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7화 (207/254)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것을 잊을 수 있었지?

사색이 된 그가 두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후회한다 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일이 꼬이는 바람에 너무 경황이 없었다.

신영의 등극 의식은 실패한 데다 아들이 뿌려 놓은 불신의 씨앗은 금세 주가 혈족들의 틈 사이를 파고 들어갔으니까.

적룡의 영단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적은 그것을 취하고 신수로 발돋움했고.

교룡은 애꿎은 주씨들을 잡아먹더니 생명력을 흡수하는 결계를 영역 전체에 걸쳐 두르지 않나.

아들의 칼에 찔린 상처는 썩어 가기만 할 뿐 조금도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이지 않았던가.

그 와중에 교룡을 주가의 수호 신수로 포장하기까지 해야 했으니.

창백해진 신영이 일단 표정을 수습했다.

“이 모자란 것들! 이곳 영지선이 무너지면 죄 없는 주가 혈족들이 모조리 희생된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이냐! 아니면 네놈들 목숨만 돌보면 된다는 거냐!”

검을 끌어내려던 손을 내리고 허겁지겁 소리쳤다.

“너희의 가족과 친지들이 저놈들의 손에 죽어 나자빠지는 꼴을 볼 셈이냐! 너희가 그러고도 주가의 무사들이냐!”

그래도 무사들이 섣불리 진격하지 못하자 목에 시뻘건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높여 다그쳤다.

“가! 당장 달려가서 저놈들을 죽여! 어떻게든 길을 열어 저년의 목을 따라! 내 신영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이곳에서 제 한 몸 사리는 자는 대대손손 주씨의 보호막 아래에서 영구추방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상황을 언덕 위에서 기가 막힌 얼굴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주상현을 위시한 주가 원로들과 그 휘하의 무사들이었다.

조금 전 도착해, 강변의 대치 상황을 확인한 주상현의 당황한 얼굴이 곧 일그러졌다.

범상치 않은 굉음이 이어진다 했더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어?

맙소사. 어찌 저 많은 무사들의 이동을 보고조차 듣지 못했나.

‘가문의 비보들을 가지고 달아나는 줄로만 알았던 찬탈자가 그래도 제 위치를 알고는 있었구나.’

그는 신영이 주가의 위기를 눈치채고 무사들을 끌고 급히 육문의 군을 막으러 달려온 것이라 오해했다.

상황만 보면 그의 오해가 이상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저 찬탈자의 처리가 문제가 아니다.’

육문이 두 신수로도 모자라 저리 많은 무사들을 끌고 이곳까지 온 이유가 주가의 멸문 말고 뭐가 더 있을까.

주상현에겐 항상 가문의 이익보단 제 이익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그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았다.

지금껏 자신을 지켜 주던 가문이 없어진다면 더 이상 제 이익을 챙길 수도 없어진다는 걸. 그가 경멸해 왔던 천것들과 같은 위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걸.

‘그건 절대 안 돼!’

다행히 모든 원로와 그 휘하의 무사들까지 몽땅 이곳에 있다.

주상현이 소리쳤다.

“모두! 곧장 신영의 무사단과 합류하라! 이대로 육문을 친다!”

함께 이곳까지 달려온 원로들 역시 상황을 파악했다.

원로와 무사들이 일제히 말을 달려 그 속도 그대로 강변으로 달려들었다.

원군의 존재를 확인한 신영의 무사들도 이를 악물었다.

그래. 어차피 이대로 달아난다 한들 저 신영이 고독을 조종해 우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눈을 치뜬 그들이 말을 타고 달려가는 주가군에 합류하며 강변을 넘었다.

육문의 무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 역시 쏟아져 내리듯 강변을 가로지르며 주가군과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챙! 챙!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음도 잠시, 곳곳에서 영력이 터져 나왔다.

콰앙!

마른 땅이 패고 영력의 폭발이 만들어 내는 충격파가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덮쳐 왔다.

곳곳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물러서지 마라! 여기서 물러나면 너희는 더 이상 주씨가 아니다!!”

그 아비규환의 상황을 보며,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신영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그의 발은 한 뼘도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기회를 노리며 주춤주춤 뒤로 빠지고 있었다.

‘더 이상 검이 없다는 게 들통나면 지금껏 고독으로 협박당해 온 저놈들의 살의가 내게로 향할 것이 분명하다.’

“죽여! 하나라도 더 죽여! 저놈들의 목을 베어!!”

살의를 담아 날아오는 공격을 맞아 드느라 신영의 그런 움직임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이가 없었다.

“…….”

하지만 단 한 명의 시선만은 무사들이 뒤엉킨 전투의 현장 속에서도, 신영의 일거수일투족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살기 어린 천령의 눈동자는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기회를 노리며 신영의 곁으로 다가가는 움직임이 비밀스러웠다.

“물러서지 마라! 가장 많이 육문의 놈들의 목을 자른 이에게 주가 소가주의 자리를 주겠다!! 차대 신영의 자리를 내주겠다!”

귀를 의심케 하는 내용이었다.

소가주의 지위까지 들먹이게 된 신영의 급박함에서, 주가의 상황이 얼마나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그걸 듣는 신영의 무사들은 지금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황망하게 느껴졌다.

어쩌다 그들의 신세가 이리되었을까.

신영의 무사라 하면 주가 정예 중의 정예. 긴 번영과 명예가 보장된 자리가 아니었던가.

무슨 잔인한 짓을 저지르건. 어떤 말도 안 되는 짓을 행하건. 신영의 명을 거역하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살아왔건만.

비록 몸속에 고독을 심었다고는 해도, 주가 무사들의 가장 최상층에서 주가의 위상만큼이나 고귀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건만.

그 순간, 그런 신영의 무사들을 향해 숨이 멎을 듯한 압박감이 몰려들어 왔다.

쿵, 쿠웅.

신영의 무사 중 한 명이 떨리는 턱을 들어 올렸다.

거센 바람과 함께 세차게 흩날리는 하얀 예복 자락이 보였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

검 한 번에 일백의 무사의 숨통을 끊고, 홀로 일천의 정예 무사를 죽였다는 사내.

환계를 다스리는 주가의 고개를 꺾은 신수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고 있는데. 이제 그만 주인의 명대로 내게 덤벼들어야 하지 않나.”

“배, 백기-.”

“그 용기마저 칭찬해 줄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콰앙──!!

무사들이 내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폭발음이 강의 한중간을 터뜨렸다.

물살과 흙먼지에 뒤엉킨 채 무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분명 백가의 가전 무기는 활일 텐데도, 그는 길고 예리한 검을 제 수족처럼 흔들었다.

가볍게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신영의 무사들이 바람 앞 촛불처럼 쓰러졌다.

그의 주변으로 붉은 피 웅덩이가 난무했고 지나가는 걸음마다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그럼에도 그의 새하얀 예복엔 핏자국조차 묻지 않았다.

‘저런 사내를 상대로 어떻게 살아 나갈 수 있지?’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고 핏기가 사라진 얼굴이 새하얘졌다.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아.

전쟁 같은 것은 천것들이나 참가하는 것 아니었나? 왜 신영의 무사였던 우리가 이런 꼴이 되어야 하지?

교룡도 두렵고 신영도 더 이상 따르기 싫다.

남겨 둔 재산이고 뭐고. 일단 당장의 목숨을 어떻게든 부지하고 싶었다.

누군가 굳어진 혀를 간신히 움직이며 물었다.

“혹시 저희가 투항하면-.”

목소리를 낸 이가 덜덜 떨리는 제 손을 감추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 혹 저희를 연합의 무사로 받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라?”

“저희는 그간 주인을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을 데리고 육문으로 귀순하겠다 하면 용인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네게 신영의 문장이 새겨져 있나?”

“예?”

“네게 신영의 문장이 있는지를 물었다.”

낮고 침착한 목소리를 들은 무사가 다시금 몸을 떨었다.

영력을 포함했기 때문인지 소리를 높이지 않았음에도 마치 귀 옆에서 속삭이듯 명징하게 전달됐다.

뜻밖의 질문을 받아 망설이던 무사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있, 습니다.”

대답을 들은 백기하가 차게 웃었다.

달이 크던 어느 밤, 뭉그러진 속을 온통 행동으로 내보이며 활을 쏘던 세화의 모습이 그의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결코, 아무도 살려 둘 수 없다는 살의가 그의 어두운 두 눈 안에 번뜩였다.

“그럼 죽어야지.”

“백, 백가주! 그, 그럼 놓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모습을 본 또 다른 주가 무사가 무릎을 꿇었다.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고 환계 변방에서 숨어 살겠습니다. 절대 다시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무사들도 빠르게 검을 내던졌다.

그러면 살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먼저 한 무사를 따라 무릎을 꿇으며 고두했다.

“제발 목숨은 살려 주십시오. 가족들을 데리고 멀리 떠나서 살겠습니다.”

“네. 가족들의 목숨만 보장해 주신다면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모두 투항하겠습니다!”

“뭐라?!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당장 일어나라! 당장 일어서!”

신영이 고함을 질렀으나 무사들은 그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백기하가 있는 쪽으로 고두하며 흙탕물에 머리를 박았다.

그 비참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백기하의 시선 속 온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도 가족들의 목숨만은 살려 달라 했겠지.

그렇게만 해 준다면 뭐든 할 수 있다 했겠지.

‘오 년이나 그녀를 고문하다 못해 주변인들까지 처참하게 살해한 것들이 이제 와 제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살기등등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완벽한 신수로 거듭나고 나서도 그녀는 채 다 삭이지 못한 증오에 휘둘리며 보주의 오염도 개의치 않고 낙뢰를 떨어뜨렸다.

망가진 그녀의 마음이 아직 채 회복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언제든 다시 보주의 오염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녀가 일을 벌일 수 있다는 말이었고.

‘그런 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을까.’

그는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하건 간에 막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다만 그녀가 자칫 증오에 사로잡혀 교룡과 같은 저주를 입는 것만은 염려되었다.

그러니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그녀가 손쓰지 않아도 되도록.

그녀가 더 이상 저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거나 옛 기억을 떠올리지조차 않도록.

‘그 전에 내가 모두 잘라 내 버릴 것이다!’

대답 대신 백기하가 검을 똑바로 들어 올렸다.

길고 풍성한 옷깃을 그대로 흩날리며 서리가 어는 발을 그대로 내디뎠다.

콰앙―!!!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세찬 회오리가 그의 몸에서 솟아올랐다.

거대한 풍압이 주변의 핏물들을 날려 버렸다.

그 힘이 신영의 무사들을 덮치며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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