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화 (214/254)

“…….”

그녀의 턱이 순간 떨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 위로 단단한 손이 다가왔다.

부드럽게 볼을 쓸고 흔들리는 눈가를 매만졌다.

“무서웠지?”

“…….”

그럴 리가. 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던졌던 당신들을 위한 일인걸.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쩐지 목이 꽉 메여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홀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대를 외롭게 했지?”

“…….”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홀로 가야 할 길이다.

당신들을 위해 가는 길이라 하면서 어떻게 외롭다고 다른 누군가를 동행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그녀가 그리 부인해도 그는 웃기만 했다.

그 웃음과 단단한 눈을 바라보고 있자 갑자기 손끝이 온통 저려 오는 듯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힘을 주느라,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추측해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대신할 수만 있다면. 그대 대신 그럴 수만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겠지. 하지만 그렇게 대신 죽을 수도, 그렇다고 그대도 살아 달라며 억지를 쓸 수도 없으니 함께 갈 수밖에.”

그런 그녀에게 그는 여전히 고통이라고는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다 터져 짓무르는 손끝으로 흔들리는 눈가를 매만져 주고 애틋한 시선을 던져왔다.

“함께 갈게.”

“…….”

“밀어내지 마.”

“…….”

“밀어내지 마.”

하얗고 유려한 그녀의 턱이 다시 조금 떨렸다.

그 떨림은 이내 걷잡을 수 없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눈가가 시큰거리고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하지만 자신이 울면 그가 어떻게 가겠는가.

세화는 제 눈 안을 뜨끈하게 채우는 것을 간신히 참아 냈다.

터질 정도로 세차게 입술을 깨문 그녀가 새하얗고 가녀린 팔을 들어 그의 몸을 밀어냈다.

당신이 죽는다니.

그건 있을 수 없다. 나는 볼 수 없어.

“가긴, 어딜 같이 가요. 백가는 어쩌고요.”

“재상에게 맡기고 왔어. 만용이가 잘할 거야.”

“기껏 육문이 하나로 모였는데 당신이 없으면 어쩌고요.”

“그게 대순가. 자기 가문 일이니 알아서들 하겠지.”

그 사이에도 살이 짓무르고 타들어 가는 냄새가 가득했다.

떨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고 이 남자와 손을 맞잡고 있고 싶었지만, 더는 붙잡아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기다려 줘요, 날.”

빛 속에서, 더없이 새까맣게 보이는 그의 눈동자를 강하게 응시하며 부탁했다.

“바깥에서 기다려 줘요. 언제가 되든, 얼마가 지나든. 꼭 다시 당신을 만나러 갈게요.”

그녀가 꽉 메여 오는 제 목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그리되어야 한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날 기억하지 못하면 내가 먼저 당신을 쫓아다니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혼인하자 할게요.”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흉터처럼 깊이 제 속에 남은 이 마음은 이제 이 남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바라던 상황이 아니더라도.

그러다 혹 혼인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나를 잊고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더라도.

“그러니 바깥에서 기다려 줘요.”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후회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긴 그녀의 말에 답하는 목소리는 짧았다.

“싫어.”

“당신-!”

“그대는 그걸 기다릴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야.”

그가 그녀의 떨리는 손을 제 손가락 사이에 끼어 단단히 마주 잡았다.

“그렇게 기다릴 수 없어. 그러니 지금 여기서 죽는다고 하더라도. 바보 같은 죽음이 된다고 하더라도.”

“내겐 신수의 불사로 이룰 수 있는 소원이 있잖아요! 그걸 쓸 거예요. 그러니 혼자 헛된 일을 하지 말고 빨리 가라고요!”

“아니. 날 속일 생각하지 마. 그대가 그걸 쓰지 못하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

“쓸 수 있다면 벌써 썼겠지. 대체 어떻게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한 거야?”

“아, 아니에요. 쓸 수 있어요. 그걸 써서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갈 거고-.”

“됐어. 무슨 말을 하든 절대 두고 가지 않을 거야. 그대는 외로움을 많이 타니까, 내가 항상 곁에 있을 거야.”

그 역시 떨리는 눈을 한 채 웃었다.

“사랑하니까.”

“…….”

“그대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니까.”

결국 세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을 보았나.

끝까지 참아 내려 했던 눈물이 끝내 뜨끈하게 흘러내렸다. 쉼 없이 볼을 타고 흘렀다.

“빨리…….”

그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채로도 포기하지 못하고 그의 몸을 밀어냈다.

“빨리 나가라고요.”

이 빛이 그의 몸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고 있을지 알고 있었기에 세게 밀어내지도 때릴 수도 없었다.

“나가라고요. 나가요, 빨리. 어서!”

왜 내 말을 이리 안 듣냐고. 결국,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은 사람. 당신은 정말 바보야. 왜 그렇게까지. 왜. 대체 왜.

“부탁이니 지금 나가요. 이곳에선 역린으로도 당신을 치료하지 못한단 말이에요.”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몸이 이렇듯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면 벌써 그의 몸에 숨겨둔 역린이 반응했어야 한다.

크게 부풀어 오르듯 존재를 드러내며 그의 몸을 치료해야 옳았다.

하지만 무슨 일에도 한 번은 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역린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어깨 위에 숨겨 둔 두 번째 소원도 마찬가지였다.

함께 살지 못한다면 함께 죽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결코 거짓이 아닐 텐데.

그 어떤 힘조차 듣지 않았던 이 오색 빛의 영력은 역린과 소원에도 영향을 미치는 듯 잠잠하기만 했다.

“그러니 제발 나가요! 나가요.”

이게 마지막이라면 예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데. 이런 엉망인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그런 그녀의 어깨를 단단한 팔이 끌어안았다.

“다만 얼마라도. 지금 이 시간 만이라도 그대의 얼굴을 더 볼 수 있으니 난 그것만으로 됐어.”

그도 물기 어린 목소리로 그렇게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지금 이렇듯 손을 잡고 있으니까. 이렇듯 지금 함께 있으니까.”

“백기하.”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눈앞이 너무 뜨겁고 흐렸다.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명확하게 보고 싶었는데. 아까운 시간 속에서 결국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고야 말다니.

이름을 많이 불러 볼 것을.

이전 생보다 열 배는 더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것도 부족한 것을.

그때였다.

갑자기 세상이 요동쳤다.

“!!”

귓가에서 굉음이 울리는 듯도 했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져 버린 듯도 했다.

천지가 뒤바뀌는 듯도 했고, 그와 자신이 있는 이곳이 영원의 시간으로 고정되는 듯도 했다.

그리고 주변을 감싸고 있던 빛이 변화했다.

언제 포근하게 그녀를 감싸 안고 있었냐는 듯 눈앞을 강하게 가린 빛이 터질 듯 눈을 시리게 했다.

“!”

그녀가 놀라 눈을 떴을 땐 빛의 폭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빛의 폭포와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방대한 힘.

그것을 눈앞에 두고도 그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신을 붙잡던 단단한 손길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조금까지 제 곁에 있었던 남자가 사라지고 없었다.

맙소사.

“백기하! 백기하!”

그가 무사하면 된다. 빛의 기둥 바깥으로 나간 거라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백기하!!!”

거대한 힘의 폭포의 존재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그녀는 목이 터져라 그의 이름만을 외쳐 불렀다.

그 순간,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언젠가 보았던 신비하고 거대한 짐승이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마른침이 삼켜졌으나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안력을 돋워 짐승을 마주 응시하며 물었다.

“그는 어디 있어?”

“…….”

“네가 내보낸 거야?”

“…….”

“묻고 있잖아. 대답해!”

하지만 짐승은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눈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해야 할 일을 피하고 핑계라도 대고 있다고 질책이라도 하듯.

그 시선을 받고 있으니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저 짐승이 결코 그를 바깥으로 얌전히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라 깨달은 것이다.

“아, 안 돼.”

그녀가 짐승에게로 달려갔다.

“안 돼. 그를 해치지 마. 내가 갈게. 내가 할 거라고. 그러니까 그를 돌려줘.”

하지만 폭포가 발치까지 다가와 있음에도 짐승에겐 아무리 달려도 닿을 수가 없었다.

“돌려줘. 돌려달라고!”

그녀가 대답 없는 짐승을 향해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 악을 쓰듯 소리쳤다.

“그가 조금이라도 위험해졌다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

“이러지 마. 할 거야. 뭐든지 할게. 원하는 건 다 할게. 뭐든. 그게 뭐든지.”

난 다 필요 없어. 세상을 바꿀 저런 큰 힘도. 거대한 사명도.

“그저 그만 있으면 된단 말이야. 제발 그가 무사하다는 것만 알려 줘.”

어떤 방법으로도 결코 짐승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석상처럼 고요한 짐승을 향해 고두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내가 잘못했다.

어떻게 당신을 두고 떠날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어떻게든 당신과 나 둘 모두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하여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짐승의 눈동자가 어느덧 따뜻해져 있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다시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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