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6화 (196/254)

콰앙! 쾅!

그 말과 동시에 지진이라도 난듯 지축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내 금이 간 어둠 사이로 차츰 빛이 스며들었다.

뒤이어 세화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짙은 어둠과 검붉은 불꽃들이 단번에 터져 나갔다.

새벽을 피하는 밤의 잔재들처럼, 걷힌 그림자들 사이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

세화가 산등성이 사이로 지는 노을을 응시했다.

환상은 그리 길게 느껴졌는데 막상 현실 속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언덕 아래로, 야영을 위해 막사를 치던 무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어둠이 저 무사들 역시도 악몽 속으로 끌고 들어간 듯싶었다.

한데 모두가 저리 쓰러졌다면, 그 역시도 어둠 속에 끌려간 걸까?

‘그는 어디 있지?’

놀란 그녀가 주변을 살폈다.

언덕 아래, 마른 풀이 버석하게 부서지는 땅 위에 백기하가 쓰러져 있었다.

수려한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것을 본 그녀의 안색도 대번에 창백해졌다.

‘안 돼!’

정신없이 내달려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제 영력을 끌어 올려, 오색의 결계를 그의 몸 위로 덮었다.

“백기하! 당신 괜찮아요?! 정신 차려요!”

“쿨럭쿨럭!”

오래지 않아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며 열렸지만, 작게 열린 눈꺼풀 사이로 보인 눈은 여전히 안개가 낀 듯 흐렸다.

그는 희게 질려, 마치 맨몸으로 눈밭에 던져지기라도 한 듯 몸을 떨고 있었다.

늘 앞장서고 그 무엇보다 강하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보다 ……하게. 오직 그것만.”

낮게 가라앉다 못해 탁하게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둠에서는 빠져나온 것 같은데, 아직 정신이 들지 않은 걸까?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그의 팔을 잡은 세화가 제 영력을 보태려 끌어 올릴 때였다.

백기하는 피가 흐르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을 짓씹었다.

“지켰어야 했는데…!”

퍼엉! 펑!

어마어마한 살기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와 그녀 주위의 메마른 땅 위로 순식간에 서리가 내렸다.

아플 정도로 세찬 분노가 연신 쏟아져 내렸다.

그가 어떠한 광경을 보았는지 알 것 같아서. 간신히 밀려오는 감정을 삼켜 낸 그녀가 그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백기하.

백기하.

그의 이름을 반복해 불렀다.

그러자 그녀를 밀어내려던 움직임이 점차 잦아들었다.

“백기하.”

이어 그가 제 앞에 있는 이가 누군지를 확인하고 눈을 깜빡였다.

“……세화?”

“응. 나예요.”

“정말 그댄가?”

“맞아요.”

세화가 반복되는 질문에도 꼬박꼬박 눈을 맞추며 대답했다.

강하게 팔을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 싶더니 그대로 다시 허겁지겁 끌어안겼다.

“그대를 구하지 못했어.”

“괜찮아요. 다 꿈이에요. 환상이잖아요.”

“……그래. 환상이어야 해. 현실이 아니어야 해.”

“맞아요. 당신은 나를 구했으니까.”

세화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백기하가 그녀의 뺨에 조심히 손을 가져다 댔다.

“진짜 살아있는 거지?”

“정신 차려봐요. 자꾸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에요. 내가 교룡을 도발해 둔 데다가 무사들이 모두 같은 능력에 당해 쓰러졌어요.”

세화가 언덕 아래에 쓰러진 이들을 눈으로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녀의 말에 언덕 아래를 확인했던 백기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빨리 깨우지 않으면 정신이 붕괴될지도 몰라요.”

“됐어. 이런 일까지 그대가 나설 필요는 없어.”

백기하가 다급히 일어나는 세화를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매가 매섭고 푸르게 번뜩였다.

“내가 부숴 버린 것들이 죄 환상이라니. 그럼 이곳에서도 한 번 더 분풀이를 해야겠군.”

설원의 색으로 이루어진 영력이 그의 몸을 중심으로 솟구쳐 올랐다.

새파랗게 변한 그의 동공이 세로로 찢어지며 유연한 짐승의 몸체로 변용했다.

거대한 백호로 변한 백기하가 언덕 위에서 울부짖었다.

그러자 짧게 솟은 털들이 술렁이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수만 개의 얼음 파편들이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며 생성됐다.

“────!”

단번에 날아간 그것들이 무사들의 위로 폭우처럼 세차게 내려꽂혔다.

백가의 무사들은 조금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위를 짓누르는 검은 그림자들을 눈부신 빛과 함께 산산이 찢어발기며 터뜨렸다.

곧이어 새하얀 얼음의 방벽이 무사들의 진지를 둘러싸고 생성됐다.

흐리게 남았던 그림자들의 잔재마저 빠르게 흐르는 물살을 만난 듯 흔들리다 이내 안개처럼 부스스 흩어져 버렸다.

쿵.

마른 벌판이 순식간에 흰 눈밭으로 변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안광이 형형한 짐승의 모습을 한 백기하가 사기로 덮인 결계를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주가의 영지를 뒤덮고 있는 결계가 세차게 요동쳤다.

마치 비명을 지르듯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이내 귀를 찢을 듯한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얼음 방벽 안의 무사들과 달리, 언덕 위에 있던 세화는 그 비명 같은 파장이 가져오는 힘의 여파를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살결이 찢기는 듯 찌릿찌릿 진동하고 소름이 돋았다.

“뭔가가 생각처럼 잘 안 되고 있나 본데요. 그러니 기회는 지금이에요.”

거대한 백호가 동의한다는 듯 목을 울렸다.

결계를 지켜보던 날카로운 두 쌍의 눈동자가 빠르게 반대 방향으로 흩어졌다.

새파란 백호의 몸은 얼음 방벽 속, 또 하나의 결계 안에 갇혀 있는 일부인에게로.

노을을 받아 붉게 빛나는 세화의 발걸음은 중강 너머를 뒤덮은 결계를 향해 움직였다.

세화의 손이 언덕을 내려가다 긴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다.

걸어가며 손으로 그것을 대강 다듬었다.

“끝까지 이리 시간만 끌 참인가? 정말 실망인데.”

가느다란 가지 위로, 불꽃 같은 영력이 노을보다 진하게 뒤덮으며 솟구쳐 올랐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강제로 끄집어내는 수밖에.”

그녀가 팔을 휘둘렀다. 그 움직임은 단순해 보였으나 결과는 단순하지 않았다.

나뭇가지를 통해 채찍처럼 날아간 긴 영력의 파장이 그대로 검은 결계에 박혀 들었다.

콰앙!!!

거대한 폭발음이 귀를 찢었다.

자욱하게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서 있던 세화가 또다시 들고 있던 긴 나뭇가지를 곡선으로 내리쳤다.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파동이 결계를 찢을 듯 달려들었다.

콰앙!!!

* * *

쿠구구궁! 쾅!

이전의 난동에서도 살아남았던 전각들은 계속된 진동에 속절없이 부서져 내렸다.

그 가운데서 사취로 얼룩진 기다란 무언가가 요동쳤다.

-……!!

교룡의 입가로 검붉은 피가 쉬지 않고 쏟아져 내렸다.

끔찍한 고통이었다.

사방에 썩은 내가 가득했고 반짝여야 할 비늘 사이로는 새까만 농이 뚝뚝 떨어졌다.

안간힘을 쓰며 버티곤 있으나 지금 그의 몸 상태는 점점 더 말이 아니게 나빠지고 있었다.

오부인이 죽고 일부인이 사라지면서, 본래는 그들이 받아야 했을 저주의 부하가 교룡의 몸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나마 일부인이 가까이 다가왔던 조금 전엔 제법 능력을 사용할 만큼 몸이 회복되는 듯했으나.

‘백기하 네 놈이……!’

한 번 더 백가 신수의 결계가 단단히 선 탓에 일부인과의 연결이 다시금 끊어져 버렸다.

이미 오부인을 잃은 상태였지 않나.

거기다 보조 보주였던 칠부인의 영혼 또한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그의 몸에 내리꽂히는 통증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보주가 죽을 줄이야.’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결계를 통해 수많은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어 간신히 이 정도로 유지할 수 있었지만.

‘이대로 있다간 정말로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결코 깰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제약을 깬 이가 이미 있지 않은가.

보주가 하나 더 사라진 것만으로도 이렇게 몸이 망가지고 있으니 혹 중심이 되는 일부인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건 안돼. 지금 그 여자를 데려와야 해. 평생 어둠 속에 갇혀 이 고통을 다 흡수할 수 있도록!’

악몽은 교룡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그는 가장 두려워할 과거를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끄집어올리는 방식으로 제 수하들을 공포로 지배했다.

그리고 그 고문을 가장 많이 당한 이는 일부인이었다.

‘진작에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을 부셔 놓았어야 했는데.’

쿠웅!

그때 결계가 나직이 울었다.

쿠웅!

또 한 번. 흔들렸다.

적이 그의 결계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 겁 없는 년이……!’

교룡의 붉은 눈이 당장이라도 붉은 핏물을 떨어뜨릴 듯 무섭게 치솟았다.

온몸에서 새까맣게 피어오른 진한 사기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네년이 그깟 악몽을 하나 풀었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이런 분노는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처음이었다.

그년이 아끼는 이들을 죄다 시신조차 찾지 못하도록 갈가리 찢어내지 않고는 결코 풀리지 않을 분노였다.

‘눈앞에서 백가 반편이 새끼의 모가지를 뜯어 삼키면 그년 표정이 제법 볼 만하겠지.’

오로지 신수가 되겠다는 그 단 하나의 소망을 위해, 해 보지 않은 짓이 없었다.

그 소망을 달성하기까지, 고작 몇 년의 시간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이제 와 나를 멈추게 할 작정이라고?’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어! 결코!

시취가 진동하는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검은 흑룡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회색빛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의 적들이 있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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