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체를 강제로 바꿔냈으니 하늘의 비밀을 조금쯤은 엿볼 수 있었겠지. 그러나 그게 전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네가?”
세화가 교룡의 엉망이 된 꼴을 훑으며 물었다.
“신수도 아닌 네가?”
-너…… 너!
교룡의 시선이 격렬히 진동했다.
붉어진 안구 밑바닥에 질척하게 깔린 천 근 같은 집착이 들끓었다.
길게 찢어진 입매 사이로 검은 연기가 가파른 속도로 흘렀다.
이내 그가 소리 내어 웃었다.
사기로 점철된 호흡이 그의 웃음소리를 따라 허공에 시취를 뿌리며 뿜어져 나왔다.
-너와 저 반편이 놈만이 신수라고 우기며 잘난 척을 하고 싶은 것이냐?! 불사를 버리고 필멸자의 삶을 살게 된 저놈과 언제 스스로의 존재마저 지워 낼지 알 수 없는 네가 나보다 뛰어나다고?!
교룡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아직도 깨닫지 못했구나. 죽어 가는 이 세상에서, 네까짓 것들보다 내가 더 정당한 신수라는 것을! 나는 신수다! 내가 신수야!!
요동치는 검은 흑룡의 주변으로 허공이 온통 일그러졌다.
-너와 저 반편이를 죽이고 이 자리에서 그것을 증명해 주마!
쿵.
쿠웅.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울리더니 그 순간 교룡의 몸에서 흐르던 사기가 실체화했다.
콰앙!
제 앞으로 날아드는 사기의 채찍을 세화가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촤악!
하지만 마치 수십 가닥의 꼬리처럼 길게 뻗어 나간 다른 가닥들은 멈추지 않고 화살처럼 뻗어가 백기하가 만든 새하얀 얼음 방벽을 후려쳤다.
콰앙──! 쾅!!
결계 밖에 있는 무사들도 공격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아악!”
“컥!”
가닥들이 품고 있던 교룡의 영력에 백가 무사들이 울컥 피를 토했다.
아비규환 속에서 서늘하게 표정을 굳힌 그녀가 마치 활을 쏘듯 영력을 날려 가닥을 끊어 냈다.
하지만 가닥들은 금세 다시 사기로 채워지며 재생됐다.
-얼마든지 잘라 내 보거라! 지킬 것이 많은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비린 웃음이 교룡에게서 발작처럼 흘러나왔다.
-저 목숨들을 온전히 지켜 내면서 날 죽일 수 있다고? 오만하고 우습구나! 나야말로 네 영력을 소진시켜 널 먼저 지워 낼 것이다! 네가 이길지 내가 이길지 하늘의 뜻을 비춰 보고 싶은 거라면 그리하거라!
“하늘의 뜻 같은 건 관심 없어.”
날카로운 예기가 그녀의 눈매 사이로 뻗어 갔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생겨난 거대한 반원의 영력이 화살처럼 무서운 속도로 날아가 교룡을 후려쳤다.
콰앙!!!
“신수가 되겠다는 네 망상을 꺾는 것은 오로지 나의 뜻이니까.”
-……망상? 망상이라고?
“그래. 영영 이루지 못할 한낱 망상이지.”
교룡의 시붉은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본 세화가 덧붙였다.
가차 없는 말들이 예언처럼 교룡의 심장에 박혔다.
“너도 네 보주도, 이 평원에서 생을 마감할 것이다. 나의 뜻이 그러하니까.”
-네가 저놈들을 다 지켜 낼 수 있다고? 저놈들을 지켜 내며 날 이길 수 있어?
“할 수 있지. 왜인 줄 알아?”
차갑게 교룡을 내려다본 그녀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난 신수고 넌 신수가 아니니까.”
-주세화!!!!
무사들과 결계를 공격하던 가닥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솟아올랐다.
쐐애액!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솟구친 그것들이 그녀의 몸을 그대로 강타했다.
퍼엉!
강렬한 파열음에 지켜보던 백가 무사들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가모님!!”
“맙소사, 가모님!!”
자신들도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들이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하얀 영력을 끌어 올리며 어떻게든 저 가닥 하나라도 잘라 내고자 검을 치켜들 때였다.
파라라락!
거센 바람이 영기의 그림자들을 거침없이 밀어냈다.
퍼엉!
한순간에 터지듯 사라진 영기들의 사이로 붉은 예복의 소매와 치맛단이 빠르게 흩날렸다.
드러난 세화의 몸에는 조금의 생채기조차 없었다.
태양 같은 적룡의 영력을 온몸에 휘감은 오만한 시선이 가닥들을 굽어보았다.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다시금 그녀를 공격하던 검은 가닥들이 밀려드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마른풀처럼 부서져 내렸다.
“지켜야 할 이가 많아 약해진다고?”
그녀의 눈앞으로 많은 소중한 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위해 온갖 영단을 가져다준 이들. 그녀를 살리기 위해 제 목숨을 아끼지 않은 이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의 시간을 되돌린 남자.
그들이 있어, 지금 제가 신수로 여기에 있었다.
붉은 입술이 위로 솟았다.
“네가 그래서 신수가 못 되는 거야.”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장대한 바람이 들판과 나무, 마른풀들을 휩쓸고 사기를 몰아냈다.
세차게 펄럭이던 그녀의 긴 머릿결이 가라앉을 때쯤.
백옥같은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한일자로 획을 그었다.
그녀가 그은 선을 따라 적룡의 영력이 폭발하는 불꽃처럼 교룡의 몸을 터뜨려 갔다.
교룡이 황급히 가닥들로 몸을 감싸 그것을 막아 냈다.
-──!!
그러나 작열하는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처참한 비명을 내질렀다.
-너, 너 따위가-.
광기 어린 목소리가 세화를 향해 소리쳤다.
-너 따위는 결코 날 이길 수 없다!! 날 죽일 수 없어! 나도 신수니까. 내가 더 오랜 기간 살아온 신수니까!!!
섬뜩한 살기를 빛낸 교룡이 세화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작 적룡의 영단에 기대 신수 노릇을 하는 주제에! 그 영단이 아니었다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주제에!!
“재밌네.”
그 말을 들은 세화가 요요히 웃었다.
저 건방진 입을 지금 이 자리에서 반드시 찢어 놓고야 말겠다는 살의가 담긴 미소임을, 그곳에 있는 누구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굳이 영단에 기대는 게 뭐가 나쁘냐고 반문하지 않았다.
흡수했으면 이미 내 힘인 것을.
동족들의 목숨을 빨아먹으며 벌레처럼 세상에 기생해 온 주제에 누가 누굴 평가하는 거냐고, 그리 비웃지도 않았다.
그저 손에 쥔 나뭇가지를 다시 한번 휘둘렀다.
콰앙──!!
세상을 찢을 듯한 굉음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파동이 만들어 낸 폭풍이 해일처럼 퍼져 나갔다.
간신히 그것을 버텨 낸 백가 무사들이 힘겹게 한쪽 구석에 모여들었다.
날아가는 이를 잡아 뭉치다 보니 본의 아니게 옹기종기 모여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저, 저기…….”
천외천(天外天)의 싸움을 마른침 삼키며 바라보던 무사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내가 언젠가 우리 가모님에 대해 ‘사술을 쓰는 것 아닐까, 아니라면 어찌 육문 연합의 가주들을 다 저리 귀신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변모시킨 걸까.’라고 말했던 것, 잊어 줄 수 있을까.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네.”
“나, 나도.”
잔뜩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부여잡은 무사 하나가 더듬거리며 덧붙였다.
“내, 내가 주가의 여자들은 모두 요사스럽다 평하며 저딴 여인이 결코 백가의 가모가 되도록 지켜만 보지는 않겠다 평했던 걸 잊어 줄 수 있겠는가. 전 재산을 달라 해도 주겠네.”
그것이 신호가 된 듯, 각종 영력의 폭풍이 재앙처럼 몰아치는 허공을 바라보는 이들이 허겁지겁 한마디씩 했다.
“나, 나도 주겠네. 내 전 재산도 주겠어. 제발 잊어 주게.”
“나도 주겠네.”
속으로 생각할지언정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백제성만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붉은 예복의 자취를 간신히 따라가며 대답했다.
“다 잊어 줄 테니 혹시라도 가모님의 호위를 차출하게 되면 그건 반드시 나다. 내가 할 거야.”
그러다 생각이 어딘가에 미쳤다.
‘헉. 그런데 가주께서 옆에 계셨는데? 지금 대화를 듣기라도 하셨다면?!’
끔찍한 상황을 자각한 백제성이 황급히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그와 멀지 않은 곳에 계셨던 백기하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딜 가신 거지?’
이상하게 여긴 백제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백기하를 찾아 두리번거렸으나.
“세상에…….”
“……와. 가모님.”
주위 무사들에게서 신음 같은 감탄이 터져 나오자 허겁지겁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상상해 본 적 없는 웅장한 교전을 지켜보는 동안 백기하에 대한 의문이 옅어져 갔다.
* * *
새하얀 신이 버석거리는 마른 흙 위를 빠르게 달려 나갔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백기하는 그저 이를 악문 채 미친 듯이 정면을 향해 내달렸다.
세화 홀로 교룡을 상대하게 두고 싶지 않았으나 그에겐 더 급한 일이 있었다.
귓가로 윙윙 교룡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말했지. 쓰면 쓸수록 너는 네가 아니게 될 것이라고. 아무도 널 기억하지 못하고, 너 역시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며 텅 비어 버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게 될 거라고!”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느냐! 견딜 수 있겠느냐!”
그가 다시 한번 세차게 이를 물었다.
터질 정도로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흘렀으나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결계 안으로 뛰어 들어간 그는 무사들을 밀치며 달려 나갔다.
그들이 그를 놀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그가 서둘러 마차를 찾았다.
“백가주?”
마차를 지키고 있던 최장명이 그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했다.
“교전 중이 아니었습니까? 여긴 어찌-.”
“비켜!!”
세차게 그를 밀쳐낸 그가 결계를 거둘 생각도 하지 못하며 부수듯 마차 문을 뜯어내 버렸다.
“!!”
숨기라도 하듯 마차 구석에 몸을 묻은 채 떨고 있던 일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단번에 끌어 내렸다.
“백가주!”
“말해.”
땅바닥에 일부인의 머리를 처박은 그가 이를 갈 듯 물었다.
그는 절대로 세화를 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없는 삶을 살아갈 가능성조차 만들 수 없었다.
그걸 위해 이곳에서 이 여자의 목숨을 반드시 끊어버려야 했다.
악에 받친 교룡이.
아직까진 삶에 집착하며 승기를 노리는 교룡이 모든 걸 포기하고 사기를 퍼뜨려 죽기 전에.
그리하여 그것을 세화가 정화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전에.
“당장 여기서 널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