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을 동그랗게 뜬 일부인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가 그녀의 머리채를 다시 세차게 잡아 끌어 올렸다.
고통스러운 자세로 허리가 들린 일부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백기하는 가차 없었다.
“너도 신수의 소원이란 게 뭔지 정도는 알고 있겠지?”
손가락 사이로 단단하게 틀어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계까지 잡아당기며 이를 갈 듯 경고했다.
“그러니 말해. 당장.”
“가, 가주!”
“그걸 사용해 널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 버리기 전에!”
그런 가주의 모습은 거기 있는 모든 이들이 단연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어떤 전장에서도 도의와 예의를 잊지 않았던 가주가 크지도 않은 체구의 여인을 저리 맹렬히 핍박하다니.
하지만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얼굴로 맹렬한 살기를 내뿜는 가주의 모습은 너무 뜻밖이라 누구도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저…… 적.”
고통 속에서 일부인이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적룡의, 영단이 필요하다고 분명-.”
“개수작 부리지 마. 그것뿐일 리가 없잖아.”
“윽…… 컥! 커억!”
주위에 있던 이들이 모두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백기하의 바로 옆에서 온전히 그 살기를 받아 낸 일부인이 숨도 쉬지 못하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가 이를 갈 듯 말했다.
“적룡의 영단은 쭉 신영 손에 있었지. 그 교룡이 제 목숨을 그의 손에 맡겨 둔다고? 그리 오래 보아 왔으니 신영이 어떤 성격인지는 우리보다 더 잘 알 텐데?”
“몰, 몰라. 난 몰라. 난 적룡의 영단밖에-.”
쩌적.
백기하의 분노에 일부인의 주위에 있던 땅이 파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살기는 기세만으로도 일부인의 몸을 난자하는 듯했다.
“아악!!”
어마어마한 고통에 일부인이 다시금 경련하듯 땅을 뒹굴었다.
“말할 생각이 없나 보군. 좋아. 그리도 아들이 보고 싶은가 본데, 직접 마주하게 해 주지.”
“!!”
몸을 일으킨 백기하가 그대로 일부인을 결계를 향해 질질 끌고 갔다.
“정말이야. 지, 진짜야! 정말이라고! 몰라, 그것 외엔 모른단 말야!!”
백가의 여인들은 내원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고 오직 집안의 내실을 다지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을 만큼 부드럽고 가녀린 이들이 많았다.
그런 만큼 백가 혈족들은 여인들을 절대 가혹하게 다루는 경우가 없었다.
하여 혈족들은 제 가주가 작은 체구의 여인을 땅에 몇 번이고 땅에 처박다 못해 노예처럼 질질 끌고 가는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가, 가주! 무,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제게….”
그 처참한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무사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이곳엔 백가 무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육문의 무사들이 모두 차출되어 모여 있는 자리인데.
‘이런 모습을 보이셨다가 수장의 자질에 대해 의심하는 이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백기하에게 더 다가가지 못했다.
“……가, 가주.”
바짝 위로 치솟은 새까만 눈썹 아래로, 짙푸른 눈동자가 색마저 바랠 듯한 절절 끓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까마득한 절망과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베일 듯한 날카로운 예기가 그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마치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것이 저 일부인이 아니라 가주 본인인 것 마냥.
“…….”
처음 보는 백기하의 모습에 무사가 다가섰던 걸음을 다시 뒤로 물렸다.
그 이후로는 그가 여전히 일부인을 질질 끌며 달리듯 걸어가는데도 아무도 감히 그를 부르거나 제지하지 못했다.
결계와 무사들의 진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일부인을 데려온 그가 그녀를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정면을 손으로 가리켰다.
언덕을 가리고 있는 결계 밖에서는 채 다 지워 내지 못한 굉음이 전달되는 중이었다.
저 소리가 무얼 뜻하는지 일부인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가 결계를 거두면 저 교룡이 널 발견하겠지.”
“!”
“저 교룡은 널 잡으러 여기까지 온 것이 분명하니까.”
그것이 정말로 겁이 나는지 일부인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러고 싶지 않으면 말해. 어떻게 해야 널 죽일 수 있는지.”
“적, 적룡의-.”
“그건 쓸 수 없다고 했지. 그러니 다른 방법을 더 생각해!”
“아악!”
한기로 점철된 날카로운 살기가 다시금 칼날처럼 그녀의 몸 곳곳에 박혔다.
교룡의 저주를 대신 받고 있을 때만큼이나 끔찍한 고통이 일부인을 괴롭혔다.
“목!”
그녀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친 순간 일시적으로 살기가 옅어지며 그녀의 숨통을 열었다.
“좋아. 목, 그 다음은?”
“!”
제가 무슨 단어를 꺼내 놓았는지 자각한 일부인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모, 몰라. 몰라. 그 외엔 정말 몰라.”
“아직도 계산할 시간이 필요한가? 아니면 내가 널 교룡에게 넘기지 못할 거라 여기는 건가?”
백기하가 으스러뜨릴 듯 강하게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턱뼈가 그대로 뜯겨 나가는 듯했다.
“당장 뒷말을 실토하지 않으면 여기서 네년의 살점을 바르고 멈추지 않는 심장을 꺼내 삼킬 거다.”
짐승의 눈동자를 빛내는 백기하가 이를 드러냈다.
“그러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지? 아니. 결코, 그럴 수 없을 거야. 신수의 소원을 사용할 테니. 네년은 제 몸뚱이에서 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발라지는 동안 결코 죽지 못하고 눈을 뜨고 있어야 할 거야.”
‘아, 안 돼!’
이건 진심이었다.
이 사내는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걸, 본능이 쉬지 않고 경고를 울렸다.
육문의 수장이라는 지위도, 백가의 자랑이자 상징인 신수라는 위치도, 지금 이 사내에겐 조금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그, 그렇다면.”
그녀가 틀어 잡힌 턱 사이로 통증이 이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이며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신, 신수의 영력이 있다면 될지도 몰라. 교룡의 힘을 이겨 낼 수 있을 만큼의 영단.”
그녀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게 두려운 푸른 안광을 피해 눈을 감으며 물었다.
“적룡의 영력을 달라고는 안 할게. 그러니 당신의 영력. 그걸 지금 내게 줄 수 있겠어?”
* * *
수백의 말발굽 소리가 거침없이 울려 퍼졌다.
주명윤을 따라 달리는 주가 원로 주자윤은 말이 없었다.
‘나와 같은 상황을 겪은 이들이 이렇게 많았을 줄이야.’
주명윤의 말을 아직 완벽히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한 모든 말들이 상황과 이치에 맞게 돌아가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건 비단 주자윤 뿐만이 아니었다. 주명윤에게 새로 설명을 들은 모두가 그랬다.
하여 일행이 주가 영지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도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런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여 또 한 번 말을 잃었다.
굳이 인계로 가는 통로가 있는 초소로 가야 한다고 하여 이유가 궁금했는데.
“이, 이들은 대체 다 무슨…….”
그곳엔 한눈에 보기에도 근원이 파괴되어 한 줌의 영단에 의지해 문을 넘어온 범죄자들이 가득했다.
주자윤이 주명윤을 향해 무섭게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이런 범죄자들을 영단까지 먹여 가며 데려오다니, 대체 무슨 꿍꿍이입니까!”
“꿍꿍이라니.”
그때 주명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인계에서 넘어온 이들을 치료하고 있던 천수아가 먼저 다가왔다.
그녀의 옆에는 마치 천수아의 호위처럼 최덕문이 따르고 있었다.
그가 주자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자윤 원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 최덕문입니다.”
“……누구였지? 낯이 익은데.”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예전에 첫 연회복을 제가 맞춰 드렸습니다만.”
“아!”
눈앞에 있는 이는 이전엔 신영의 저택에도 출입하며 물건을 납품하던, 환계에서 알아주는 거상이었다.
신영과 독대를 하기도 하는 제법 영향력 있는 행수여서 다른 원로 집안에서도 그를 많이 불렀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인계로 추방됐었던 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었기에?”
“전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겼으니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수? 뭘 빼앗겼는데?”
“제 아내의 몸입니다. 십중팔구 신영의 팔부인 중 누군가 사용하였을 텐데 이렇게 생긴 여인을 혹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
최덕문이 내민 두루마리를 펼쳐본 주자윤이 깜짝 놀랐다.
칠부인이었다.
뜬금없이 칠부인의 초상화를 내밀며 제 아내라니.
“……이 여인이 자네 부인이라고?”
하지만 헛소리를 한다 여기기엔 이상한 점들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로 칠부인은 신영의 다른 부인들과는 달리 초상화도 그리지 않고 연회에도 잘 참석하지 않아 원로들이 아니라면 그녀의 모습을 아는 이가 드물었는데.
‘그런데 어떻게 이 행수가 칠부인을 알고 있을까.’
둘째로 누군가에게서 칠부인의 정보와 초상화를 전해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이 초상화는 너무 완벽했다.
칠부인은 정말로 자신의 전각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칠부인에 대해서는 이렇듯 세심하게 빼다 박은 듯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터였다.
‘눈을 감아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자주 본 이가 아니고서야.’
셋째로.
“…….”
실핏줄이 터지도록 붉어진 눈과 마디가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주어 쥔 주먹. 그 안쪽부터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
울분이 가득 찬 그 모습 어느 하나에서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구석이 없었으므로.
주명윤과 짜기라도 했냐며 다그치려던 주자윤은 제 목소리를 그대로 삼켜 버렸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 보려 해도 계속해서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게 만든다.
그때였다.
드드드드.
갑자기 미친 듯이 땅이 울리는가 싶더니 마른하늘에 벼락이 일 듯 노을 진 하늘이 번쩍거리며 낙뢰를 흩뿌렸다.
하늘의 우레가 곤두박질치기라도 한 것처럼 귀를 찢는 굉음이 쾅쾅 울렸다.
“!!!”
주명윤을 위시한 천수아와 주자윤, 그곳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단번에 초소 방벽을 넘어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모두가 생각했다.
저곳에서 지금 무슨 일이 나도 단단히 났구나.
주명윤이 주자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들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예?”
“지체할 시간이 없어. 우린 지금 당장 저곳으로 가야 해. 그러니 이곳에 있는 이들은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뭐라고요? 지금 여기서 빠지시겠다는-.”
그때 최덕문이 추방자들과 함께 다가왔다.
“원로 어른! 저희도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그건 안 돼. 추방자들은 영력이 부족하니 우리와 함께 가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누가 어떤 일에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시지 않습니까. 저도 돕고 싶습니다.”
“기껏 돌아와 놓고.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 그래도 가겠다고?”
“조금이나마 망설이는 이들은 모두 남으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주신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는 것뿐 아니라, 앞으로를 위해서도 저희 역시 저희 몫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곳에 그것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마주 보는 시선들이 단단해졌다.
고개를 끄덕인 추방자들과 천수아가 사단윤과 함께 먼저 초소를 나섰다.
주명윤이 그 모습을 보다가 주자윤을 향해 말했다.
“본래는 내가 증거를 보이고 내 말을 증명하려 하였으나 벌써 일이 시작되었으니, 미안하지만 계획을 바꿔야겠어.”
“형님!”
“난 서둘러 저곳의 전투에 참전하러 가야 하니 내 말을 믿지 않고 신영에게 가 나에 대해 얘기하든, 아니면 주가 영지에 잠입해 몸을 빼앗겼다는 이들을 찾아보며 진위를 파악하든. 이후 일을 어찌할지는 온전히 자네의 의사에 맡기겠네. 자네 판단대로 하게.”
“그게 무슨-.”
주명윤은 그 말을 남기고 정말로 굉음이 울려 퍼지는 곳을 향해 떠나 버렸다.
덩그러니 뒤에 남은 주자윤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런 명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곧 그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재수 없도록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양반.
하지만 그래서 주명윤이 배신이나 거짓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잘 알고 있었다.
가문의 비밀을 파헤치던 그가 이리 다급하게 달려갈 정도면 저곳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정상적인 전투는 아닐 것이다.
이미 듣지 않았나. 저곳으로 가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고.
“제기랄!”
그걸 알면서도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라! 우리도 간다!”
말발굽 소리가 거침없이 이어졌다.
떠나간 이들의 뒤를 주자윤과 주가 혈족들이 빠르게 말을 달려 따라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