자격이 있는 자만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그 자격이 생기는 것은 가주께서 남기신 일들을 누구보다 완벽히 실행하고 난 뒤일 것이다.

흐느끼는 이들을 잠시 응시한 백만용이 슬픔에 잠긴 장소를 지나치며 나아갔다.

자윤 원로를 비롯해 주명윤과 함께 온 주가의 오래된 혈족들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신영의 무사들을 결박하던 것도 잊고 망연히 서 있었다.

그런 그들의 정신을 일깨우며 입을 열었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목숨으로 사기를 정화하시겠다던 가모님께서 저리 행동에 들어가신 이상, 우리는 영력이 남은 이들을 모아 한시라도 빨리 주가 쪽 원로와 무사들을 제압해야 합니다.”

그리 주장하는 백만용의 시선 역시도 떨리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감정이 그의 눈 안에 담겼다.

하지만 백만용은 오히려 제 표정을 단단히 했다.

“그래야 저 암무와 결계가 사라진 이후, 희생자들을 위한 심판대까지 저들을 압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침통한 목소리로 독려하며 엉망이 된 강변을 정리하려 할 때였다.

둥.

하늘이 울렸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은 울림이었다.

두웅.

하지만 두 번째 울림은 강제로라도 동생을 꺼내겠다며 기둥으로 달려가기 위해 결계를 빠져나가려던 두 오라비가 알아차릴 정도는 되었다.

둥!

세 번째는 최장명을 비롯해 영력이 높은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 정도였다.

“?!”

그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한곳으로 향했다.

다리가 풀린 듯 땅에 주저앉아 있던 천수아와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울고 있던 세 자매를 포함해 모두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것과 동시에 그곳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네 번째 울림이 들렸다.

쿠웅. 쿵. 쿵.

울림은 서서히 땅과 하늘 저편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을 삼켰던 빛의 기둥이 떨리고 있었다.

* * *

세화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생의 처음과 끝을 맞이하듯, 그녀의 눈앞으로 많은 것들이 감은 눈 안쪽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 혹 주마등인가.

그녀의 두 생에 걸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슬픈 일도 잔뜩 있었건만.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오직 행복했을 때의 정경뿐이었다.

처음 축제에 갔을 때의 기억이, 하늘을 수놓으며 퍼져 가는 폭죽의 화려한 아름다움이 다시금 그녀를 기쁘게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웃고 계셨고, 오라버니들은 바람이 흔들고 가는 정원수 사이에 서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따뜻한 차와 간식을 가져왔다며 세 자매가 그녀를 외쳐 불렀다.

해가 저무는 시간의 일렁이는 노을이 푸른 정원을 따뜻하게 물들였다.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칠 때마다 듣기 좋은 청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온화한 미소들이 맑고 투명한 향기 속에 번져 들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아스라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감싸 안았다.

그녀의 몸이 조금 떨렸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혹 제가 놀라거나 크게 움직이면 이 감촉이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

그저 천천히 손을 올려, 제 어깨를 감싸 안은 단단한 손의 손가락 끝을 관절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을 주어 움켜쥐었다.

여전히 눈앞에선 그녀가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모든 신경은 제 어깨 위에 놓인 온기로 쏠려 있었다.

천천히 고갤 돌려 보니 그가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가와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아무런 말도 소리로 꺼내 놓지 않았건만 서로의 마음을 그대로 읽을 수 있는 듯했다.

그가 다정한 시선으로 말했다.

-소원을 빌었어.

-소원이요?

그녀가 되물었다.

-응.

-무슨 소원이요?

-그대가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하기를, 하고.

-바보같이. 당신 몸을 낫게 해달라고 빌었어야죠.

-몰라. 그때 너무 행복해서 그 말이 그저 흘러나왔어. 내가 행복한 만큼 그대가 행복했으면 해서.

-행복했다고요?

-응. 그대와 함께 하는 길이었잖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

-…….

-왜 또 울어. 내가 뭘 잘못 말했어?

-…….

-울지 마. 눈가가 트면 어떡해. 약초를 발라줄 수도 없는데.

여전히 한결같이 그녀만을 걱정하는 이 바보 같은 남자를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그렇다면. 그런 거라면.

-그러면 당신이 있어야죠.

세화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난 당신이 없으면 행복할 수 없어요.

그의 깊고 푸른 눈동자를 마주 보며 세화가 우는 듯 웃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내게도 기회가 있다면, 나도 빌고 싶은 게 있어요.

-뭐를?

-당신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지 않겠다고. 행복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그대.

-과거를 되새기며 현재를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이들의 행복이 더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고.

그녀가 그의 옷깃을 세차게 움켜쥐었다.

새하얀 그의 예복이 그녀의 가는 손가락 안에서 구겨졌다.

-언제 어느 때고. 나를 사랑해 준 이들의 행복 역시 내가 있어야 존재한다는 걸 잊지 않겠다고.

별처럼 반짝이는 눈물을 볼 위로 떨어뜨리며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에게 속삭였다.

그걸 다 당신이 가르쳐 줬다고.

당신이 내게 가르쳐 준 그대로 그대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그 순간 그녀가 소원을 숨겨 놓았던 그의 어깨에서 따뜻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역린이 흩어지며 그의 피부 위로 반짝이는 비늘이 퍼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마치 그녀가 과거로 돌아왔던 그날처럼.

멈춰 있던 시간이 세차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기둥 바깥의 상황은 엉망이었다.

결계 바깥의 사기는 조금도 흐려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 사이에서 빛의 기둥은 쉼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거기에 세찬 바람이 가세했다.

흐느끼던 이들조차도 두 눈을 크게 뜰 정도로 땅이 요동치며 광풍이 불어닥쳤다.

사기로 뒤덮인 하늘이 낙뢰를 흩뿌리듯 번쩍번쩍 빛을 터뜨렸다.

콰앙! 쾅!

굉음이 이어지고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렸다.

거대한 우렛소리에 다급해진 몇몇 이들이 얼른 결계에 영력을 덧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거대한 빛의 기둥에서 오색의 영력이 퍼져 나왔다.

그 영력의 파동은 광풍 사이에서도 선명했고 온 세상이 진동하는 와중에도 흔들림이라고는 없었다.

모두가 당황하던 것도 잊고 그 찬란한 신비로움을 망연히 응시하는 사이.

광풍을 진정시킨 오색 빛무리 속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엔 그저 둥글게 뭉쳐진 빛의 구슬 같았다.

그러다가 이내 서서히 짐승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보는 이들은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제가 무얼 보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것이 대체 무엇이지?’

‘무엇인데 저리 찬란할까.’

그 짐승은 난생처음 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커다란 뿔과 심연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눈.

가늘고 긴 다리와 불꽃이 엉겨 붙은 것 같은 짧은 꼬리를 지닌 듯 보이기도 했다.

용을 닮은 듯도 했고 사슴을 닮은 듯도 했다.

허공을 밟고 선 짐승의 발굽 아래로 진한 생명력이 꽃잎처럼 흐드러졌다.

“……저게.”

“저게, 대체….”

그 찬란한 짐승이 결계 안에 감싸인 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정하고 따스한 시선으로 아래를 보다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차르르-

한밤을 깨우고 아침을 불러오듯.

짐승이 다가올수록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검은 사기가 안개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짐승의 눈을 보던 천수아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떨었다.

저 눈은.

“세, 세화야!”

모두가 마른침을 삼킨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그 사이로 천수아가 울음처럼 소리쳤다.

“세화야! 세화야!”

그녀가 그리 소리치던 순간 짐승의 커다란 눈이 그녀에게 와 닿았다.

“…….”

어떤 말도 행동도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 천수아의 붉어진 눈가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짐승을 배웅했다.

“다녀오거라.”

그 인사를 들은 듯 짐승이 뛰어올랐다.

짐승의 길을 안내하듯 하늘이 열리며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검고 짙은 사기들이 감히 닿지도 못하고 사그라졌고, 허공에 뜬 발굽이 지나는 곳마다 여린 풀과 꽃이 자랐다.

교룡의 사기로 썩어 들던 땅이 회복되면서 향기가 퍼져 나갔다.

코에 닿아 오는 신선한 공기는 청량하고 풋풋한 생기를 넘칠 정도로 품고 있었다.

“……성, 성수.”

그런 짐승과 마주한 이들이 마치 다리가 풀린 듯 땅 위로 주저앉았다.

짐승은 몹시도 거대하고 위엄 있어 보이기도 했으나 모두를 품을 정도로 자애롭고 따뜻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완전히 새로운 성수의 등장을 지극한 경탄과 함께 맞아들이던 무사들은 그제야 제 몸에서 이루어진 이상한 일을 자각했다.

“!”

잔뜩 지쳐 남은 것이 없었던 영력이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며 생겼던 작은 상처마저도 치유되고 있었다.

“……맙소사.”

그 놀람은 인계로 가는 통로 초소에 모여 있던 이들 역시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있었다.

근원이 파괴된 이들이 아니었던가.

환족 부인이 나누어 준 영단에 의지해 간신히 문을 넘었던 이들은 잔뜩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상태로 이쪽으로 빠르게 퍼지는 어둠을 응시하며 불안한 굉음이 울리는 장소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데 이건 대체 어쩐 일일까.

“이게 뭐지?”

그런 그들의 위로 무언가가 천천히 쏟아져 내렸다.

작은 반딧불 같기도 했고 빛나는 함박눈 같기도 했다.

하늘에서 천천히 떨어져 내린 그 옅은 빛 가루들은 확산되는 어둠을 멈추며 그들의 위를 소복이 덮었다.

빛의 눈이 내리는 듯한 더없이 아름다운 광경에 그들이 넋을 잃은 채 두려움도 잊고 감탄을 토해 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의 몸에서 조금씩 열이 올랐다.

호흡이 편안해지고 온몸에 활기가 넘쳐흘렀다.

“……어.”

파괴되었던 근원이 회복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꿈에서도 바랄 수 없었던 일에 모두의 얼굴에서 놀라움이 넘쳐흘렀다.

그 빛 가루는 환계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교룡의 낙뢰에 맞은 여가 지방을 회복시켰다.

백석저를 환하게 뒤덮었으며 인계에까지 스며들었다.

사기가 요동치는 혈호에서 빠르게 멀어지고 있던 성익권이 그 이상한 현상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눈처럼 흩뿌려지는 무언가가 혈호 위로 쏟아질 때마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이 점차 걷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빨갛던 웅덩이는 천천히 맑아졌고, 인계에 남은 환족들도 제 몸이 이전처럼 아프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겨울을 목전에 둔 계절임에도 산천 이곳저곳에서 찬연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새소리가 맑게 울고 대기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거칠게 흔들리던 대지가 진정됨과 동시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오색의 빛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갔다.

밤을 가르고 낮의 하늘을 불러오는 듯한 그 빛이 너무나 밝아, 모두가 질끈 눈을 감았다.

다시 그 눈을 떴을 땐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을 것을, 그곳에 있는 누구도 모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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