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3화 (213/254)

“……어머니.”

“그래. 네가 책임질 것 없다!”

주명윤이 그런 천수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 역시도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우리 노장들이 있는데 왜 너 홀로 그 일을 한다는 것이야! 이것은 아비가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 뜻이 있는 이들도 합류해 줄 것이다!”

그러자 주가윤과 주가한 형제도 빠르게 앞으로 나섰다.

“그래. 너는 그만 되었어. 내려오거라!”

“그래. 내려오거라! 당장!”

하나 세화는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백만용의 마음도 다급해졌다.

‘아무리 우리 가모님께서 대단하신 분이라 하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내가 먼저 결계 밖으로 뛰쳐나가 일을 시작해야겠어!’

하지만 그렇게 뛰쳐나가려던 발걸음이 이내 멈추어 섰다.

참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목소리를 내었을 이가 이제껏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데 왜 가주께선 아무 말씀도 없으시지?’

가장 먼저 해결책을 생각하시거나 사기를 막아 보겠다 나서실 분이 말이다.

고개를 갸웃한 그가 뒤를 돌았다. 꼿꼿하게 서 하늘을 응시하는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긴 검은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시선은 허공의 아가씨에게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꼭 이 옷을 입어야 한다며, 딱딱하게 명령하시던 몇 겹으로 이어진 새하얀 예복 역시도 마치 지금 꺼낸 듯 선명하기만 했다.

이어지는 백만용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하듯 백기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용아.”

“예?! 예, 가주.”

“이리 와 보거라.”

가주의 부름에 백만용이 냉큼 달려갔다.

“부르셨습니-.”

“내가 십 년 전, 주가와의 전쟁에 나서기 전에 네게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예?!”

생각해 보지도 않은 말에 백만용의 눈동자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기억하느냐.”

“……가, 가주.”

“기억하면 되었다. 내가 지금 하고 싶은 말은 그때 네게 했던 말과 완전히 같으니.”

“가주!”

처음으로 시선이 움직여, 백기하의 어둡고 진한 눈동자가 백만용을 응시했다.

“!”

시선을 받은 백만용이 한마디도 더 하지 못했다.

그 눈 속엔 이미 모든 결심을 끝낸 이의 어떤 완벽한 결의만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 대신 가주의 위에 앉아야겠다고 했을 때.

전쟁을 준비하며 무슨 방법을 쓰든 지금 당장 신수가 되어야겠다고 했을 때.

주가와 맞서게 되는 한이 있어도 더 이상 아무도 저리 가슴 아픈 일을 겪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 때.

그때 보았던 가주의 모습이었다.

“뒤를 부탁한다.”

“……가주.”

흔들리는 시선을 한 백만용이 그를 불렀으나 그의 시선은 다시 제 아가씨에게로 옮겨간 뒤였다.

“…….”

백만용이 이를 사리물었다. 손이 떨리고, 화가 치밀어올랐다.

도대체 왜 희생양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고 그게 왜, 왜 하필이면!

싸늘한 시선을 무사들이 있는 곳으로 돌리며 소리쳤다.

“이곳에 계신 모두가 합심하면 사기를 정화할 수는 없어도 한곳에 모으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한곳에 모을 수 없다 해도 사기의 확산을 멈추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옷깃을 펄럭이며 선 백가 재상이 무사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췄다.

“해 보지도 않고 희생양을 세워 당연한 듯 생명을 요구하는 비겁한 분이 우리 육문엔 계시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

하지만 무사들 사이에선 쉬이 대답이 흘러나오지 못했다.

교룡의 힘이, 사기가 얼마나 끔찍하고 빠르게 모든 것을 썩어 가게 했는지를 이미 목격한 직후가 아닌가.

‘그것을 과연 우리가 해결할 수 있을까?’

교룡이 내지른 검은 영력의 줄기조차 하나 막아 내지를 못했었는데 말이다.

생각만으로도 다리가 떨리는 듯했고 어떤 말도 선뜻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이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런 그들 사이에서 한발 앞으로 나섰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제가 도울 것입니다!”

백제성이었다.

“이미 이곳에 올 때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왔습니다. 아가씨 홀로 짐을 지시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가장 앞서 결계를 뛰쳐나와 교룡과 세화의 전투를 빠짐없이 목격했던 백가 무사들도 이를 악물며 몸을 앞으로 세웠다.

“맞습니다! 환계가 아가씨 혼자만의 것도 아닌데 어찌 홀로 지켜 달라 하겠습니까!”

“저와 가족들이 사는 세상은 제가 지킬 것입니다!”

백가의 무사들이 우르르 나서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다른 육문의 무사들도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하, 하겠습니다. 저, 저도 돕겠습니다!”

목숨을 구걸하고 싶던 신영의 무사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친지를 찾아 그 자리에서 결박된 이들은 제외되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결사적으로 자신 역시 일을 돕겠다 나섰다.

생각해 보니 이건 그들에게 나쁜 기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 사기가 정화되든 그렇지 않든 그들은 여기서 죽을 텐데, 일을 돕겠다 하면 당장의 목숨이라도 연명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그들을 두고 강변은 대안을 논의하는 자들의 목소리와 세화를 부르는 목소리로 떠들썩해졌다.

“세화야! 당장 내려오라 하였는데, 이 어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라도 하는 것이냐!”

“아가씨. 어서 이쪽으로 오세요! 할 만큼 하셨습니다. 교룡을 죽이셨으니 가장 큰 일을 해내셨어요!”

“맞습니다. 이분들께서 금방 방법을 찾아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니 그만 이쪽으로 오세요!”

“일단 결계를 나가 원형으로 이 장소를 둘러싸는 겁니다. 그런 뒤 모두가 마땅히 사기를 정화하거나 봉인할 방법을 찾을 때까지 영력으로 확산을 멈추고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무사 한 명당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최대 삼 일 정도일 테니 그때마다 교대로 자리를 바꿔서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 모습이 왜 그리 보기 좋았을까.

저들이 부르는 제 이름이 어쩌면 이렇게도 듣기 좋은지.

세화가 참지 못하고 조금 웃었다.

눈물은 보이고 싶지 않은데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났다.

“세화야!”

“아가씨!”

하지만 무슨 방법으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적룡의 힘으로도 막지 못한 것을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제법 있었으나 그것은 제가 나서지 않아도 괜찮겠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많은 것들을 손에서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저를 올려다보는 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응시했다.

사기를 고정할 무사들을 바쁘게 차출하는 제 아버지와 오라비들의 머리끝도 잠시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두고 가기 가장 미안한 이를 바라봤다.

그래도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그는 그저 고요히 그녀만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긴 했다.

그는 너무 먼 곳에 있었고, 주변엔 사기가 짙었고.

결계에 감싸진 터라 그의 눈 속에 담긴 감정을 평소와 달리 제대로 읽을 수 없었지만.

그것도 괜찮긴 했다.

사랑한다는 말도 했고. 혼인도 했고. 가장 큰 적도 이미 죽었으니 이후는.

‘이 다음은 당신에게 맡길게요.’

그녀의 붉어진 눈동자가 그를 향해 휘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이 기억들은 모두 내가 가져갈 테니.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그 어떤 목소리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인사도 없었다.

그저 눈을 감았다.

일순, 대지의 시간이 굳었다.

영력이 있는 자라면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힘이 한곳에 모였다.

힘들게 갈라놓았던 영력들을 한데 뒤섞자 그녀의 머리 위로 세찬 빛의 폭포가 떨어졌다.

쿠웅!

하늘과 땅으로 이어지는 오색의 기둥이 단단히 서고 이내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하지만.

세화야. 아가씨.

그렇게 그녀를 부르던 목소리들은 여전히 귓가로 스미는 느낌이었다.

감은 눈 안쪽으로, 빛의 폭포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자신이 지워지고 모두를 살릴 그 장소가.

‘저 안으로 몸을 던지고 나면 모든 것이 끝나겠지.’

이미 주위는 그녀의 결정을 반기듯 따뜻하고 포근하게 그녀의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모두가 살아 갈 세상을 지키기로 했다면 행동은 빠를수록 좋으리라.

그렇게 그녀가 그 폭포를 향해 달려가려던 그 찰나였다.

몸을 던져야 하는데. 그녀 자신을 매개체로 모든 힘을 뒤섞어야 하는데.

“!!”

결코 지금 느껴져선 안 되는 감촉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새하얀 힘의 기둥 안쪽으로, 어떻게 왔는지 모를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 백기하! 당신!”

그의 강인한 팔이 그녀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어, 어떻게. 어떻게 여기-.”

쿵쿵쿵쿵.

맞닿은 가슴의 감촉으로 터질 듯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알아볼 수 있었다.

치이익!

살이 타는 냄새가 나는 듯했고 그녀를 단단히 끌어안은 남자의 등 뒤로 불꽃이 튀었다.

그녀에겐 부드러웠던 빛의 파동이,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되는 침입자를 몰아내기 위해 세차게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옷 위로 드러난 피부부터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빛에 강하게 노출되는 곳에선 피가 튀는 듯했고, 마치 산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끔찍한 열기가 쉼 없이 그를 공격해 왔다.

“그대가…… 이럴 줄 알았지. 인사조차 없이 갈 줄 알았어.”

하지만 그는 그녀를 향해 그저 웃었다.

마치 고통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도 않는 것처럼.

“그래서 조금도 눈을 떼지 못했지. 그 찰나의 순간을 노리기 위해선 몹시 집중하고 있었어야 했으니까.”

나 정말 잘하지 않았냐고.

결국 이렇게 당신과 함께 있게 되지 않았냐고.

어처구니없는 말을 늘어놓는 이 남자에게 세화는 정말 불같이 화가 났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에요?!”

그녀의 손이 세차게 그를 밀어냈다.

“빨리 가요! 빨리 여기서 나가라고요!”

“싫어.”

“뭐라고요?”

살이 타는 냄새가 자욱했다.

빛의 파동 속에서 홀로 고통받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그는 조금도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은 채 세화를 보며 덧붙였다.

“내가 말했잖아. 그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고.”

뭐가 맞는지 틀리는지. 그걸 판단하는 건 그대일 테니까. 그래서 그 결정의 순간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

“백기하!”

백기하의 얼굴이 처음으로 조금 일그러졌다.

“내 예쁜 꽃. 내 전부. 난 그대를 한 번도 막아서고 싶었던 적 없었어.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뛰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지.”

날카롭지만 항상 그녀를 바라볼 때면 누그러지는 눈매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휘었다.

“그러니 그대는 피고 싶은 곳에 가서 피어. 뒤따르는 것은 내가 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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