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슬 같은 세화의 목소리가 맑게 이어졌다.
“이렇듯 막대한 영력을 담아 놓으면 분명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질 거야.”
“그렇게 되면 이 영력이 일부인을 과연 어떻게 만들려나. 이 영력을 품은 교룡은 또 어떻게 되려나.”
그 말을 듣던 순간의 즐거움을 기억한 영채의 눈매가 사납게 휘어졌다.
저 일부인은 제가 감정을 잘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제 아가씨 대신 주가 연회에 많이 방문해 본 영채는 속지 않았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저 모습은 주가 연회에서 보았던 이들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감히 이런 상황에서까지 욕심을 못 버리고 수작을 부려?’
그런 영채를 확인하는 백기하의 시선 역시도 낮게 가라앉았다.
입술을 사리물었으나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댄 왜 늘 위험한 곳에서 그렇게 혼자 달려가는 걸까?’
일부인에게 영력을 넘긴다는 말은 저 영력이 분명 교룡에게까지 흘러가기를 원하는 것일 터.
“…….”
‘어쩔 수 없지.’
뼈대가 굵고 커다란 그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얼음 방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의 주인이 원하는 게 있다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내 사명이니.
얼음 방벽이 위에서부터 녹아내리듯 사라져 갔다.
무사들과 백기하, 사영채, 그리고 영력에 휩싸인 일부인의 앞에 교룡과 세화의 전투가 그대로 드러났다.
허공을 가득 메운 만 개의 낙뢰가 세화 하나를 표적으로 삼아 세상을 부술 듯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콰과과과광!!!
엄청난 풍압이 밀려들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무사들 몇이 세찬 바람에 뒤로 밀려날 때였다.
결계가 사라지며 보주와 교룡의 감각이 일직선으로 연결됐다.
“!!!”
사기로 범벅된 교룡의 새빨간 눈동자가 단번에 제 보주를 향해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교룡의 몸 안으로 뭔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어떤 충만한 감각에 교룡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게. 뭐지?’
이해하지 못할 기현상에 눈을 깜빡였다.
그는 고작해야 나뭇가지 하나를 든 어린 년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아직 승리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그에겐 지금껏 살아온 시간 동안 마구잡이로 흡수해 온 까마득한 영력이 있었으니까.
영력만으로 신수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실 신수가 되는 데는 막대한 영력 외에도 뭔가가 더 필요했다.
비참하게도, 이 긴 세월 동안 교룡은 신수가 되는데 필요한 그 마지막 한 가지가 뭔지를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어렴풋이 어떤 강렬한 감정이라는 막연한 기준은 알아내었다.
그럴수록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보다 더 강렬한 감정을 가지라는 거지?’
신수가 되고 싶다는, 그 바람 하나만은 산이라도 갈라 낼 수 있을 듯 절실하건만!
어찌하여 하늘은 내게 이리 야속한 것인가.
대체 왜 내겐 길을 열어 주시지 않는 것인가!!
하여 그는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곁에 있는 이들의 끝을 모르는 탐욕과 진한 욕망을 채워 주었다.
까마득한 괴로움과 고통, 미칠듯한 두려움을 강제로 부여해 사기를 흡수하며 부족한 제 조건을 채우려 애썼다.
오히려 그것이 통했다.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만. 그들의 절망과 욕망, 탐욕은 교룡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몇 년만 있으면 그도 신수였다. 그토록 바라던 신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몸에 갑자기 뭔가가 흘러들었다.
‘이게 대체…… 뭐지?’
교룡이 몸을 떨었다.
완전히 새로운 영력. 새로운 힘.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머릿속이 들끓었다.
직감한 것이다.
이전과는 완벽히 다른.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이거라면 몇 년의 시간 없이도, 마지막 한 가지 열쇠가 없어도 나를 그곳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순간 그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얼음벽이 무너져 내렸다.
오색의 빛에 감싸인 제 보주를 교룡은 곧바로 발견했다.
빛에 감싸인 일부인의 표정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곳으로 밀려 올라가는 환희가 그녀의 얼굴 위에 충만했다.
‘안 돼!!’
교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여자를 놓아줄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더럽고 추한 것. 천한 것! 너 같은 것을 낳았다는 사실이 끔찍해! 죽일 수만 있다면 죽였을 거야. 꼴도 보기 싫은 그 얼굴의 거죽을 벗겨 내 벌써 몇 번이고 죽였을 거야!”
“넌 내 아들이잖아. 엄마라고 불러야지.”
“신수가 되어 내 복수를 하는 것. 네게 그것 말고도 쓸모가 있던가? 더러운 반편이 주제에. 세상 쓸모없는 오물 덩어리 주제에!”
주가 권력자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 친지 친구들을 모조리 살해하여 영력을 빨아먹은 여자.
그렇게 만들어 낸 외모를 가지고 주가로 향했지만 별 소득이 없자, 또다시 닥치는 대로 환족들을 잡아먹다 덜미가 잡혀 몰락한 여자.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신수의 어머니라도 되겠다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만들어 내고.
누군가를 잡아먹고 영력을 키우는 방법 외에는 어떤 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여자.
목적을 위해 자신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업화가 절절 끓는 연옥에 처넣었던 저 여자를 어떻게 용서하겠는가.
내가 지옥에서 사는 한 너 또한 그래야 한다고.
그것이 나를 이 끔찍한 곳에 쳐넣은 네 죗값이라고.
그런 의미로 제 저주를 받아 내는 보주의 역할을 억지로 이어 가게 해 왔다.
하지만 지금 그 역할이 깨지려 하고 있었다.
세로로 바짝 갈라진 교룡의 새빨간 동공이 흔들렸다.
보주가 아니게 된 저 여자가 신수로까지 거듭날지 모른다고?
‘너 따위가 함께 신수가 되어 또다시 날 지배하겠다고?’
‘절대로.’
어린 년이 신수가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보다 눈앞이 더 맹렬히 타올랐다.
세차게 이를 사리문 교룡이 단번에 뛰쳐나갔다.
‘절대로 그렇게 둘 순 없어!’
어찌한 일인지 어린 년은 몸을 피해 길을 터줄 뿐 그를 조금도 막아서지 않았다.
오히려 오묘한 미소를 띤 채였으나 그것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신수가 되는 데 필요한 그 영력도, 끝 모를 고통을 네게 안기는 역할도.’
언덕에 가까워진 교룡이 입을 크게 벌렸다.
‘모두 내 것이다.’
결코 벗어날 수 없어, 넌.
한계까지 벌어졌던 날카로운 이빨이 닫혀 들었다.
“!!!”
환희에 들떠 있던 일부인이 척추를 조각내는 듯한 끔찍한 고통에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입을 벌렸다.
* * *
“두 분! 두 분 같이 가시죠! 같이!”
‘아니, 우리 가모님의 오라버니들께선 ‘함께’라는 단어를 모르시는 건가? 어찌 두 분이서만 저리 앞서가시는가.’
정신없이 말을 달리면서도 뒤따르는 무사들을 챙겨야 할 의무가 있는 백만용이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선두를 향해 소리쳤으나.
‘진짜 너무하시는군. 어찌 저리 뉘 집 개가 짖냐는 식으로 내 목소리를 모두 무시하실까.’
가장 앞서 달려나가는 주가윤, 주가한 두 형제는 한 번 뒤를 돌아보지조차 않았다.
물론 그들의 귀에도 백가 재상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다. 하지만.
“네? 왜 가모라 부르냐니. 두 분께선 우리 백주천장강진 가모님께서 운용하시는 백가의 힘을 아직 보신 적 없으십니까. 백가의 가모가 되시기 위해 태어나신 백주천장강진 가모님을 백주천장강진 가모님이라 부르지 못한다면 대체 뭐라 부르란 말입니까.”
“하하하, 혼인이요? 우리 백주천장강진 가모님께서는 하늘이 내려 주신 백가의 가모님이신데, 그깟 틀에 얽매인 격식이 없었다는 게 무에 그리 큰 흠이라고요.”
이따위 말만 하는 작자를 어찌 상종할 수 있을까.
그래도 세화의 오라버니들이라고 백만용은 그들을 직접 챙기고 신경 썼지만, 오히려 그게 독이 되었다.
두 형제가 이 백가 재상이란 자에게 학을 떼기까지는 백만용의 입이 처음 열리던 순간부터 일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여 이미 형제는 죽을 때까지 저 빌어먹을 망할 재상 놈을 지독할 정도로 철저히 무시하겠다 맹세한 뒤였다.
그렇게 계속 대답 없는 메아리를 만들어 내는 백만용의 뒤로, 새하얀 무복을 입은 만여명의 육문 연합 무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육문 연합이 구성한 이진, 후발대였다.
그러던 중, 선두를 달리던 두 형제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어딘가를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백만용이 눈을 옮기니 저 먼 곳에서 대규모의 한 무리가 이쪽으로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누구지?
안력을 높인 백만용이 주명윤을 확인하기도 전에 주씨 형제들이 제 부모님을 먼저 발견했다.
“아버지! 어머니!!”
그들이 곧장 새로 만난 일행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백만용 역시 빠르게 달리는 군을 잠시 멈추고 그들과 합류했다.
한데 그때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이 채 상봉의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그때.
콰앙!! 콰과과과광!!
세상을 찢어낼 듯한 굉음과 함께 땅이 요동쳤다.
히이이이잉!!
놀란 말들이 앞발을 치켜들고 날뛰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킨 이들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저게…….”
알 수 없는 기현상을 목격한 눈들이 좁혀들었다.
먼 곳에서, 무언가가 일직선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오색으로 빛나는 빛의 기둥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껏 세차게 울리던 전투의 굉음이 사라져 버렸다.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직감한 이들이 순식간에 말머리를 한곳으로 모았다.
“이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그들 사이에서 더 이상의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