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3화 (203/254)

* * *

“내 영단을 달라고?”

“그래. 신수의 영단이라면 교룡의 제약을 풀 수 있을지 모르잖아.”

“널 어떻게 믿지? 영력만 취하려는 속셈이 아니라는걸.”

일부인의 눈이 흘끗 얼음 방벽으로 향했다.

두터운 하얀 얼음들에 가려져 결계 바깥의 상황은 보이지 않았으나 결계로도 막지 못한 굉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놈이 잘하고 있나 보군.’

백기하를 마주하는 두려움 안쪽으로 일부인의 눈이 붉게 빛났다.

이 백가 사내가 이리 다급하게 여기까지 달려올 만한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날 당장 죽여야 할 정도로 시간이 없는 거야. 같이 다니는 그 가모라는 년이 위험할지도.’

완전히 잘못짚은 추측이었으나 그것을 일부인이 알 리가 없었다.

그녀는 다만 백기하의 이런 다급함이 교룡의 힘에 몰린 세화가 승기를 잃고 있기 때문이라고 여겼을 뿐.

그랬기에 그녀도 제법 의기양양해졌다.

‘어떻게 믿냐고? 믿지 못하면 어쩔 거야. 네게 남은 다른 수가 있기라도 해? 빨리하지 않으면 바깥에서 그년이 죽을 텐데?’

두려운 척 몸을 떨면서도 일부인이 눈을 휘었다.

‘이대로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다가 바깥에서 전황이 악화되는 소리라도 나면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지겠지. 그때 영단을 얼마나 내놓든 부족하다고 계속 말하면 급한 마음에 계속해서 내놓지 않겠어?’

계산을 마친 그녀가 애처로운 표정을 꾸며 내며 백기하를 향해 말했다.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죽고 싶어 하는지. 그런 상황에서 영력 따위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말하고 싶어. 말할 수 있다면 벌써 뭐든 말했을 거야.”

일부인이 잔뜩 흔들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그러니 제발 내가 이 제약을 깰 수 있게 도와줘. 맹세할게. 제약이 깨지기만 하면 뭐든 협조하겠다고.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정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나?”

“!”

“할 수 있어? 그럼 나도 널 믿도록 하지.”

“당, 당연하지! 당연하지. 정말 할 수 있어. 발을 핥으라고 해도 그렇게 할 거고 교룡을 끌어들이라고 해도 무슨 수를 써서건 그렇게-.”

“그딴 건 필요 없어.”

백기하가 팽개치듯 일부인의 턱을 놓고 일어났다.

그녀를 시리도록 냉랭하게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그 어떤 귀한 옥으로도 흉내 낼 수 없을 청명한 푸른색이었다.

눈처럼 새하얀 영력이 남자의 너른 어깨 위로 해무처럼 흐르고 있었다.

범접하기 어려운 위압감 사이로, 눈을 홀릴 듯이 수려한 외모를 목격한 일부인이 잠시 제 상황조차 잊고 멍하니 굳어졌을 때였다.

“지금 내 권속이 되도록 해.”

“……뭐?”

“못 들었나? 아직 귀를 찢어 놓진 않았는데?”

‘마, 맙소사. 지금 뭐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방법에 일부인이 기겁했을 때였다.

백기하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마치 너의 의사 따윈 처음부터 고려치 않았다는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 새하얀 영력이 들어찼다.

“안, 안 돼! 안 돼!!!”

그것이 저를 향해 뻗어 오자 일부인이 경기하듯 뒤로 황급히 물러났다.

“뭐가 안 된다는 거지?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거잖아. 꼭 영단의 형태로 줄 필요가 있나? 어떤 형태로든 영력을 주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 하지만! 난 이미 교룡과 연결되어 제약이 걸려 있어! 두 신수가 연결되면 내가 못 견딜지도 모르고-.”

“그것조차 네가 바라는 바 아닌가? 만약 신수의 영력이 뒤섞이는 걸 견디지 못하고 몸이 찢어져 죽기라도 한다면 기뻐해야지.”

“안 죽고 영원히 고통 속에 살게 된다면 어찌할 건데!”

“알 바 아냐.”

“백기하!”

“너 따위에게 내 이름을 허락한 적 없다.”

이 순간에도 그들의 시야를 가로막은 얼음 방벽 바깥에서는 굉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세화가 교룡을 몰아붙이는 소리였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고.

시간이 없다 여긴 백기하가 앉은 채로 뒤로 물러서는 일부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일부인이 악을 썼다.

“이런 걸로 제약이 깨지지 않으면!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네가 교룡의 힘보다 강한 신수의 영력이 있다면 될 것 같다 하지 않았나? 안심해.”

달아나는 일부인을 잡아 끌어당긴 백기하가 잔인하게 웃었다.

“교룡의 제약이 끊어지든, 네 몸이 터져 나가든. 그때까지 쉴 새 없이 영력을 불어넣어 줄 테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이마를 누르는 백기하의 손끝 감촉을 느낀 일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악!”

그때였다.

“가주! 백가주! 백가주께서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가주!”

“!”

언덕 아래에서 영채가 구르듯이 뛰어 올라오며 소리쳤다.

다른 이의 목소리라면 들리지 않았겠으나 저리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세화가 목숨처럼 아끼는 시녀였다.

눈앞의 여자를 어떻게든 당장 죽이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돌아 있던 백기하도 그 목소리를 따라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말의 내용이 이상했다.

그러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영채가 허겁지겁 가파른 언덕 끝까지 빠른 속도로 뛰어 올라왔다.

그러고는 거친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품 안에서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꺼내 놓았다.

내용물을 감싼 천을 풀자, 신비로운 오색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봐도 신수의 영단이었다.

그것도 세화의 영단.

“이걸 사용하시면 됩니다, 백가주.”

“…….”

백기하의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이 일순 영채를 향했다.

‘지금 그녀의 영단을 이 여자에게 사용하겠다고?’

이 여자가 흡수하는 영력은 교룡에게까지 이어질지 모르는데?

다른 이였다면 의도를 의심하며 당장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녀는 결코 세화에게 해가 될 일을 할 여자가 아니야.’

그가 영채를 믿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세화가 이 시녀들을 믿기 때문에 하는 얘기였지만.

아니나 다를까.

오색의 영단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홀린 채 바라보는 일부인의 뒤에서 영채가 백기하를 향해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인의 멱살을 쓰레기 버리듯 털어 낸 백기하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한 발 뒤로 물러난 자리를 영채가 채웠다.

일부인이 시선을 영단에 고정한 채 물었다.

“정, 정말로 이걸 내가 흡수해도 돼?”

“그럼.”

“정말로?”

“자. 빨리 받아.”

영채가 영단을 아예 손수건째 일부인의 손에 넘겼다.

일부인은 여전히 제 손에 놓인 영단을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시간이 없단 말 못 들었어? 이딴 식으로 흡수하지 않고 미적거릴 거면 도로 내놔.”

“아, 아냐!! 할 거야!!”

영채가 영단을 다시 가져가려 하자 화들짝 놀란 일부인이 황급히 그것을 끌어안았다.

제가 요구하긴 했으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빨리, 이런 영단을 손에 쥘 수 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영단은 손에 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힘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신수의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지, 진짜 신수의 영단이야. 게다가 이 방대한 영력이라니! 이거라면 내 제약도 깰 수 있을지 몰라!’

그녀가 오랜 기간에 걸쳐 알아낸 교룡과 보주가 제약을 깨는 방법은 아주 원칙적이고 간단했다.

찰나라도 좋으니 보주가 교룡보다 강한 힘을 가지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교룡은 더 이상 그녀를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저주의 사슬을 끊어 낼 수 있다니.’

이제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생을 끝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잠깐.’

감격하던 일부인의 몸이 순간 멈칫했다.

……교룡과 연결이 끊어진다면.

‘내가 죽을 이유가 있나?’

문득 든 생각에 일부인의 두 눈에 빛이 맴돌았다.

누가 봐도 신수의 것이 분명한, 거기다 아주 강대한 영력을 담은 듯한 이 영단을 모두 흡수한다면.

‘내가 신수가 될 수도 있을 텐데?’

……맙소사.

그 생각을 하니 너무 떨려 호흡이 가쁘고 바싹 침이 마를 정도였다.

물론 죽고 싶기야 했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교룡의 저주를 대신 받아 내는 보주가 되어 영원히 끊이지 않을 고통 속에 내던져진 탓에 그런 것이지.

‘그 고통이 없다면 미쳤다고 산목숨을 일부러 끊을까.’

거기다 그냥 끊어 내는 것뿐만이 아니라 신수가 될 수 있다면.

교룡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상위의 존재로 탈바꿈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내게 조금이라도 해를 끼쳤던 것들을 모조리 물어 죽이고, 나 홀로 영원토록 복락을 누릴 테다!’

더 이상 감정을 감추지 못한 그녀가 단번에 그것을 입안에 넣어 버렸다.

영단이 제 기운을 풀어내며 빠르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모자란 것들. 지가 처먹어도 모자랄 이런 귀물을 내게 넘기고.’

일부인의 입가로 아무도 모르게 비릿한 웃음이 조금 새어 나왔다.

휘오오오!

그런 일부인의 주위로 오색의 영력이 몰아쳤다.

영력이 차오를수록 일부인의 얼굴에 희열이 감돌았다.

그 모습을 백기하가 가늘게 좁힌 눈으로 응시하다가 영채를 바라봤다.

영채는 즐거운 시선으로 일부인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걸 받아.”

그러니까 그건 영채가 전장에 따라가겠다고 세화에게 애원해 허락을 따낸 이후였다.

세화는 영채에게 손수건에 감싼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아가씨?”

“내 영단이야.”

“예?! 맙소사,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깜짝 놀란 영채가 손을 내저었다.

아가씨는 교룡을 상대하셔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더 영력이 필요하신 분께서 어찌 이런 걸 내게 주시나.

세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게 주는 게 아니야. 틈을 봐서 그 일부인에게 건네.”

“예?”

“자연스럽게. 마치 흘린 것처럼 해서 그 여자가 줍거나 훔쳐 갈 수 있게. 무슨 말인지 알지?”

“하지만 왜, 왜요? 어째서 그 여자에게 이런 귀한 걸.”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세화가 영채의 손 위에 올려진 영단을 한 손가락으로 눌러 굴리며 대답했다.

“내 이 오색 영력에 당했던 이들은 다 뭔가가 이상했단 말이야?”

“……어떻게 이상한데요?”

“오부인은 죽었고, 주경현의 혼이 담긴 채 만난 신영의 몸 역시도 만신창이였지. 그 어떤 약도 아끼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이들이 말이야. 그래서 추측해 봤지.”

나비 날개처럼 여리고 아름다운 속눈썹 아래로, 음영 진 눈동자가 반짝 빛을 냈다.

“그게 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뭔가가 고정되는 것 같다고. 상처든, 고통이든 뭐든. 그러니 교룡의 저주가 이어지는 일부인의 몸을 이 영력으로 완전히 고정해 버리면 어떨까?”

그녀의 눈매가 즐겁게 접혀 들었다.

“교룡과 연결된 일부인인 만큼 이 영력은 분명 교룡에게도 흘러 들어갈 텐데. 그러면 교룡에게는 무슨 효과가 날지, 영채 너도 궁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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