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한 시선들이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서로가 해야 할 일들을 알고 있었다.
그 결과 역시도.
그런 상황에서는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가만히 백기하를 바라보던 적룡이 장엄한 눈을 감았다.
어둠을 사르던 붉은 불길이 꺼지듯 점차 잦아들었다.
빛을 반사하며 번뜩이던 비늘 역시도 풍화되는 바위처럼 점점 작아졌다.
그러자 펄럭이는 붉은 예복이, 새하얀 얼굴이, 그 안에 담긴 새까만 눈동자가 다시 드러났다.
암흑 속에서도 빛을 밝히던 적룡의 모습은 사라졌는데도.
옅은 빛에 휩싸인 채 결계 속 이들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선명하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백기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적룡의 기운이 사라지자 사기들은 세화에게로 달라붙으려 했다.
영력의 파동으로 밀어내고는 있으나 끈질기게 그녀의 옷가지와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세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망설이는 마음을 눈치채이지 않도록.
“나…….”
그러나 목이 잠깐 메는 것 같아서.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 짧은 한마디를 내어놓고는 잠시 말을 멈춰야 했다.
잠시 후 세화가 다시 붉은 입술을 열었다.
“난.”
하지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당신 혼자 남겨 놓고 가게 되어 미안하다고?
그래도 날 기억하지 못할 테니 다행이라고?
눈이 녹아내리듯 내가 자리했던 곳에는 아무것도 남겨지지 않을 것이고.
당신은 홀로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봄을 맞이하겠지만 그래도 나를 잊고 괴롭진 않을 테니 그것만이 다행이라고?
그 어떤 말도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감정을 숨겨야 하는데.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를 보며 울고 싶지는 않았는데 조금 울 것 같기도 했다.
당장에라도 사기를 정화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유려한 얼굴을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바라보고 있고 싶었다.
그때였다.
“세화야!!”
“가모님!!”
“아가씨!!”
어둠으로 뒤덮인 강변을 향해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거침없이 달려왔다.
깜짝 놀란 그녀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곳으로 이동했다.
일행의 가장 선두에서 무섭도록 일그러진 얼굴로 검에 영력을 덧씌우는 것은 제 두 오라비였다.
그들에게는 결계 속 상황이 보이지 않을 테니 이 새까만 어둠 위로 그것을 제어하듯 억누르고 있는 세화의 모습만 보일 터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검은 암무가 빠르게 비산해 가고 있었다.
‘안 돼!’
손을 내젓자 강변을 감싸고 있던 결계가 부풀어 올랐다.
화악!
이내 암무보다 빠르게 번져 나간 새하얀 결계의 방벽이 새로 나타난 일행들을 순식간에 감싸 안았다.
“…….”
하지만 제 사람들을 안전하게 감싸 안았는데도 불구하고 망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새까만 암무 역시도 확산된 결계의 파동에 밀려나듯 주위로 더 빠르게 퍼져 나간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
결계 안의 상황을 모르던 일행들은 방벽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잔뜩 엉망이 된 채로 흙바닥을 나뒹구는 주가 무사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미 더 이상 항전할 의지도 없이 무릎을 굽힌 채였다.
도우러 달려오긴 하였으나 이미 상황이 정리된 듯한 모습에 살기 넘치는 얼굴로 달려온 일행들의 표정이 조금 풀릴 찰나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신영의 무사들을 보던 누군가가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윤, 윤결아!”
나이가 지긋한 남자가 다급히 말에서 뛰어내려서는 신영의 무사들이 모인 곳으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불합리한 이동 명령을 받고 영지에서 쫓겨나다시피 축출되었다가, 자윤 원로와 함께 달려온 주가 혈족 중 하나였다.
“윤결아!”
주변엔 세상을 녹이는 암무가 가득했고, 새까만 하늘을 붉은 적룡이 덮고 있었건만.
그 사내에겐 저 윤결이라는 무사 하나가 가장 중요하다는 듯 새빨간 얼굴로 달려와 팔을 잡았다.
“너 왜 여기 있는 것이냐! 신영의 저택에서 잘 지내며 직책도 높아졌다던 네가 왜 이런 곳에서 이런 꼴을 하고 있어?!”
‘어쩌지? 이 몸 주인을 아는 잔가 본데.’
사내가 잡은 팔을 흔들며 다그치자 신영의 무사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그렇지 않아도 백기하가 신영의 무사들은 모두 죽이느니 어쩌느니 하는 시점인데 몸 뺏기까지 알려졌다가는 정말로 끝장이다!’
신영의 무사들에겐 영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영단을 나눠 주는 것은 신영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아니던가.
하여 신영의 신임을 받는 무사가 몸을 바꿔야 할 경우 적당히 영력을 가진 주가 혈족 내에서 골라 왔던 것이다. 지금 이 윤결이라는 남자의 몸도 그랬다.
한데 목숨을 위협받는 이런 상황에서 그를 아는 자가 왔으니.
무사가 평소처럼 자신은 신영에게 충성을 맹세해 더 이상 아비가 없다고 냉정하게 손을 쳐내려던 찰나였다.
‘아니, 아니지.’
그가 표정을 바꿨다.
‘이건 어쩌면 더 좋은 상황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몸의 아버지인지 삼촌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렇게 애타게 이름을 부르는 것을 보면 분명 가까운 사이가 아닐까.
‘그래. 백기하 편인 모양인데 감격하여 끌어안고 목숨을 구해 달라 애걸이라도 하면 나만은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지!’
계산을 마친 무사가 비열하게 눈을 빛낼 때였다.
자윤 원로가 그 앞을 막아섰다.
“네가 윤측의 아들인가?”
“예? 윤결이는 제…….”
뭔가 말하려던 윤측이 그 순간 멈칫했다.
자윤 원로와 눈빛을 교환한 윤측이 신영의 무사를 향해 입을 떼었다.
“이분은 자윤 원로이시다. 윤결아, 어서 아비의 상관께 인사드리거라.”
‘아 그렇군. 아버지였군.’
빠르게 표정을 무너뜨린 무사가 흐느끼듯 인사했다.
“자윤 원로. 이런 꼴로 뵙게 되어 송구합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저는 그저 신영의 저택을 관리하는 이 중 하나였는데 영지선을 지킬 이가 모자란다고 하여 강제로 차출되었지 뭡니까.”
“…….”
“아버지. 억지로 이곳에 붙잡혀 와 하지도 못하는 싸움을 강요받아 죽을 지경입니다. 아들 좀 살려 주십시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아버지.”
무사가 반은 진심으로 소리 내어 눈물을 떨어뜨렸으나 그 말에 윤측의 얼굴은 납이라도 삼킨 듯 새하얘졌다.
곁에 있던 자윤 원로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곳에 아는 얼굴들이 많을 것 같군.”
싸늘하게 식은 얼굴 위로, 무섭도록 굳어진 시선이 주가의 무사복을 입은 신영의 무사들에게로 향해졌다.
“사실이라니. 명윤 원로의 말이 사실이었다니.”
“아버지?”
“어찌 날 아버지라고 부르느냐. 넌 내 동생이다.”
“!”
“차라리 기억을 잃었다 답이라도 하지. 내 하나뿐인 동생의 몸을 빼앗아서는……. 그렇게….”
윤측의 말에 망연한 얼굴을 한 혈족들도 허겁지겁 무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제가 아는 얼굴들을 찾아내기 위해 다급히 움직였다.
명윤 원로의 말을 들었을 때도, 혹시나 싶었는데 정말 제 가족들의 몸이 저렇게 몸을 빼앗겨 희생된 거라니.
그때 백만용을 위시한 주명윤 부처와 두 오라비들, 영선과 영무, 최덕문들은 백기하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가주!”
“백가주. 이게 다 무슨 상황입니까?”
“바깥의 새까만 연무는 대체 무엇입니까. 교룡은요?”
“굉음이 이어져 교룡과 대치 상태가 아닌가 하였는데 혹 교룡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입니까?”
“…….”
세화는 결계 바깥에 남아 있었고, 육문의 무사들 역시 주가의 무사들과 뒤엉켜 일일이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그들의 질문이 백기하를 향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백기하는 그들이 아무리 다급하게 물어도 세화만을 가만히 응시할 뿐 대답도 미동도 없었다.
주명윤이 입술을 사리물었다.
멀리서도 보이던 하늘을 가득 채운 용의 모습이 사라져 가기에 일이 잘 해결된 건가 싶었는데 뭔가 감이 좋지 않았다.
그때였다. 영채가 주명윤 부처와 제 자매들을 향해 구르듯이 달려왔다.
“원로 어른! 장부인!”
그런 영채의 얼굴은 이미 비탄에 잠긴 채 눈물로 범벅이었다.
“어찌합니까. 아가씨께서 돌아가시게 생겼습니다!”
“?!!”
“교룡을, 그 육시를 해도 시원치 않을 미친 것을 아가씨께서 죽였는데 그것이 저 연무를 퍼뜨리며 죽었습니다. 저것에 닿는 것은 모두 썩고 말라비틀어져 죽을 텐데 그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 아가씨밖에 없으시답니다.”
영채가 벌써 너무 울어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을 해결하면 아가씨께서 돌아가신다고.”
그 말을 끝내자마자 영채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어찌합니까. 그것을 해결하시면 아가씨께서 돌아가신다는데 어찌해야 합니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던 자들 역시 새하얗게 질린 채 굳어졌다.
연무의 존재를 먼 곳에서 보기만 했을 뿐. 곧 결계 안으로 들어와 전투가 종료된 상황만을 인식하며 일이 잘 끝났구나 안심했던 것이 바로 조금 전이건만.
‘대체 이게 무슨 청천벽력같은 말인가.’
그제야 그들의 시선이 결계 바깥을 가득 메운 어둠으로 향했다.
“저걸 대체 어떻게-.”
마치 혀가 잘리기라도 백만용이 더듬거릴 때였다.
주가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런 걸 대체 어떻게 세화가 혼자 해결한단 말이냐! 아무리 신수가 되었다고 해도 세화 혼자 저런 걸 감당하라는 게 말이 되는 얘기냐!”
주명윤의 얼굴도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저걸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게 뭐라더냐. 영력이냐?”
주가윤과 백만용도 거들었다.
“제 영력도 내놓겠습니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에게서 각출하시지요!”
“장가의 영력엔 치유의 힘이 있으니 장가의 영력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제가 장가주가 계신 곳에 다녀오겠습니다!”
“세화야.”
그 사이에서 천수아가 세화를 올려다보았다.
“영채의 말이 사실이냐. 저 사기를 너만이 정화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네가 죽는다는 말이 참이야?”
“…….”
“대답하거라!”
혹 목소리가 떨리기라도 할까 봐, 세화가 대답 대신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그녀를 본 천수아가 코웃음 쳤다.
“그럼 하지 말아라. 저런 것, 네가 정화할 필요 없다!”
“……예?”
“전 환계에 환족이 몇이냐. 이곳에 있는 무사가 몇이야! 왜 네가 그런 일을 해! 언제부터 이 세상이 네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았다고!”
웃는 듯 보였던 천수아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네 목숨으로만 해결할 수 있다고? 그렇다면 모두 죽으라지! 그렇게 너 하나에게만 매달려 살아야 하는 이들이라면 그냥 모두 죽으라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