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런. 이런 짓까지…….”
손안에 서류들을 쥐고 앉은 주가 노원로의 손이 벌벌 떨렸다.
주상현의 저택, 너른 방 한편으로 물러나 있던 천령의 시선이 조금 움직였다.
아래로 내리깔고 있던 눈이 드러나지 않을 만큼 위로 올라가 그 모습을 예리하게 응시했다.
주상현의 방 안엔 주가의 원로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게…… 이게 다 진실이냐. 진실이란 말이냐!”
소리를 친 것은 오늘 막 합류해 새로 서류를 확인한 원로 중 하나였다.
천령이 한 점 동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 아래 신영의 문장이 찍힌 것을 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인장은 결코 제가 위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미친. ……미친!”
원로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팽개쳤다.
“소가주가, 대체 어찌 제 혈육과 혈족들에게 이리 악랄하게 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파르륵 날아 원로들의 사이로 떨어진 종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미리 서류들을 확인한 원로들 역시도 침통하고 심각한 시선으로 서로를 일별했다.
거기까지 확인한 천령이 고개를 조금 더 깊게 숙였다.
지독한 살의가 그의 어두운 눈동자 안에 꽁꽁 감춰졌다.
그들이 읽고 있는 것은 천령이 가져온 서류들이었다.
육문 아이들의 납치와 살해. 그 아이들뿐 아니라 가문 없는 이들, 심지어 주가 원로의 자식과 친지들까지 수없이 죽여 영력을 흡수한 일 등.
지금껏 주가에서 벌어져 왔던 모든 악행이 소가주의 요청과 신영의 허가로 이루어진 것처럼 적혀 있는.
‘……소가주님.’
온갖 믿을 수 없는 내용이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저 원로들은 서류의 진위를 감히 의심하지 못했다.
천령이 반박했던 대로 서류의 아래에 신영의 문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위조할 수 없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신영의 몸에 새겨진 권능으로만 찍을 수 있는 인장이.
실상은 제 아비가 버린 몸에 갇혀 죽어가던 그의 주인이 찍은 것이었다.
‘신영, 네가 버린 그 몸뚱이로 내 주인이 무엇을 했는지.’
천령이 증오와 분노로 뒤섞인 시선으로 서류를 노려보았다.
‘그리하여 내 주인이 어떻게 네 목덜미를 물어 죽이는지, 그 자리에서 똑똑히 보아라!’
“그 몸에 있을 때 미리 아무것도 없는 종이에 인장을 여러 개 찍어 둬.”
그것은 그의 주인이 제법 대화와 거동이 가능한 정도로 치료가 되고 난 이후의 일이었다.
세화는 흘리듯 주경현과 천령에게 그리 말했다.
신영의 인장이 있는 종이.
세화도 굳이 이유를 말하지 않았고, 주경현과 천령도 묻지 않았으나 그녀의 말대로 했다.
그들은 아버지를 단죄하러 주가로 돌아가기로 했지만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는 알 수가 없었으니까.
주인은 완벽히 치료될 수 없는 상태였다.
또 언제 상태가 나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이 될지 모르니 뭐든 미리 준비하여 나쁠 것이 없을 터였다.
천령만이 그녀가 그 말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유를 끝까지 궁금해했었으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결코 그 어떤 일도 제 주인의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상한 것이다. 어쩌면 죽음까지도.
하여 인장만이 찍힌 백지를 남겨 천령에게 보복할 방법을 남겨 준 것이다.
‘…….’
비참하게 죽어 간 주인을 떠올리는 천령의 주먹이 안으로 말려들었다.
소가주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제 주인은 무슨 일이 생기면 이미 더럽혀진 제 이름만을 사용하고 주가의 명예는 지켜 달라 했다.
그의 목숨을 지키지 못했던 자신이니 그의 마지막 바람만은 제가 지켜 내야 하지 않을까.
그때였다.
“원로 어른! 원로 어른!”
누군가가 급히 주상현과 원로들이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뭔데 소란이냐!”
“신영의 저택을 지키고 있던 이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신영께서 저택에 있던 무사들을 모조리 불러모아 자신을 호위하게 하며 영지선으로 달려가고 있다 합니다.”
“뭐야?!”
원로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식을 가져온 시종이 황급히 덧붙였다.
“거기다 무사들이 호위하는 거대한 마차가 무수히 많은 함들을 싣고 함께 떠났다 합니다. 수많은 영기와 영단들을 싣고 있었다고-.”
“잡아야 합니다!”
천령이 황급히 소리쳤다.
“교룡을 신수로 내세우려던 계획도 틀어진 듯하니 달아나려는 겁니다! 신물들을 훔쳐 분명 어디선가 그것을 흡수하려 할거고요!!”
주상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원로들에게도 파발을 보내라! 무사들을 모두 동원하여 신영을 쫓아야 한다고! 영지선으로 오라고!”
“예!”
“주세화가 이미 육가 연합의 가모로 섰으니 육가 연합에서도 이 일들을 이미 모두 알고 있다 보아야 한다. 그러니 반드시 주가 역시 이 일에 총력을 다하여 해결하려 했음을 내세워야 해!”
파리한 안색을 한 주상현이 이를 갈며 명령했다.
“한 명의 무사도 아끼지 말고 말을 탈 수 있는 자라면 그게 누구든 모두 영지선으로 끌고 와야 한다 이르거라! 알겠느냐!”
“예!!”
주상현과 원로들이 황급히 대기시켰던 무사들을 이끌고 영지선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뒤로 다른 원로가 제 무사단과 합류했다.
또 다른 원로가. 그 뒤로 급히 모인 다른 원로가.
그리하여 밤새 말을 달린 그들의 위로 이전과 다른 새벽이 내려앉았을 때는 이미 수많은 무사들이 영지선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 *
세화는 아낌없이 힘을 쏟았다.
꽃처럼 아름다운 예복이 허공을 돌 때마다 심판의 칼날 같은 푸른 낙뢰가 가차 없이 땅으로 내리꽂히며 천둥 같은 땅울림을 불러왔다.
‘신수가 되는 게 이런 것인가?’
온몸에 힘이 끓어 넘치고 있었다.
그녀가 손안에 든 나뭇가지를 반대쪽으로 휘감았다.
그것만으로도 수십 개의 강력한 영력 불꽃이 다시금 장대비처럼 내리꽂혔다.
콰콰콰앙!
적룡의 힘을 거리낌 없이 끌어 올린 지금, 그녀의 시야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교룡의 미세한 움직임이 눈 안에 낱낱이 새겨지는 듯했다.
모든 것이 느리게 멈춰진 듯했고 뭐든지 할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였구나. 네가 저런 결계까지 세워 생명력을 흡수하려 했던 것은. 나 스스로도 완벽히 깨닫지 못한 내 힘을 이미 짐작했기 때문이었어.’
-주세화──!!
살기로 범벅된 한쪽 눈을 번뜩인 교룡이 미처 피하지 못한 낙뢰를 그대로 뒤집어쓴 채 악을 썼다.
비명처럼 터져 나온 그녀의 이름 뒤로 검은 영기의 파동이 목 안쪽에 고였다가 터져 나왔다.
-──!!
콰앙―!!!!!
하지만 흑룡의 목에서 터져 나온 거센 영력의 폭풍도 횡으로 손목을 꺾은 그녀의 눈앞에서 그대로 터져 나갔다.
발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교룡의 몸에서 사기가 한껏 팽창하다 터져 나갔다.
하늘을 덮은 그것들은 이내 우박처럼 지상을 향해 추락했다.
쾅! 쾅!
“!!!”
백제성과 무사들이 깜짝 놀라 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들을 검으로 갈랐다.
치이이익!
채 소멸시키지 못한 사기들이 땅에 닿을 때마다 땅이 썩으며 패여 갔다.
머리가 아프고 숨쉬기가 고통스러울 정도의 썩은 악취가 진동했다.
그 순간 그녀의 발밑에서 백색의 소용돌이가 기둥처럼 치솟았다.
쿠웅! 쿵!
이내 폭풍처럼 휘몰아친 더없이 정순하게 제련된 백가의 영력이 푸른 낙뢰와 걷어 낸 사기를 품고 교룡에게로 날아갔다.
-!!
교룡이 황급히 몸을 움직여 피했으나 두 번째 세 번째는 피하지 못했다.
콰앙!!!!!!!
쾅!!!!!!!
-──!!!
끔찍한 비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네 번째 폭음이 교룡의 몸을 찢고 흔들었다.
콰앙―!!!!
촤라라락!
붉은 그녀의 예복이 세찬 바람에 마치 꽃이 피듯 펼쳐졌다.
하지만 차갑게 굳어진 적자줏빛 눈동자는 절대로 그녀가 화원의 꽃처럼 그저 아름답기만 한 존재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푸른 낙뢰와 하얀 소용돌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완벽히 다른 영력들이 마치 복종하듯 그녀의 주변을 흐르고 있었다.
육문 무사들은 어떤 말도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모든 다른 종류의 영력을 자유자재로 끌어내는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지상에 떨어진 재앙을 거세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이미 보는 이들에게서 신음조차 앗아갔다.
마른침을 삼킨 백제성과 무사들은 그녀가 보여 주는 힘의 크기와 영력의 사용법에 전율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래. 너는 날 죽일 수도 있겠지. 하나 그게 끝일 것 같은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신음을 삼키며, 극한의 고통을 견뎌 내던 시붉은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나를 여기서 죽인 후엔? 내 사기에 저기 있는 자들의 명도 함께 끊어질 거란 건 알고 하는 거겠지? 끊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온통 대기에 시독이 가득 찬 그 상태는 어찌할 테냐.
세화의 공격에 온통 몸이 타들어 가면서도 교룡이 소리쳤다.
허공에 온통 갈라지고 짓이겨진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네가 정화할 수 있다고? 정화가 가능한 네 새로운 모습은 양날의 검이라는 걸 인지하고 사용하는 것이냐.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내가 말했지. 쓰면 쓸수록 너는 네가 아니게 될 것이라고. 아무도 널 기억하지 못하고, 너 역시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며 텅 비어 버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게 될 거라고!
‘뭐?’
그 말이 허공에 울려 퍼진 순간 검을 쥔 백기하의 손이 떨렸다.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이 세화를 확인했다.
허공에서 꽃잎처럼 펄럭이는 세화의 소매 안쪽, 나뭇가지를 쥔 손과 교룡을 노려보는 시선엔 한 점 동요가 없었다.
‘……!’
백기하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거짓이 아니야.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어!’
백제성과 무사들의 시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들은 말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없음에도 그들의 안색 역시 백기하 못지않게 창백해졌다.
‘저게 다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저 아가씨의 힘은 스스로를 희생하는 힘이라는 건가? 그런 힘을 지금 우리를 위해 저리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는 거고?’
교룡이 침묵하는 세화를 보며 또 한참 웃었다.
웃을 때마다 흘러내리는 핏물이 땅을 녹이며 사취를 뿌렸다.
-네 목적을 달성한다해도 너는 그저 소모품처럼 사용되는 것이다. 그리고 버려지겠지! 모두가 행복하지만, 너는 비참하게 모두에게 잊힌 채 아무도 널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느냐. 견딜 수 있겠느냐!
갑작스레 온 세상이 적막해지는 것 같았다.
그곳에 있는 모두의 눈이 붉은 꽃송이 같은 세화에게로 향했다.
백제성과 무사들이.
백기하마저도.
허공에 나부끼는 긴 검은 머리 아래로, 곡선이 완벽한 입술이 열리는 것을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하며 집중하여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들 속에서 세화가 되물었다.
“그런 걸 내가 왜 감당해야 하지?”
-……뭐?
“죽지 않으면 되잖아? 잊히지 않으면 되잖아.”
죽는다고?
잊힐 거라고?
그것을 각오했냐고?
아찔한 빛의 폭포를 떠올리면서도 세화의 눈빛은 이전처럼 떨리긴커녕 더욱 선명해졌다.
‘아니. 난 결코 그런 것을 각오하진 않을 거다.’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이리 힘을 사용하다 보면 저 교룡이 그랬듯, 미처 알지 못한 변수가 생겨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미리부터 그것을 걱정하며 몸을 사려야 하는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그 미래 때문에 저 교룡을 상대하며 사정을 두어야 하는가?
‘웃기지 말라 그래.’
난 이미 날 지배하려 하는, 신수에게 각인된 명령까지 거부하고 있는 것을.
세찬 그 영력의 폭포가 날 지워 내려 한다면, 그래 보라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린 그녀의 손안에서 긴 나뭇가지가 원을 그리며 돌았다.
“그나저나 신수의 일은 신수들끼리 알아서 할 테니.”
횡으로 눕혀진 가지 위로, 다시 한번 붉은 영력들이 전의를 불태우며 화르르 피어올랐다.
“넌 제발 아는 척 좀 그만하지 그래.”
검의 형태로 벼려진 그것을 교룡을 향해 뻗으며 그녀가 비웃음을 뱉어 냈다.
“넌 신수가 아니잖아, 교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