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5/254)

* * *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세계를 발아래 두고 있었다.

단번에 시야가 완벽히 달라졌다.

작은 새의 시야도 그녀의 것이었고, 메마른 나뭇가지를 스쳐 사기로 가득한 땅을 어렵게 지나는 바람의 시야도 그녀의 것이었다.

세상을 뒤엎은 거대한 조화와 불변의 이치들이 그녀의 눈에 글자처럼 읽혀 들었다.

폭발적인 영력이 그녀의 안에 고여 있었다.

하지만.

“백기하!!”

이 세상에 그만이 없었다.

세상의 눈을 빌려 그를 찾아보아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거대한 힘은 세화를 반기듯 온몸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이 너의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없는데. 이 영력을 가지고도 그를 찾아낼 수 없는데.

‘그렇다면 이런 힘이 무슨 쓸모가 있지?’

이 힘이 얼마나 방대하건. 어떤 일을 할 수 있건. 어떻게 써야 하건. 그런 건 그녀에게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저 멀리, 적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배신자 무리의 목을 광장에 효시하고 몸뚱이는 갈기갈기 찢어 모두 개 우리에 던져 넣어라!”

그녀는 아직까지도 때때로 악몽에 시달리곤 했다.

비가 오거나 어두운 밤,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들이 지치지도 않고 그녀의 귀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렇게 증오했음에도, 이 순간 세화의 눈에는 원수들의 모습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 있어요. 내 말 들려요?! 당신, 대체 어디 있는 거예요!”

대체 그 짐승이 그를 어떻게 한 걸까.

역린조차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 혹, 그 빛 속에서 소멸하기라도 한 건가?

엉망으로 다치고 상처 입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니 세화는 미칠 것 같았다.

그녀가 울부짖듯 소리쳤다.

“백기하!!”

투명한 눈물이 거꾸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쉬지 않고 그의 이름을 외쳐 불렀다.

하지만 세상은 너무 넓었고 그녀는 너무 작았다. 제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것만 같았다.

“제발 돌려줘.”

그녀가 온 얼굴을 다 적시며 애원했다.

하늘이 준 거대한 사명을 거부했기 때문일까.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이런 힘도, 세상도 전부 다.

그가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힘을 거부할수록 제 존재가 스러져 가고 있었다.

몸 안에 그득했던 거대한 힘은 사라졌고, 육체 역시도 언제 사라질지 모를 정도로 투명해졌다.

그런 그녀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 다시금 밝은 폭포가 나타났다.

그걸 보면서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복수도 사명도 지금의 그녀에겐 조금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어떻게 되고 있든.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메운 걱정거리는 오직 한 가지였다.

그때, 뺨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돌아보자 따뜻한 눈을 한 거대한 백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몸집이 작아진 적룡이 그런 세화의 다른 편에 다가와 섰다.

저 멀리서는, 필사적으로 기어오고 있다는 것은 알겠으나 그 속도를 달려온다고 말해도 좋을지 알 수 없는 푸른 거북이 하나가 핏대를 세우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황동빛 사슴이 우아한 눈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너희들…….”

숨 가쁘게 다가온 거북이와 사슴이 그녀를 그대로 지나쳤다.

마주친 눈을 가늘게 접으며 앞으로 달려 나가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폭포 속으로 뛰어내렸다.

“!!”

그 사이 적룡과 백호 역시도 그녀를 떠나 폭포를 향해 다가갔다.

적룡 역시 그녀를 돌아보지 않은 채 폭포 속으로 뛰어내렸다.

마지막 남은 백호가 폭포를 앞에 두고 몸을 돌렸다.

조용히 눈을 깜빡이며 여러 가지 감정이 그득한 시선을 그녀에게 던져왔다.

푸른 눈이 그녀를 응시하며 상냥하게 휘어졌다.

편안한 표정을 지으며 기꺼이 폭포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들은 새하얀 빛이 되어 이내 거대한 폭포와 뒤섞여 버렸다.

그러자 폭포로부터 새하얀 빛이 눈도 뜰 수 없도록 강하게 터져 나왔다.

주변이 빠르게 멀어졌고, 얼굴을 스치는 바람 때문에 눈조차 뜨기 힘들 정도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주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적들의 모습도. 세상도. 폭포도. 조화와 불변의 이치들도.

아주 작은, 그렇지만 환하게 빛나는 혼 하나 말고는.

맙소사.

“당신!”

그녀가 날 듯이 달려가 그 혼을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상냥한 온기가 작은 혼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찌 몰라볼 수 있을까.

어째서 이런 모습을 하고 있나.

왜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인가.

이런 모습을 하고도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이 남자를 보니 모든 것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있어요.”

세화의 얼굴 위로 다시금 투명하고 뜨거운 것들이 담뿍 쏟아져 내렸다.

“……이런 모습이 되었는데, 후회하지 않아요?”

뜨거운 것이 계속 치밀어 올라서, 목이 졸리는 듯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고맙다는 말은 너무나 초라하고. 미안하다는 말은 그보다 더 초라해서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백, 기하.”

하지만 이제 되었다.

이 혼을 찾았으니.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그녀의 모든 바람과 욕망이 사라지던 그 순간 그녀의 세상이 다시 한번 거꾸로 돌았다.

혹여 그의 혼을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그녀가 황급히 제 품 안의 혼을 옷 안에 넣고 끌어안았다.

사방이 따뜻한 빛으로 가득 찼고, 거대한 힘의 잔재가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빛무리 속에서, 제 영혼과 그의 영혼이 함께 뒤섞이는 것을 느끼며 세화의 젖은 얼굴 사이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들려요?”

그녀가 붉은 입술을 열어 조용히 속삭였다.

“이 옷, 혼례복이었어요. 당신도 알고 있었죠?”

그녀는 출진의 그 날 홀로 혼례복을 연상시키는 붉은 예복을 갖춰 입었다.

전장에 서기엔 절대 적합하지 않은 복장이었다.

하지만 이전에 교룡이 말했던 대로, 그녀 홀로 모두에게 잊혀지며 죽어 가야 한다면 그의 아내로서 사라지고 싶었다.

한데 그가 어떻게 알고 사내의 혼례복을 연상시키는 흰 예복을 입고 나타날 줄이야.

결국 그들은 무사들의 가장 선두에서, 나란히 희고 붉은 예복을 입고 달렸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문득 웃음이 나와서, 그녀는 감춰 뒀던 비밀 하나를 이야기하기로 했다.

“당신이 물어본 적 있었죠. 언제부터 당신이 좋았냐고.”

그것은 인계의 가뭄을 해결하기 전, 기우제 때 사용할 환석들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동무의 꾐에 넘어가 백씨가 제일 좋다고 소리쳤던 그녀는 그 이후에 백기하에게 제법 집요한 질문을 들어야 했다.

언제부터 내가 좋았냐든가. 백가에 있는 동안에도 내가 조금은 신경 쓰이긴 했냐든가.

질문이 계속되니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더라.

“봐 봐. 저분이 내가 말한 그 사내야. 어때?”

남장을 한 정치화가 눈짓만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며 그렇게 물었을 때부터.

“난 백씨 싫어한다.”

“응?”

“백씨 정말 싫어.”

입매를 굳힌 자신이 그리 대답했을 때부터.

그래. 사실 그때부터였다. 그때도 당신이 신경 쓰였다.

“봐 봐. 아직도 보고 있어. 우릴 보는 거 맞다니까.”

그 시선이 기분 좋았다.

비밀 얘기라도 하듯, 그녀가 제 품 안을 향해 조곤조곤 그날의 일을 속삭였다.

백가에 가서, 다시 당신을 만났을 때. 나도 그날 당신을 알아보았노라고.

백가 혈족들의 괴롭힘을 받아 엉망이 된 모습으로 당신을 만나 사실 많이 창피했었더라고.

시간이 그들만 지나쳐 흐르는 듯한 그 짧고 포근한 순간, 그녀는 그렇게 많은 말들을 꺼내 놓았다.

사방이 따스했고, 품 안엔 그가 그녀와 함께 있었다.

많은 것을 그르치게 되는 한이 있어도 이 혼 하나만은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것처럼.

그녀가 제 품 안의 것을 힘주어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 * *

새까만 사기와 부패의 냄새가 자욱한 강변은 엉망이었다.

세상의 비탄은 모두 이곳에 모인 듯, 오색 빛의 기둥 바깥으로 거센 통곡 소리가 가득했다.

“세화야!”

“가주!”

“아가씨!”

어린 자식이 죽으러 가는 것을 본 부모와.

어여삐 아끼던 여동생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형제와.

소중한 아가씨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 자매들과.

제 평생을 바쳐 목숨보다도 아끼던 주군을 잃은 신하들의 울음이 한곳에 있었다.

“안 된다! 안 돼!!”

그중 가장 거세게 울부짖는 것은 주명윤이었다.

이미 딸이 지난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두를 살리고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얼마나 힘든 일들을 진행해야 했는지 모두 다 듣고 난 이후가 아닌가.

그런 딸이 이번엔 저 빛의 기둥 속에 갇혀 버린 것이다.

세화의 주위로 생겨난 저 거대한 영력의 통로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그 기둥이 단단하게 세워지기 전 안으로 뛰어 들어간 백가주가 무슨 생각이었던 것일지. 그것을 모르는 이가 이곳에 있을까.

“세화야. 세화야!”

벌벌 떨리는 손으로 마른 흙을 움켜쥔 주명윤이 땅에 머리를 박았다.

또다시 널 이리 희생시키게 되다니.

모두를 힘겹게 구한 널 또다시 잃게 된다니.

오장육부가 산 채로 찢긴다 한들 이보다는 덜 아플 것 같았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주저앉아 흐느끼며 울부짖을 때, 백만용은 그저 고요히 자리에 서서 흰 기둥을 응시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제 가주께서 얼마나 용의주도하신지.

얼마나 상황 판단이 정확하고 빠르신지.

그런 가주께서 뒷일을 부탁한다고 하시며 저 안으로 뛰어드셨다면, 그것은 절대로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 생각하신 것일 터였다.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각오하셨다는 얘기였다.

“……가주.”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세차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나.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것인가?’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간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을 필사적으로 주워 삼켰다.

가주께선 이제 겨우 마음 둘 곳을 찾으시지 않았나.

이제야 자신의 삶을 생각하시기 시작하셨는데. 이제 조금 행복해지시려는 찰나인데.

많은 것을 짊어진 무거운 어깨를 기댈 수 있는 장소를 이제야 발견하셨는데.

하지만 아무리 모두가 목이 터져라 그들을 외쳐 부른들, 안에 든 이들을 단단히 감싸 안은 빛의 기둥은 조금도 흩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백만용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대로 그저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자신은 가주께서 믿은, 백가의 하나뿐인 재상이었으니.

“이곳에 내 인장과 모든 결계와 봉인을 움직이는 영단과 영기들의 위치가 적혀 있다. 네가 보관하거라.”

“혹 내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모든 경우에, 네가 이것들을 가지고 혈족들을 이끌어라. 그때는 네가 백가의 수장이다. 알겠느냐.”

‘아니요. 저는 어떤 경우에도 가주를 모시는 재상입니다.’

그러니 부디.

세차게 사리문 잇새로 피가 흘렀으나 백만용은 통증조차 느끼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