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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성은 젊은 나이에 천인장(千人長) 자리를 꿰찬 실력 있는 무장이었다.
막상 그가 전장을 겪어 낸 것은 십 년 전쟁의 후반부뿐이긴 했지만.
사실 그때쯤 이미 주가군은 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육문 연합은 백기하의 압도적인 무력 덕분에 사망자는커녕 부상자도 많지 않았고, 한계까지 끌어 올린 신수의 능력으로 중강 이남까지 거침없이 치고 올라갔다.
하여 육문 무사들의 사기는 ‘파죽지세’라는 단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끝 간 데를 모르고 솟구쳐 올랐다.
모든 병사가 승기를 잡은 전투에서 하나라도 더 많은 공을 세우고 싶어 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돋보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사이에서 백제성이 비교적 어린 나이에 천인장이라는 지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듯한 특유의 호승심 덕분이었다.
백제성은 어떤 전투에서도 겁이 없었다.
육문의 병사들을 신수가 돌본다고는 하지만 모든 전장에 백기하가 함께할 순 없었다.
하여 무사들은 때때로 적군을 맞아 승리하기 위해 위험한 작전을 수행해야 했는데, 그런 때에도 백제성은 제일 먼저 솔선하여 선두를 맡았다.
그에게 주어진 천인장이란 지위는 어찌 보면 그가 거침없이 걸어 댔던 목숨값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백제성은 선봉군의 무사를 차출하는 자리에 가장 먼저 손을 들어 자원했다.
교룡의 능력에 당해 끔찍한 악몽을 꾸고 난 이후였으나 지금도 가장 먼저 백가의 얼음 결계에서 뛰쳐나와 제 가주 옆에 섰다.
“…….”
‘저건…… 뭐지. 저게 용인가?’
하지만 그런 성정의 백제성도 그 결계 밖, 강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선 교룡의 모습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말은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온몸을 휘감은 악기.
서 있는 주변의 땅을 전부 부패시킬 듯한 시취로 범벅된 체액.
응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른침이 넘어가고 손끝이 벌벌 떨렸다.
신수라면 벌써 거대한 푸른 눈을 가진 백호를 본 적 있었다.
하나 이 교룡은 백가 무사들의 자랑이었던 흰 털의 신수와는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
힘의 크기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독하게 썩어 문드러져 가는 듯한 저 몸체의 상태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그들의 백호가 적에게는 맹렬했으나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살생을 최대한 피했던 반면, 이 교룡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고, 무슨 짓이든 불사할 것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살기가, 선혈이 고인 것처럼 붉어진 눈 안에서 명확했다.
첫 전투에서도 물러나지 않았던 백제성의 발이 처음으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한데 그가 느끼는 그 두려움을 알리기도 전이었다.
어떤 낭랑한 목소리가 그의 발을 붙잡았다.
“협박이라도 받은 양 허겁지겁 달려와 놓고는. 뭐, 꼴을 보니 알만 하구나. 살려달라 하고픈 것이냐.”
‘뭐, 뭐?! 맙소사 지금 누가……!’
“네 혓바닥도 아직 제법 쏠쏠히 굴러가는 듯한데 나는 그러지 못할 이유라도?”
‘!’
거침없는 언사는 수없이 많은 위기를 넘겨 온 백제성의 간담조차 얼음물에 담가 버리는 듯했다.
교룡의 악기로 악몽을 꿀 때보다 더욱 사색이 된 그가 삐걱삐걱 굳은 동작으로 제 옆을 향해 돌았다.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붉은 예복을 걸친 아가씨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엄마야…….’
저 아가씨에 대한 정보는 백가 전체에 무수히 많은 양이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소문들은 하나같이 듣고 있자면 코웃음이 나올 법한 허황되고 믿을 수 없는 내용들뿐이었다.
저 아가씨가 말을 탄 채 어떤 자세로건 자유자재로 활을 쏘았는데, 쏘는 족족 삿된 것들이 한 번에 네다섯 마리씩 터져 나갔다거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수준의 치유력을 발휘했다거나.
심지어 백호 신수의 모습으로 변했었다거나 하는, 있을 수 없는 내용까지 있었다.
개중 정확한 한 가지는 그들의 가주께서 저 아가씨를 대하는 태도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라는 사실뿐.
그랬기에 여타 다른 무사들은 그 뜬소문들을 이렇게 여겨 왔다.
‘이제껏 적으로 만나 싸웠던 가문의 아가씨를 가모로 세우자니 혈족들이 반대할 것 같아, 누군가가 지어낸 허황된 말이겠지.’
물론 그들도 저 아가씨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를 보며 그녀가 가진 힘이 범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아가씨의 나이는 실제로 어렸다.
탈피를 마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
환계의 그 누구도 소문처럼 그리 여러 가지 영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
들리는 말 속 능력치를 계산하자면 한 가문의 가주들이라도 가지기 힘든 정도의 힘이라는 점.
게다가 ‘주가의 아가씨가 어찌 백호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거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은 차치하더라도.
‘신수로 변했다면 응당 자랑스럽게 전 환계가 알도록 공표하게 되지 않나? 어째서 이렇게 잠잠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누구도 믿지 못할 수밖에.
그런 아가씨가 일진 출전 무사들과 함께 주가로 향할 때 불만을 가지는 이도 더러 있었다.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붉고 화려한 의복을 걸친 것도 꽤 신경 쓰였고.
마치 지휘관이라도 된 양 그들의 앞에서 달리는 아가씨의 모습이 제법 눈에 거슬린 것이다.
‘위급한 순간에 비명을 지른다거나 기절이나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아가씨를 보며 무사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고, 백제성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여 이 순간.
“그러니 제발 이젠 그 힘을 좀 보여 봐. 매번 똑같은 협박, 똑같은 패배. 다음엔 뭔가 다를 거라는 다짐들 말고. 쓸모도 없는 네 그 협박 따위, 이제 들어 주기 지루할 정도니까.”
‘!’
예비 가모고 뭐고.
저 아가씨의 입을 천으로 막아 놓거나 아가씨 자체를 꽁꽁 묶어 저 결계 너머로 집어 던지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 맙소사, 미쳤……. 어린 아가씨가 감히 우리 가주만 믿고 저따위 말을 막 던져?!’
그 순간이었다.
교룡 역시 백제성과 같은 마음이었는지, 그의 몸체에서 흑색 악기가 살기로 범벅돼 끓어넘쳤다.
땅이 요동치고 뭔가가 터져 나가듯 사방이 빛으로 가득 찼다.
그 사이에서 믿을 수 없는 크기의 새빨간 불꽃 기둥이 그들을 덮쳤다.
‘제, 젠장!’
이것은 절대 피할 수 없었다.
만약 가주가 막아 주신다고 해도, 이것만으로도 타격이 커 두 번째 날아올 공격을 막아 주실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었다.
콰앙!!!!!
불꽃 기둥이 예상했던 목표를 덮쳤는지 어마어마한 소음이 귀를 찢듯 터져 나왔다.
‘적에게 시위 한 번 당겨 보지 못하고 이대로 죽어야 한다니 이렇게 원통할 데가.’
눈을 질끈 감고 손으로 귀를 막은 백제성이 몸을 떨었다.
‘한데…… 왜 아무렇지 않지? 고통 없이 단번에 죽기라도 한 건가, 나?’
심지어 충격파도 없었다.
설마 막판에 교룡이 힘을 거두기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지 않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통에 백제성이 질끈 감았던 눈을 살살 떴다.
“!”
그런 생각을 하며 뜬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가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소매가 긴 붉은 예복이 마치 만개한 꽃송이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허공으로 뛰어오른 그 의복의 주인은 거대한 영력에 맞서면서도 한 점 두려움 없이 웃고 있었다.
지상으로 떨어진 태양처럼 거대한 불꽃의 원을 가느다란 나뭇가지 하나로 막아서면서.
그녀는 조금도 힘을 쓰지 않는 것처럼 나뭇가지를 반원의 형태로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눈 부신 태양은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소멸해 버렸다.
“이게 고작인가?”
-너, 너!
“인계에서와는 조금 다를걸. 네가 거지 같은 결계로 주가 영지민들의 생명력을 벌레처럼 빨아먹고 있을 때 나 역시 너희 신영이 준 선물을 편안하게 흡수했으니까.”
‘…….’
제가 보는 광경을 믿을 수 없던 백제성이 눈을 비비고 깜빡거렸다.
하나 시야에 보이는 광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화려하게 미소 짓는 어린 아가씨의 몸에서 영력의 기운이 더욱 거세게 뿜어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든 나뭇가지 위로 봄을 맞은 정원처럼 화르륵 불꽃 같은 힘이 피어올랐다.
“이딴 꼴같잖은 장난은 그만하고 네 힘을 좀 본격적으로 보여 보라 했지.”
아가씨가 다시금 교룡을 도발했다.
“명색이 날 죽이겠다고 여기까지 바지런히 달려와 놓고 모든 게 다 조금 전 악몽만도 못하면 내가 실망을 하겠어, 안 하겠어?”
-주세화―!!
“머리는 좋지 않은 듯싶은데, 그 와중에도 내 이름만은 잊지 않는 게 기특하네.”
교룡은 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저 날개를 활짝 폈다.
그것만으로도 육중한 몸체가 조금 전의 불꽃 기둥 못지않게 무서운 속도로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어린 아가씨의 몸 역시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콰앙──!!
단번에 교룡의 사기 넘치는 시붉은 힘을 날려 버린 그녀가 손에 든 나뭇가지를 고쳐 잡았다.
아무리 가늘다 하여도 딱딱한 나뭇가지가 맞건만 그것이 그녀의 손짓에 따라 마치 활처럼 휘어졌다.
그 사이로 영력으로 만들어진 붉은 화살이 생겨났다.
타앙―!
화살이 우레같은 소리를 울리며 한쪽밖에 남지 않은 교룡의 눈으로 쇄도해갔다.
검은 흑룡이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어 화살촉을 피했다.
하나 곧 다시 나뭇가지를 검처럼 휘어잡은 세화의 공격이 그의 미간을 향해 날아갔다.
콰앙!!!
-──!!!
화르륵!
그녀와 흑룡을 둘러싸고, 허공에 수많은 붉은 영력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그 영력들은 교룡의 눈과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비늘 사이를 노리며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붉은 영력이 교룡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마치 거센 장대비처럼.
콰앙!! 쾅! 쾅!! 콰앙!!
하늘이 모두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소리가 고막을 터뜨리듯 터져 나왔다.
하지만 백제성은 이번엔 눈을 질끈 감지도 귀를 막지도 않았다.
그저 홀린 듯이 두려움도 잊은 채, 어린 아가씨의 붉은 예복이 남기는 잔상을 따라 눈을 옮길 따름이었다.
백제성의 멍한 시선 아래로 창백해진 입술이 열리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와.”
그는 지금 제 가주의 놀랍도록 남다른 태도가 왜 그랬던 것인지. 그토록 허황된 뜬소문이 왜 그리도 많았던 것인지.
이 순간 한 번에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단 백제성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결계를 뛰쳐나왔었던 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백제성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표정을 한 그들이 창백한 입술 밖으로 같은 신음을 홀린 듯 흘렸다.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