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오가는 이조차 없는 별당 안에는 어두운 얼굴을 한 사씨들이 모여 있었다.
“…….”
짜기라도 한 듯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한참 만에야 누군가 제 옆에 앉은 이에게 조용히 물었다.
“이제라도 그간 신영께서 벌이셨던 일에 대한 증거들을 가지고 육문에 붙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
“주가는 지금 지는 해가 되지 않았습니까. 소가주께선 등극식도 실패하셨는데 그렇다면 육문의 신수를 누가 막겠습니까.”
그들의 앞에 앉아 있던 이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꾸짖었다.
“조용히들 하게. 그것은 이미 우리끼리 의논하여 결론이 난 문제가 아닌가.”
“……하지만 그래도 명윤 원로가 육문에서 수장의 장인으로 자리를 잡은 듯하니 저희가 반성하고 투항하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명윤 원로께서는 저희에게 한 번도 나쁘게 대하신적이 없으니-.”
“쓸데없는 말을!”
말을 잘라 낸 사씨의 핵심 원로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렇게 되기 전에 그 방법이라고 써 보지 않았겠는가.
그들이 이렇듯 행동이 늦어진 데에는 육문과 신영 중 어느 동아줄을 잡아야 할지 계산이 빨리 끝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주명윤의 여식이 육문 수장과 혼인한 데다가 적룡의 영단까지 흡수했다 들은 마당인데.’
그들이라고 어찌 주명윤을 핑계로 육문에 붙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전에도 몇 차례나 주명윤을 향해 전서구를 보냈으나 답신조차 받아 보지 못했다.
‘그 고지식한 원로가 가산까지 정리한 후, 가문을 떠났을 때에는 무언가 단단히 틀어지고 잘못되긴 한 것이다.’
불의를 용서치 않는 원로의 성격상, 그 연유를 짐작해 내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분명 신영께서 명하시고 우리가 수행해 온 일들을 몇 가지 눈치챈 것이겠지.’
그동안 사씨들은 선대 신영과 밀착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처리해 왔다.
그 관계는 이전 신영들에 걸쳐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것이었다.
하여 사씨의 핵심 원로들은 주씨 혈족들조차 제대로 모르는 주가의 비밀들을 여러 가지 알고 있었다.
몇 대에 걸쳐 신영의 수족이 되어, 그간 신영의 부인들에게 이후 사용하실 몸을 가져다 바친 것도.
혹 주가 혈족들의 몸을 사용하게 될 경우 그 가족들을 먼 곳으로 보내고, 그들에 관한 나쁜 소문을 퍼뜨려 일의 정당성을 만들어 온 것도 이 사씨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신영의 수족 노릇을 하던 그들을 그 고지식한 원로가 과연 수하로 받아 줄까.
“그 건은 이미 모두 결정이 난 것이니 자넨 따르기만 하게! 신영의 심기마저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면 다시는 주명윤에 대해 언급하지 말아야 할 거야.”
“…….”
단호한 대답에, 다시금 그들 사이에 불안하고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주가가 지는 해가 되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염려되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일단 가장 큰 걱정거리는 신영께서 귀애하던 소가주가 신영의 목을 물어뜯었다는 사실이었다.
찬탈이라니.
‘이건 분명 아버지에게 몸을 빼앗길 위기라는 것을 눈치챈 소가주께서 반기를 드신 것이다! 틀림없어!’
그게 아니라면 가만히 있어도 자연히 신영의 위를 받으실 분이 대체 무슨 연유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몸이 이미 바뀌었을 거라는 가정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몸 뺏기가 탈피 이후의 몸으로만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다.
소가주는 아직 탈피하지 못한 몸이 아닌가.
‘게다가 선대 신영께서 직접 나타나 아들이 저를 공격하고 자리를 찬탈하려 했다 공표했다던데.’
그들이 알고 있는 신영이라면 후환을 남겨 두었을 리가 없다.
몸 뺏기를 강행하고 나서는 자신의 몸을 한 아들을 살려 두었을 리가 없었다.
세화의 영력에 당한 신영은 당장 몸 뺏기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빼고 본다면 더없이 합리적인 추론이긴 했다.
하여 이들은 몸 뺏기에 대해 분노해 친족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은 소가주 주경현이 신영께서 하시던 일을 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신 지.
신영의 수족이었던 그들까지 쳐낼 계획을 가지고 계신 건 아닌지.
이미 그들에겐 신영이 되지 못한 이 소가주밖엔 비빌 언덕이 남지 않았는데 계속해서 의지해도 될 것인지.
그것을 알아보러 이리 결계가 사라지자마자 달려온 것이다.
그때 창호 문 바깥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갔다.
시종들이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창백한 얼굴의 여인이 목함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칠부인!”
들어온 사람을 확인한 사씨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왜 하필 칠부인이. 다른 부인이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 칠부인은 그동안 그들의 아부와 뇌물에 가장 냉랭한 반응을 보이시던 분이 아니신가.
다음 몸으로 쓰시라고 아름다운 여인을 가져다 바쳐도 좋은 소리 한번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들이 때때로 신영의 기분이 상하시지 않는 선에서 교룡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대가로 청할 때마다 대놓고 그들을 섬뜩하게 응시하기도 했다.
한데 이렇게 막막하고 중요한 시기에 하필 이분이 오시다니.
차마 먼저 용건을 꺼내기 힘든 그들이 간신히 칠부인에게 고두하며 인사만을 전했을 때였다.
언제 써늘했냐는 듯 칠부인의 눈매로 훈풍이 스쳐 지나갔다.
“이리 모두 달려오다니, 잘하였구나.”
“??”
시선뿐 아니라 목소리마저도 냉랭했던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당혹을 간신히 감춰 낸 사씨들이 차분하게 응대했다.
“새로운 신영께서 등극하셨는데 어찌 인사를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희는 언제나 그러했듯 신영과 부인들의 수족으로 살겠으니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그래그래. 너희는 이전엔 고분고분하지가 않았지. 종종 신영께 과한 청을 넣기도 하는 너희가 난 처음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칠, 칠부인.”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간 신영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써온 바는 내 잘 알고 있다.”
칠부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밝은 미소였다.
사씨들의 눈가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들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소가주께서는 등극식을 제대로 치러 내시지 못하였다. 하여 새로운 신영께서 완벽히 자리하실 때까지 내가 주가를 책임지기로 하였지. 너희는 그간 신영에게 하였듯 내게 충성할 수 있겠느냐.”
당연한 말씀을.
대체 이젠 누굴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이런 시기에 칠부인의 저 말은 그들에게 무엇보다 감격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한 그들이 일제히 깊게 고두했다.
“저희는 늘 신영과 주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왔습니다! 당연히 부인을 위해서도 그리할 것입니다!”
대답을 듣는 칠부인의 입가로 섬뜩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으나 모두가 머리를 숙이고 있어 그것을 눈치챈 이가 없었다.
소중히 끌어안은 목함을 추슬러 고쳐 안은 칠부인이 다시 웃었다.
“그래. 내 신영의 대리로서 첫 명을 내리려 한다. 너희와 의논할 것이 있어 필요한 것들을 가져오려 하니 잠시 예서 기다려라.”
“마땅히 따를 것입니다. 부인의 명이 있기 전에는 일어서지 않겠습니다!”
“좋구나.”
하하.
참으려 했으나 결국 웃음이 조금 흘러나왔다.
그녀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긴 복도를 지나 별당을 나서자 불안한 얼굴로 서 있는 시종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 하였느냐.”
“예. 부인의 명대로 출입을 통제하는 영기를 한 치 간격으로 저택 담장 아래에 빼곡히 세워 두었습니다. 저택의 측문 하나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오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 무사들은 모두 신영께서 데리고 가셨는데 이것이라도 세워야 우리가 안심할 수 있지. 잘하였다.”
“그러지 마시고 부인께서도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 말에 제법 용기를 얻었는지, 시종 중 하나가 조용히 물었다.
“혹, 육문의 무사들이 저택까지 당도하면 영기들이 쓸모가 없어질지도 모르고-.”
“내가 가야 그 김에 너희도 달아날 수 있으니까? 그래서 묻는 것이냐.”
“예?”
“주인도 팽개치고 네 한목숨만 살리고 싶어 죽겠으나, 문장과 고독이 몸에 있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묻는 것이냐는 말이다.”
“부, 부인! 아닙니다! 어찌 저희 같은 것들이 감히 그런 불경한 마음을 먹겠습니까.”
화들짝 놀란 시종들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칠부인의 말이 맞긴 했다.
일보관을 위시해 세 보장관들이 모두 달아난 마당에 누가 저택에 남아 있으려 할까.
직책 낮은 평시종들 역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지금 저택에 남아 있는 이들은 모두 다 신영의 문장과 고독을 삼킨 최측근들뿐이었다.
어디로 달아난다 한들 허가 없이 저택에서 멀어지면 곧 죽게 될 것이 뻔하니 울며 겨자 먹기 상태로 저택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전전긍긍하는 그들에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 억지로 남게 된 분한 마음을 어찌 모를까. 하지만 조금만 더 버텨 보자꾸나.”
“……칠, 칠부인.”
“주가는 이런 일로 무너지지 않는다. 수없이 긴 환계의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닌 것을. 우린 이번에도 지켜 낼 수 있을 것이다.”
당황하여 내리깔았던 시선을 시종들이 조심히 들어 올렸다.
“그렇게 되면 신영께서 또 너희를 가장 가까이에 두고 중용하시지 않겠느냐?”
조금의 노기도 보이지 않는 칠부인의 미소에, 시종들이 조용히 눈빛을 교환했다.
그래. 이 문장을 달고서 그들이 어딜 가겠는가.
만약 육문이 받아 준다고 하더라도, 신영의 권세를 업고 호가호위하던 그 생활까지는 결코 보장해 주지는 않을 텐데.
이제 와 천한 일을 하고 싶지도 않으니 어차피 그들에겐 남은 대안이 없는 셈이었다.
“남는 영기들을 모두 가져오라 하였는데, 가져왔느냐.”
시종들이 불손했던 표정을 지우고 냉큼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예. 여기 있는 것들이 전부입니다.”
“주거라.”
가는 손이 시종이 내미는 목함에서 영기 중 하나를 꺼내 손에 쥐었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본 칠부인이 별당을 향해 턱짓했다.
“이것 하나를 제외하고, 나머지로 이 별당 주위로도 영기를 한치 간격으로 세우거라.”
“별당 주변에도요?”
“이들이 정말 신영을 뵈러 온 것인지, 아니면 신영께서 없는 틈을 타 온 것인지. 목적을 정확히 알게 될 때까지는 주의해야 할 것이 아니냐.”
“아! 명에 따르겠습니다!”
시종들의 손이 별당 주변으로도 바쁘게 영기를 설치했다.
누구도 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는 결계가 영기에 의해 생성된 것을 꼼꼼히 확인한 칠 부인이 다시 물었다.
“저택에 남은 모든 시종과 시녀들을 영전 앞에 불러모으라는 것도 다 전했겠지?”
“예, 부인. 모든 전각에 시종을 보냈습니다.”
“그럼 너도 예서 시간을 끌지 말고 영전 앞에 가 서거라. 인원수를 정확히 파악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구해 줄 수 있지. 나도 곧 가마.”
“예, 부인!”
시종과 시녀들이 그녀가 명한 곳으로 달려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칠부인이 고개를 돌렸다.
오래도록 검은 결계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일까. 새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 정원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시종들도 완전히 멀어지고 조금 후엔 조금의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가만히 서 있던 칠부인은 그제야 목함에서 신영의 불이 담긴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