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6화 (206/254)

* * *

주가의 보고는 문이 활짝 열린 채였다.

와장창! 챙강!

“칠, 칠부인.”

귀를 찢는 파열음이 이어졌다.

그럴수록 차마 보고의 문턱을 넘지 못한 시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울상을 지었다.

보고의 안에서 하얀 손이 귀한 물건들을 뒤엎고 있었다.

거침없는 손길이 장식장들을 쓸어 낼 때마다 무언가가 깨지고 나뒹구는 소음이 연이어 들려왔다.

평소라면 칠부인이 무슨 일을 하든, 시녀들은 감히 부인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고는 또 다른 얘기였다.

“칠부인. 제발 나와 주십시오.”

“칠부인.”

“초상이라도 난 것이냐. 조용히들 하여라.”

“부인. 저희가 경을 칩니다. 계속 이리 보고를 엉망으로 만드시면 저희가 모두 죽습니다.”

칠부인이라 불린 여자가 그리 말하는 이들을 잠시 응시했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너희 모두가 신영과 교룡, 여덟 부인의 공범이지.’

차갑게 뒤돌아선 그녀가 다시금 보고의 서랍 하나를 꺼내 바닥에 엎어 버렸다.

챙! 챙강!

“부인!”

“시끄럽다!”

그렇게 호통치는 목소리는 가쁜 호흡으로 인해 제법 거칠었다.

칠부인이라 불린 여자가 제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얼마나 남은 걸까.’

“너는 보주가 아니니 명조차 길지 않을 거야. 그래도 좋아?”

알 수 있었다.

그간 제 몸을 지배하던 여자를 간신히 떠나보냈지만, 이 몸에 남은 시간은 거의 없었다.

교룡의 악행의 대가를 몸으로 받아 내는 보주들은 보통 십 년도 되지 않아 몸을 바꿔 댔다.

고통을 끌어오는 제약은 보주들의 영혼에 걸려 있었으나, 직접적으로 저주를 받아 내는 몸 역시 쉬이 망가져 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칠부인은 자신의 몸을 이십 년 가까이 사용했으니.

한계까지 쓰인 몸이 당장 고꾸라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빨리 찾아야 해. 언제 이 몸의 숨이 멎을지 몰라.’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신영의 불을 담아 둔 상자였다.

분명 지난번 누군가에게 꺼내 주고 난 이후, 남은 것들을 보고에 넣어 두는 것을 보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장명아…….’

마음이 급해질수록 저를 돌아보던 젊은 사내의 얼굴이 계속해서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자라는 모습을 제대로 보아 주지 못했음에도.

이 두 손으로 안아 주지 못했음에도.

‘어찌 몰라볼 수 있을까, 너를.’

그 모습은 분명 탈피를 마친 모습이었다.

‘인계로 추방당해 탈피도 못 할 줄 알았더니.’

아들을 떠올리는 칠부인의 눈에 뿌연 것이 고여 들었다.

명윤 원로의 아들들과 함께 달아나는 모습을 보았는데.

하면 육문 연합 수장의 부인이 되었다는 여동생을 따라 백가로 가기라도 한 걸까?

‘처음부터 백가의 영지에 숨어 자라 왔을지도.’

안아 주고 싶었다. 뭐든 도와주고 싶었다.

달아나는 모습을 본 다음부턴 계속 안위가 걱정됐고 뭐 하나 위협이 되지 않도록 손을 써 주고 싶었다.

하여 정신이 들고, 신영이 무사들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보고로 달려와 너른 장소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는 중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찾았을까.

문밖에서 계속 그녀를 부르던 시녀가 이번엔 다른 말을 꺼냈다.

“부인. 사강현을 위시한 사씨 일족들이 부인을 뵙고자 찾아왔는데 어찌할까요.”

“왜 내게 묻느냐. 다른 부인들에게 데려가지 않고.”

“그게…….”

시녀들의 울상이 된 모습에서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다른 부인들은 저주의 고통을 받아 내느라 정신이 없나 보군.’

영혼이 사라지기 전 칠부인은 그녀에게 교룡의 저주를 너도 겪을지 모른다고 경고했었으나.

보주의 영혼이 사라지고 나자 그녀의 몸엔 더 이상의 저주가 찾아오지 않았다.

그때 드디어 신영의 불이 담긴 목함이 눈에 들었다.

‘찾았다!’

그녀의 손이 성급히 목함을 품 안에 끌어당겼다.

“부인. 정말 만나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영께서는 출타하시고 다른 부인들께서도 아무도 나와 보시지 않아 저택이 아주 엉망입니다.”

그 말을 듣는 칠부인의 붉은 입술 사이로 차가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사강현을 비롯한 사씨 일족들?’

그들은 지금껏 가장 먼저 신영에게 몸 바꾸기를 위해 적당한 몸뚱이를 바쳐 오던 이들이었다.

“그래. 데려와 보거라.”

만나자꾸나. 만나야지. 데리고 오거라.

엉망이 된 보고 안에서 목함 하나를 들고 일어선 칠부인의 눈이 맹렬히 타올랐다.

* * *

쿵. 쿠웅.

상자째 삼켜 버린 영기들이 교룡의 몸속에서 무서운 속도로 반응했다.

주위의 영력들을 맹렬히 흡수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의 이어짐이 마치 낙숫물과 같았다면 지금은 폭포 아래에 서 있는 듯 새로운 세상으로의 길이 열렸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주세화 네년이 내 앞에서 그리 잘난 척을 늘어놓을 수 있었구나.’

제 앞에서 발칙하게 입을 놀릴 때만 해도 육문의 무사들을 의식하여 허풍을 떤 것은 아닌가 싶었는데.

‘그런 게 아니었어!’

썩어 가던 비늘 하나하나에 생명력이 들어차기 시작하자, 거대한 기쁨에 머리가 이상해질 것만 같았다.

‘드디어 이날이 오는구나! 이제껏 있었던 모든 끔찍한 시간들은 바로 지금을 위해 존재했던 거였어!’

울고 싶기도 하고 웃고 싶기도 했다. 마음껏 소리치고 싶기도 했다.

“넌 신수가 아니잖아.”

“신수들 일은 신수들끼리 알아서 할 테니 넌 잘난 척 좀 그만하지 그래.”

저런 어린것에게 이따위 비참한 말을 듣지 않아도 되도록.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얕볼 수 없도록.

어떻게든 신수가 되어. 그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고 싶었다. 새로운 지평선을 반드시 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거세게 치밀어 오르는 환희를 애써 진정시키며 교룡이 기둥처럼 저를 둘러싼 힘의 파동 안에서 얌전히 몸을 말았다.

태아처럼 안착하며 다시 태어나는 기적을 누리기 위해 눈을 감던 그 순간이었다.

뭔가가 시작됐다.

시작은 아주 작은 파동이었다.

온몸을 감싸는 고양감 사이로, 미세한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찾아왔다.

너무 작아 곧바로 느끼지 못했다.

하나 따끔거리며 그를 자극하던 통증은 빠르게 더 크고 깊어져 갔다.

그와 동시에 흘러 들어오던 영력이 줄어들었다.

교룡의 시붉은 눈동자가 번뜩 뜨였다.

뭐냐. 대체 누가. 누가 신수가 탄생하는 이 순간을 방해할 수 있단 말이냐!

“!!”

그런 교룡의 눈이, 의식을 잃고 늘어진 일부인의 손을 잡고 선 어린것에게 닿고 크게 뜨였다.

‘너, 너!’

어린것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일부인을 치료하고 있었다.

파괴된 근원을 고치고 흩어진 영력을 모아 그 너덜너덜한 몸 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근원을 고쳐?

그럴수록 교룡의 몸을 감싸던 빛이 깜빡깜빡 흐려졌다.

‘안 돼. 안 돼!!’

어린것이 발하는 치유의 빛이 강해질수록 그에게 흘러들던 영력이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아주 적은 양만이 흘러들어오다가 이내 그것마저 멈춰 버렸다.

흩어지는 영력을 붙잡으려 영기를 더욱 맹렬히 돌렸으나 역부족이었다.

-너, 네년! 네년!

“왜 그런 얼굴이지? 내가 지금 어미를 어미 취급하지 않는 너 대신 효도를 해 주고 있건만 감사하지 않고.”

-주세화!!!!

“그래. 너도 느꼈다시피,”

세화가 두 눈을 휘며 웃었다.

“신수가 되는 건 네가 아니라, 네 어미일 것이다.”

챙강! 챙!

그 말과 동시에 그를 지키던 빛의 기둥에 금이 생겼다.

부족한 영력을 채우지 못하고, 쩌억쩌억 소리를 내며 갈라지고 있었다.

그 순간 작은 통증들이 그의 몸 곳곳에 퍼져 갔지만, 그 통증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챌 정신이 없었다.

아찔한 분노로 눈이 먼저 돌았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었다. 이럴 수는 없어!!

저 발칙한 년. 네까짓 게 감히 내게서 신수의 자격을 가져가겠다고? 그 자격을 저년에게 주겠다고?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

고막을 터뜨릴 듯한 사자후를 뿜어낸 교룡이 소리쳤다.

-죽여라! 주가의 무사들아! 저년을 죽여! 지금 당장 저년들을 죽여!!

신영 또한 그 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

‘이런 미친! 저 모자란 것! 등신 같은 것!’

영단을 그만큼 처먹었으면서도. 그 수많은 영기들을 다 처먹고도 신수가 되는 데 실패한다고?

‘안 돼. 교룡이 저리 무너지고 나면. 난 몸도 바꾸지 못하고 이대로 죽어야―.’

교룡이 주세화에게 목이 따일 경우 일어날 끔찍한 결과에 벌써부터 눈앞이 아찔해지는 듯했다.

그도 교룡을 따라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죽여라! 누구라도 주세화 저년을 죽여! 가라! 모두 뛰어들어!”

환족의 전투는 무사의 수와는 관계없이, 오직 영력의 차이에 의해서만 승패가 갈렸다.

아무리 잘 단련된 체술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순도 높은 영력을 지닌 무사 하나에게 천 명이 몰살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중 주가가 가장 오래 환계를 틀어쥘 수 있었던 것은 주가 혈족들의 영력이 칠문이 가진 영력 중 가장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신수의 등장 전까지였다.

“오거라.”

살기 어린 눈으로 시리게 웃은 백기하가 검을 빼 든 채 걸어 나왔다.

새하얀 영력이 백기하의 주위로 휘몰아치고 있었고.

누구든 저 교룡과의 싸움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명확했다.

파삭!

그의 발걸음마다 주위에 얼음이 얼었다.

마른침을 삼킨 주가의 무사들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두려움에 주춤 뒤로 물러섰다.

지난 전쟁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그들이 몇백, 몇천이 달려든다 한들 저 신수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걸.

그 모습을 본 신영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이 머저리 같은 것들! 어서 덤벼들어! 내 말이 안 들리는 거냐! 어서 너희의 목숨으로 길을 열어!!!”

그 목소리에 신영의 무사들 사이로 짙은 살기가 돌았다.

백기하가 아니라 자신들을 이끌고 온 저 신영을 향해.

아비를 죽이고 자리를 찬탈했다는 저 소가주에게 무슨 정통성이 있다고 저리 자신들을 사지로 몰려 하는가.

이곳까지 따라온 것도 그저 신영의 저택에 들어갈 때 몸속에 박아 넣은 고독 때문이었다.

명을 따르지 않아도 죽을 거란 공포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끌고 온 것이다.

무사들의 그런 원망과 살기 어린 시선을 느끼지 못할 신영이 아니었다.

‘이 미친것들이. 네까짓 것들까지 감히 날 거역해?’

피가 흐를 정도로 이를 사리문 신영이 비열한 웃음을 흘렸다.

‘오냐. 원한다면 내 여기서 본보기를 보여 주마. 그때 가서 절망하며 후회하지나 말아라!’

그렇게 아들을 죽이며 얻어 낸 신영의 검을 꺼내기 위해 힘을 끌어 올렸다.

인장 찍힌 무사들을 강제하거나 고독을 조종하는 등. 식이 망쳐지며 완벽한 신영으로 등극하지 못한 그에게 신영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건 오직 그 검밖에 없었으니까.

그의 손 위에서 붉은 영력이 휘몰아쳤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검이 나타나지 않았다.

‘뭐지?’

다시 한번 더 힘을 끌어 올렸다.

“…….”

하지만 여전히 검은 나타나지 않았다.

‘뭐, 뭐지?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대체 왜 검이 나타나지 않는 거야! 분명 내가 그때 그놈을 죽이고 분명 검을 빼앗았-.’

그리고 생각이 났다.

아들의 칼이 허리께에 와 박히던 순간, 떨어뜨렸던 검을.

제어자가 사라지던 순간. 봉인이 풀린 적룡의 영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파열되어 버린 새하얀 검신을.

“…….”

저놈들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검이 필요한데.

강제로 목숨이라도 걸라며 백기하의 앞으로 내몰기 위해서는 반드시 검이 필요한데.

신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 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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