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197/254)

* * *

“뭐야? 그분이 움직이셨다고?!”

그렇게 묻는 신영의 안색이 파리했다.

그는 며칠 사이에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변해 있었다.

어떤 약을 쓰든 조금도 낫지 않는 허리께의 상처는 주변까지 부패시키고 있었다.

“예. 중강 쪽을 향해 날아가셨습니다.”

“이, 이런! 이런!”

갈 거면 내 몸을 바꿔 주고 움직여야지! 갑자기 그놈은 내게 말도 없이 왜 움직이는 거란 말이냐! 갑자기 왜!

“상현이 그놈은! 주상현은 오늘도 오지 않겠다더냐!”

“그렇지 않아도 상현 원로의 저택에서 시종이 달려왔사온데, 아직도 그날 입은 상처가 낫지 않아 제대로 거동조차 하지 못한다고…….”

“약을 그렇게 많이 보냈건만 어찌 아직도 거동을 못 해! 그놈이 딴마음을 먹은 게 아니냐!”

신영이 해쓱해진 볼 안쪽으로 이를 악물며 초췌해진 팔로 침상을 내리쳤다.

그는 제 다음 몸으로 일보관이 추천했던 주상현을 점찍었다.

한데 주상현은 마치 저를 부르는 이유를 알기라도 하듯,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결코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몸을 바꿔 주어야 할 교룡초자 어딘가로 움직여 버린 것이다.

‘큰일이다!! 이러다간 정말 누구와도 몸을 바꾸지 못할 수도 있겠어!’

“일보관은. 일보관은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냐?!”

“그게…….”

“그게 뭐!”

“방이 모두 비워져 있는 것을 보아, 혹… 혹. 명윤 원로 아들들의 탈출 건 때문에 책임을 피하고자 도, 도망을……. 도망을 간 건 아닌지.”

분을 참지 못한 신영이 다시 한번 침상을 내리쳤다.

진작 주상현이 아니라 일보관 그놈과 몸을 바꿨어야 했던 것을.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허나 언제까지고 화만 내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신영이 눈앞에 있는 시종을 응시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예? 저, 저는 당욱이라 하옵니다.”

“당욱, 이라고?”

언제 표정을 바꾸었는지, 세상이 무너질 듯 참담한 얼굴을 한 신영이 눈을 내리깔았다.

뒤이어 차분하고도 구슬프게 속삭였다.

“모두가 이리 위급한 상황에서 가문을 버리고 나를 버릴 때, 너만은 이리 남아 내 몸을 보살펴 주고 있으니 내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구나.”

“아, 아닙니다! 저 같은 일개 시종에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내 몸만 괜찮았어도 네게 상을 내렸을 텐데.”

“그런 건 바라지 않습니다. 주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걸요. 시키실 일이 있다면 뭐든 하명하십시오.”

그 말에 신영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면목이 없지만, 네가 그리 말한다면 부탁할 것이 있구나. 네가 조금 더 고생하여 나를 좀 부축해 줄 수 있겠느냐? 무사들을 지금 바로 불러모아야겠다.”

신영이 팔을 뻗으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뜻밖의 치하에 놀랐던 당욱이 황급히 다가와 그의 몸을 지탱했다.

“상태가 이리 좋지 않으신데 어딜 가려 하십니까. 무사들을 불러 모으신다는 건, 혹 멀리 가시는 겁니까?”

“그분이 그리 언질도 없이 갑자기 이동하셔야 했을 정도라면 뭔가 가문에 큰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육문이 하나가 되어 호시탐탐 주가의 전복을 꾀하고 있으니 도무지 경계를 늦출 수가 없구나.”

“신영…….”

“그래. 내가 신영이지. 한데 신영이 되어 어찌 그분까지 움직이셔야 했을 중대한 일을 모르는 척할까. 하여 그분을 따라가 보려 한다.”

낮은 목소리로 그리 말한 신영이 당욱을 보며 덧붙였다.

“하여 그곳까지 가야 하는데 혹 네가 보필을 좀 해 줄 수 있겠느냐. 부탁한다.”

‘이런 몸으로도 가문을 위해 이리 애쓰시다니.’

“그럼요. 당연히 제가 할 일입니다.”

그의 진지한 목소리에 당욱이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영의 상처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당욱이 천천히 그를 부축해 방에서 빠져나갔다.

‘그래. 오히려 이런 몸을 하고 있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주상현이나 일보관처럼 눈치 빠른 놈들의 방심을 불러올 수 있을 테니까.’

신영이 저를 단단하게 받치며 걷는 당욱을 가느다랗게 좁힌 눈으로 응시했다.

‘이놈을 먼저 먹어 치우고 그다음 주상현을 유인해야겠어.’

계산을 마친 신영의 눈빛이 먹이를 앞둔 뱀처럼 야비하게 번뜩였다.

* * *

콰앙!

세화는 다시 한번 영력의 채찍으로 검은 결계를 내리쳤다.

공격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결계에도 영향이 가는지 순간순간 흐릿하게 결계가 사라지는 빈도가 높아졌다.

키아악-!

그때 결계 너머로 마치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가 사납게 흘러나왔다.

공격을 받을수록 때때로 흐릿해지던 새까만 영력이 대기를 거세게 진동시키며 움직였다.

쿠구구구궁!

세화는 마치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흔들리는 결계를 응시했다.

곧이어 노도 같은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시야를 하얗게 물들인 빛이 사그라들 때쯤엔 새까만 결계가 허공에서부터 얼음이 녹아 없어지듯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주가의 하늘을 뒤덮은 어둠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어둠이 아니었다.

창공을 뒤덮은 밤의 한 자락처럼 보이는 무언가였다.

하늘을 온통 차지한 새까만 것이 유선형으로 움직이며 노을이 가득한 하늘을 가로질러 모습을 드러냈다.

교룡이었다.

쿠구구궁!

거대한 용의 본신이 중강 너머에 안착하자 그 무게를 받아 낸 땅이 우르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언덕 위로 곧장 쏟아지던 붉은 햇빛이 삽시간에 가려지며 사방이 어두워졌다.

코를 막고 싶을 만큼 역한 시취가 세화가 있는 곳까지 진하게 날아왔다.

교룡이 움직일 때마다 뚝뚝 떨어지는 검붉은 핏방울은 마치 산처럼 흙 위를 부식시키고 있었다.

“……교룡.”

그럼에도 용이었다.

그것을 백기하도 느낀 것 같았다.

그녀가 결계를 공격하는 사이 백가의 얼음 방벽 안쪽, 쓰러진 무사들을 보고 온 백기하가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채 그녀의 옆에 서 속삭였다.

“정말…… 용이군.”

일찍 정신을 차린 무사들 역시 굉음과 함께 찾아온 땅울림에 이변을 느끼고 황급히 백가의 결계 밖으로 뛰쳐나왔다.

“―!!!”

마치 하늘을 가릴 듯한 크기로 그들의 앞에 자리해 앉은 교룡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그대로 멈춰 섰다.

참 이상하게도.

저물어 가는 태양 아래, 검붉은 색으로 반사되는 교룡의 흑요석빛 비늘은 썩어 가는 시취를 풍기면서도 더없이 위엄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마주쳤던 새빨간 눈동자 역시도 오래된 지혜들을 빠짐없이 제 안에 채운 듯 깊어 보이기까지 했다.

세화의 표정이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그들은 이제껏 저 교룡을 조금 우습게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능력은 대단할지 모르나 교룡과 일부인의 관계를 알게 된 이상, 교룡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의 실마리는 그들 손에 있다고.

다른 이의 생명으로 본신을 덕지덕지 이어 붙인 상태이니, 그 저주의 반동만 보주가 아닌 교룡 자신에게 가도록 한다면 제법 쉽게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을 수도 있겠어.’

소매 안쪽으로 감춘 그녀의 손이 긴장으로 인해 조금 안쪽으로 말려들었을 때였다.

-기세 좋게 불러낼 때는 언제고 뭘 하는 거지? 입술이 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냐.

강 너머에 서 있는 세화와 백기하,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커다란 얼음의 방벽을 확인한 교룡이 물었다.

마치 귀가 아니라 파장으로 전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니면 내 본신을 확인하고는 이제야 협상을 할 생각이 조금이나마 든 것이냐.

머릿속을 울리듯 오싹하게 날아오는 목소리에 마른 침을 삼킨 무사들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수많은 전장에서도 늘 용맹하던 이들의 얼굴이 제법 희게 질려 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버틴 이들도 다리가 후들거렸고, 개중 심약한 이들은 다리가 풀린 듯 검으로 몸을 지탱하기도 했다.

세화가 변화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게 물으니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뭐라?

저 계집이 드디어 저를 보고 겁을 집어먹기라도 한 건가?

세화의 말에 교룡이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말을 해도 이미 늦었다. 이제 와 두려움에 목숨을 구걸한다 한들 내가 네년을 살려 둘 것 같으냐. 이미 네년의 하늘을 찌를 듯한 방자함에-.

“내 말은 네 하는 꼴이 황당하다는 것이었는데.”

-……뭐라?

“그렇지 않으냐. 내게 먼저 악몽을 보낸 것도 너고, 치밀하지 않은 그 잔수작을 부수며 할 말 있으면 직접 날아오라 한마디 던졌을 뿐인데. 마치 대단한 협박이라도 받은 양 허겁지겁 달려와 놓고는 나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뭐라 하다니.”

그녀가 용의 거대한 몸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덧붙였다.

“뭐, 꼴을 보니 알 만하구나. 살려달라 하고픈 것이냐.”

-너!

분노한 교룡의 몸에서 흑색 악기(惡氣)가 끓어넘쳤다.

불꽃처럼 새빨갛게 타오르는 눈은 동공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네년이 도통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그가 세화를 보며 이를 갈 듯 말을 건넸다.

-그래. 마음껏 지껄여라. 이곳에 있는 이들이 네년 눈앞에서 죽어 나자빠져도 그 혓바닥이 계속 그렇게 유연할지 내 확인해 봐야겠으니.

“한쪽 눈알이 터져 나간 채 제 수하와 혈족들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밀어 넣은 네 혓바닥도 아직 제법 쏠쏠히 굴러가는데, 나는 그러지 못할 이유라도?”

-네년이 그래도!

“환상 속에선 분명 붉은 눈 두 쪽이 다 보여 내가 얼마나 염려했는지 네가 알까.”

그녀가 한쪽만 남은 교룡의 붉은 눈을 바라보며 맑게 미소지었다.

“한데 터져 나간 눈알이 이리 그대로라니. 얼마나 기쁜지.”

-주세화―!!

당장이라도 하늘을 가르고 땅을 다 뒤엎을 듯한 기세로 교룡이 갈라진 음성을 폭발시켰다.

세화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일부러 교룡의 분노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을 노기로 헝클어 놓을수록 자신이 노릴 수 있는 허점도 조금이나마 더 많아질 것이다.

“너는 지금껏 날 만날 때마다 장담했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내 목숨을 빼앗고, 내 주변에 있는 이들을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할 거라고.”

-너―.

“그러니 제발 이젠 그 힘을 좀 보여 봐. 매번 똑같은 협박, 똑같은 패배. 다음엔 뭔가 다를 거라는 똑같은 다짐들. 그런 것 말고 말이야.”

교룡의 호흡이 음산하게 거칠어졌다.

입에서 새까만 연기를 흘려내는 거대한 교룡의 몸체를 다시금 위아래로 훑어낸 그녀가 교룡을 도발했다.

“쓸모도 없는 네 그 협박 따위, 이제 들어 주기 지루할 정도니까.”

-너!!!

그 순간 평야 전체가 새하얗게 밝아지고 땅이 끓어오르듯 요동쳤다.

발작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교룡이 입을 벌렸다.

-……!!

새까만 검은 연기조차 집어삼키며 폭사된 거대한 불꽃 기둥이 단번에 그들 모두를 덮치며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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