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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은 당욱의 몸에 매달리다시피 한 채 걷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딜 때마다 상처 부위에서 지독한 통증이 올라왔다.
그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내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지시를 내리며 무사들을 불러모았다.
“무사들을 불러모아라! 부인들의 처소를 지키는 이들과 문을 지키는 이들까지 싹 다 불러모아!”
“신영. 그렇게 되면 저택을 지킬 이들이 없습니다.”
“저택은 비워도 된다! 아무도 지키지 않아도 되니 일단 모두 모이라 해라! 마차도 준비시켜!”
저택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 저택에 남아야 하는 시종들의 얼굴로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 때문에 저리 무사들을 다 집합시키는 걸까. 여기서 또 누가 주가를 공격해 오기라도 하는 건가?
그럼 우리는? 우리는 어떡하라고. 달아나든 숨든. 알아서 살길을 마련해야 하는 건가?
숙인 고개 아래로 염려 가득한 시선들이 분주하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전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달아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주가가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았으니까.
오랜 시간에 걸쳐 그들에게 각인된 ‘환계는 주가의 것이다.’라는 명제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어디로 도망쳐도 모두 다 주가의 손아귀 안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견고했던 두려움의 벽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환계 수천 년의 역사 내내 굳건히 자리해 왔던 신영의 저택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신영의 신물이었던 적룡의 영단은 다른 이에게 탈취당했으며.
갑자기 나타나 시취를 흩뿌리며 주가 혈족들을 있는 대로 잡아먹었던 교룡은 그 후 막강한 결계로 주가 영지를 봉쇄해 왔다.
신영은 일이 잠잠해진 후 이 교룡이 주가의 수호신이며 주가 천년 번영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신 것이다 선언하였으나 그 말을 대체 누가 믿을까.
교룡의 결계가 세워져 있는 동안 원신이 상할 정도로 체력과 영력을 빼앗겨 가는 감각이 이리 생생한데.
그나마 신영의 저택 내에서 일하는 자들은 기본 영력이 제법 풍족한 편이라 버텨 냈다.
‘하지만 혈족들의 저택에서 일하는 가문 없는 자들은 수도 없이 죽어 나갔겠지.’
그런 상황인데, 저택의 무사들을 끌어모으면서 저택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니.
아예 그들 모두를 버리겠단 말과 무엇이 다를까.
게다가 무엇보다.
“천하에 둘도 없을 패륜아가 아비를 죽이고 자리를 찬탈하면서도 저리 뻔뻔한 얼굴을 하고 있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 것이냐!”
전대 신영이 등극식에서 소리쳤던 말의 내용은 이후 벌어진 수라장으로도 지워 낼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신영의 자리가 탐이 난대도, 그런 짓을 하다니. 한낱 미물도 부모에 대한 정은 있는 법인데.’
그렇게 해서라도 치르려 했던 등극식 역시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그 새까만 결계가 언제 또 생겨날지 모르는데, 차라리 그냥 지금 달아나는 게 낫지 않을까?’
시종들은 표정을 지워 냈으나 불안하게 흔들리는 입술과 창백해지는 안색까지 모두 감출 순 없었다.
그런 시종들의 반응이야 어쨌건 간에 신영은 모여든 무사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바빴다.
“너희! 너희는 지금 곧 원로들의 저택으로 가서 내가 사병을 급히 요청한다고-.”
‘아니지. 아니지.’
말을 하던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불러도 오지 않는 상현이 놈의 경우를 봐도 이것들이 지금 나를 아직 따라야 하는지 고심중인 듯 한데.’
지금 제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교룡이 갑자기 움직인 것을 보면 분명 무슨 일이 생긴 듯하긴 하지만.’
신영이 불안하게 눈을 움직였다.
‘지원을 받았다가 그놈들이 오히려 날 공격할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아.’
방화사건때도 백기하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대충 사건을 무마하길 바란 파렴치한 놈들이 아닌가.
또다시 백기하와 맞서는 경우가 생길 때 저를 잡아 넘김으로써 목숨을 구걸하려는 상황이 생길지도 몰랐다.
“신영. 원로들의 저택에 다녀와야 합니까?”
“아니다. 아니야. 일단 우리끼리 간다.”
저택에 남은 무사들을 모두 불러모으자 인원이 적지 않았다.
약으로도 치료되지 않을 만큼 상태가 매우 나쁘거나 사지를 잃은 자가 아니라면 모두 모이라 엄명을 내린 덕이었다.
병상에 있던 이들에게 몸을 추스를 시간도 주지 않고 끌고 나온 탓인지 무사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좋지 못했다.
애초에 이 소집 명령에 불만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 면면들을 보며 신영이 이를 물었다.
‘그래 봤자 내 명을 들어야만 하는 것들이…….’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은 계약을 하기 전 고독을 삼키게 한다.
고독이란 주가에서만 비밀리에 계승해 온 비술로, 독을 강력히 농축시키고 영력으로 주인을 각인시킨 벌레를 뜻했다.
이것들은 평소에는 반응 없이 몸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가 주인의 명이 있을 시 발작하며 제 몸을 터뜨려 삼킨 이의 목숨마저 앗아가는 것이다.
주가의 고독은 오로지 신영에게만 복종하게 만들어져 다른 이는 조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눈앞의 무사들은 불만을 품고 있다 한들 제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경현의 모습을 한 신영이 냉랭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마음을 드러내는 몇몇의 얼굴은 자세히 기억해 두었다.
속마음이야 어쨌거나 신영은 무사들의 앞에서 자애롭고 비통한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주가를 지키는 신수께서 이리 급히 자리를 비우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적들이 또다시 우리의 방심을 틈타 주가를 전복시키려 달려온 것이 아니겠느냐.”
오랜 세월 갈고 닦은 호소력 짙은 어조로 덧붙였다.
“환계의 역사에서 주가는 그간 이런 위기를 그동안 수천, 수만 번 겪어 왔다. 그 모든 상황은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왔지. 그러니 이번에도 우리는 이 상황을 보다 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
환계의 지배자였던 주가가 이런 위기를 맞을 일이 대체 뭐가 있었을까. 그저 무사들의 마음을 흔들고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었으나.
‘이 건방진 놈들이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애써 목을 가다듬은 그가 조금 더 짙어진 목소리를 꺼내 들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들의 곁에는 늘 나 신영이 함께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출전이야 정말로 적을 상대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교룡에게 몸을 바꿔 달라는 말을 조금 더 쉽게 꺼내기 위해 그를 지원하는 척할 뿐이니, 무슨 말인들 못 꺼낼까.
“가장 앞서 적을 맞아들이고 후퇴를 모를 너희들과 계속해서 등을 맞댄 채-.”
그때였다.
어떤 무사 하나가 그의 말을 끊으며 목소리를 냈다.
“그럼 이제는 도와달라는 병사들의 머리를 발로 밟아 밀어내고 달아나시는 일은 없는 겁니까?”
“……뭐라?”
“그날 분명히 보았습니다. 신영을 지키던 일영 단장이 쓰러져 손을 뻗었을 때, 신영께선 그를-.”
“닥쳐라!!”
‘이 미친놈이 그런 걸 이런 자리에서!’
“날 모함해도 정도가 있지.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있느냐!”
신영이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소리를 질렀다.
“그날은 비열한 백기하가 던져둔 환각 약물 때문에 모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환영을 본 것이 아니냐! 네까짓 놈의 망상을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일인 양 떠벌리다니!”
“그럼 그 흑룡은 신수가 맞긴 한 겁니까?”
“뭐?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지금 그분을 주가의 수호신이라 칭하는 내 말에 의심을 품는 것이냐!”
“…….”
무사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었으나 제 몸속에 들어 있는 고독을 의식한 탓인지 입을 다물었다.
다른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쉬이 수긍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신영은 일이 이렇게 되었을수록 더욱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어차피 이놈들 몸속의 고독은 내가 조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놈들을 끌고 가 지원을 하러 왔다 한들 교룡이 흡족하게 생각하고 제 몸을 바꿔 줄지 알 수가 없었다.
무사들이 이토록 직접적으로 불만을 꺼내 드는 일은 거의 없었던 터라 이것을 해결할 방도도 찾아봐야 했고.
‘어쨌거나 시간이 없어!’
이 몸은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으니 또다시 영혼이 이 몸에 고착되기 전에 몸부터 어떻게든 바꿔야 했다.
“모두 말에 올라라!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이대로…….”
그때 신영의 뇌리로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영기!’
그가 황급히 옆에 있던 시종에게 물었다.
“너! 그때 백기하가 묵은 별채 주변에 뿌려 두었던 영기들은 모두 어디에 두었느냐.”
“예?”
“영기들! 그것들을 모두 어디에 두었어!”
“그, 그것은. 일보관님께서 저택의 별실에 그냥…….”
“그것들을 모두 가져오거라, 당장!”
서슬 퍼런 그의 기세에 시종들이 황급히 영기를 가지러 달려갔다.
‘그래. 내가 왜 그 영기들을 생각지 못했지.’
백기하의 방문 때 사용하려 했던 영기들은 모두 영력을 흡수하는 데 탁월한 기능을 하는 것들이었다.
‘주세화를 나보다 더 탐내던 교룡이었으니 지금 갑자기 이동한 것은 그년을 잡아먹기 위해서가 아닐까.’
신영이 시취를 진하게 흩뿌리던 교룡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결계까지 세우며 점점 나빠지는 상태를 애써 재생시키려 애쓰고 있었으니 정말로 그런 것일지도.’
만약 그를 따라갔는데 정말로 교룡과 주세화가 맞붙고 있는 상황이라면. 영기들은 분명히 주세화를 사로잡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영기로 주세화를 압박해 영력을 흡수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교룡도 내 몸을 흔쾌히 바꿔 주겠지.’
물론 주세화가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테니.
정말로 그년과 대치하고 있을 상황을 상정해 준비는 더욱 철저해야 했다.
‘영단. 그래, 영단도 더 필요해!’
영기를 작동시키는 데는 영력이 필요했기에 혹시나 도중에 영기들이 작동을 멈추지 않도록 비상용 영단을 챙길 필요가 있었다.
“너희들! 이걸 가지고 가서 보고에서 영단이 담긴 함들을 있는 대로 꺼내 오거라. 어서!”
그가 보고를 여는 열쇠 역할을 할 제 영단을 시종에게 넘기며 호통쳤다.
그 재촉에 남아 있던 시종들마저 허겁지겁 보고를 향해 달려갔다.
길지 않은 시간 후에, 그간 모아 왔던 많은 양의 영단과 영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뭔가 다른 것들과는 기의 흐름이 조금 다른 영기가 하나 섞여있었으나 잔뜩 쌓여있는 영기들을 모두 하나하나 확인할 시간이 없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으윽. 큭.”
상처가 다시금 지독히 아파 왔다.
이 상처는 영단을 먹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서둘러야 했다.
“이것, 들을 모두 마차에 싣고 너희는 모두 말에 올라라!”
‘이 정도 영단과 영기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주세화 그년을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
혹시 또 아는가.
그년의 영력을 먹어 치워 이 몸에서 회복하고 탈피까지 이루어 낼 수 있을지.
‘그래. 분명 이번에야말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만들 것이다!’
바랄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남지 않은 신영의 눈이 아득하게 타올랐다.
모든 것은 이치에 맞게 돌아갈 것이다.
그간 환족의 역사가 그랬던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