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했던 고문 때문일까?
가슴 한구석에선 뭔가가 이상하다 외쳤으나 그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먼 곳에서,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새빨간 눈동자 한 쌍이 그녀를 보며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불쾌하고, 소름이 끼쳤으나 그뿐이었다.
머리가 계속 멍하고 둔탁해 생각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칼날의 날카로운 감촉만이 무엇보다 선명했다.
“그대로 누르세요, 아가씨.”
뱀처럼 차가운 손이 다가와 세화의 손을 잡았다.
신영의 무사에게 잔뜩 맞아 힘없이 늘어져 있던 영선의 손은 어느새 떨림이 멎어 있었다.
무겁게 짓눌리는 듯한 머릿속으로도 그 변화가 이상해 세화의 시선이 영선을 향하던 그때였다.
사방을 가로막은 석벽 아래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마치 안개와도 닮은 검은 연기는 밀실을 천천히 메우기 시작했다.
맑아지려던 세화의 시선이 다시금 둔탁하게 가라앉았다.
검을 쥔 손이 연신 움찔거렸다.
이 검은 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을 지배하는 것은 이 검은 연기뿐만이 아니었다.
순응해.
모든 걸 그저 포용해.
거스를 수 없는 어떤 절대명령이 그녀의 팔다리를 짓누르는 듯했다.
“……읏!”
머리가 깨어질 것 같아서 미간을 찌푸린 세화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사이 검은 연기는 투명하게 변해 사라졌다.
영선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그쳤다.
“왜 손을 다시 내리셨어요. 강하게 눌러서 이걸 박아 넣으시는 거예요. 하실 수 있죠?”
“……영선아.”
“오늘 모든 불행을 끝내시는 거예요. 그럼 원로어른과 장부인, 도련님들도 모두 무사하실 거고, 우리 역시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
“그래요. 이 불행은 다 아가씨로부터 비롯된 것이니까요.”
그 말에 세화의 시선이 영선을 향했다.
아직 목을 베지 않았건만 가슴 한편이 미어지듯 고통스러웠다.
그 순간 먼 곳에서 다시금 살기 어린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하나 바람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는 밀실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또 왜요. 하기 싫으세요?”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아직도 살고 싶으세요? 우릴 그렇게 괴롭게 다 참수대에 올려놓고선. 우리는 모두 가죽이 벗겨진 채 죽었는데, 아가씨는 살고 싶으세요?”
영선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위로 솟았다.
“그런 게 아니면 왜 망설이세요? 증명해 보세요. 혼자만 살고 싶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시라고요.”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이 자매에게 그녀는 목숨보다 더한 것도 줄 수 있었으니까.
머리가 무겁고 시야가 탁해질수록 빨리 그녀를 위해 이 목숨을 끊고 싶었다.
하지만.
“그대는 건강해야 해.”
“건강, 해야 해. 알았어? 절대로 아프지 말고. 슬프지도 말고.”
“주세화.”
그 목소리가 그녀의 손을 잠시 망설이게 했다.
‘그를 한 번만이라도 더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는 머리로도 그것 하나가 못내 아쉬웠다.
너무나 아쉬워 자꾸 그의 목소리를 곱씹어 볼 만큼.
‘그 모든 일이 다 꿈이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그 다정했던 손길도, 내게만 향했던 부드러운 시선과 목소리도 다 꿈이라는 것이겠지?’
“나는 그대가 다치는 게 싫어.”
“그대를 사랑하니까.”
‘그럼 이 모든 기억들 역시도, 달콤한 말들 역시도 다 꿈이라는 거겠지?’
그 모든 것들이 다 환상이었다니.
얼마나 바랐으면 그런 꿈을 다 꾸었을까.
절망스럽다 못해 스스로가 우스울 정도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 사실이 뼈가 녹고 살이 찢기는 것보다도 더 아픈 듯하여.
저 때문에 이곳에 떨어진 영선을 눈앞에 두고도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환멸이 들어서.
단번에 제 목을 찌르려 그녀가 칼날을 고쳐 쥘 때였다.
“결국 하기 싫으신가 보네요.”
짜악!
얼굴을 일그러뜨린 영선이 세화의 뺨을 내리쳤다.
“이리 비겁한 년인 줄도 모르고, 너 같은 것도 주인이라고 섬기고 있었으니.”
“영선아!”
“자매라고? 하! 네 하찮은 목숨으로 날 구할 수 있다고 했잖아. 그럼 너는 당연히 나를 구해야지!”
영선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당연히 우릴 위해 목숨을 바쳐야지!”
“!”
한데 그 순간이었다.
영선의 목소리 위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누가 아가씨더러 구해 달라고 했어요? 제가 부탁하기라도 했느냐고요!”
‘……어?’
“절대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셔선 안 돼요. 아시겠어요? 아가씨의 목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요.”
‘어라.’
이건 대체 무슨 기억이지?
그렇게 소리치던 건 대체 누구였지?
“여기예요, 아가씨. 여기 있어요!”
“쏘시고 싶으신 대로 쏘세요!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
이 손에 화살을 쥐여 주며 그렇게 말하던 건 대체 누구였었지.
살기로 번뜩이는 얼굴을 하고 세화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간 영선이 그것을 높이 치켜들었다.
하지만 악귀처럼 일그러진 그 얼굴을 보면서도 다시는 자신을 위해 목숨 걸지 말라며 애원하던 얼굴이 더 선명했다.
뒤는 자신들이 지키겠다며 해맑게 웃는 자매들의 얼굴이 보이는 듯도 했다.
“아가씨의 목숨은 저희가 지킬 테니 아가씨께선 그저 원하시는 대로 나아가세요!”
……어떻게 잊고 있었지?
그 순간 영선이 칼날을 내리꽂았다.
시리게 빛나는 은빛 검날이 제 목덜미를 뚫기 전 손목을 잡아챈 세화가 제 몸 위에 올라탄 영선을 거칠게 끌어 내렸다.
악을 쓰며 달려드는 그녀를 발로 걷어찬 세화가 이를 악물고는 철창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이게, 아니야.’
감각을 차단하듯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영력을 끌어 올렸다.
‘돌아와.’
하지만 마치 통로가 막힌 듯 힘은 공중에 퍼져 사라질 뿐,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돌아와. 어서!!’
안개가 낀 듯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기억 사이로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석양이 지던 붉은 언덕 위에서 자신을 든든히 끌어안고 있던 팔의 주인과 그 순간 그들을 덮쳐 오던 검은 안개의 존재.
그리고 그 언덕에서 제가 무엇을 고민했었는지까지.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힘이 강한 부름에 응하며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목숨 같던 너희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지.
창백하게 갈라지고 부르튼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식으로 날 막아 보겠다고?’
일부인이 가엾어? 애원하던 그 모습에 내 모습을 봤다고? 흰 보주 위를 덮친 내 사기의 흔적이 부끄러워?
사고의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이것이 온전히 제 생각이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전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개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그 순간 다시금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강하게 명령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용서하고, 품고, 사랑하라고.
조화를 깨선 안 된다고. 순리를 따라야 한다고.
세화의 입매가 비릿하게 휘었다.
교룡의 힘만 있었다면 훨씬 더 빨리 이 기분 나쁜 환상을 깰 수 있었을 텐데.
‘신수들이 따라야 하는 조화가 교룡의 계략을 도와주고 있었을 줄이야.’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애원하던 일부인이 불쌍하다고?
아니. 자신은 그 일부인이 갓난아이의 몸을 빼앗아 우는 행세를 하고 있어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불쌍하더라도, 그녀에게 몸을 빼앗겨 죽어 나간 이들보다 더 불쌍할까?
그들이 부린 더러운 욕심 때문에 고통 속에 죽어 갔던 내 소중한 이들보다 더 불쌍할까?
백기하에게 변질된 제 보주를 보이는 게 부끄럽다고?
“그는 그런 일로 날 절대 비난하지 않아.”
내가 그 어떤 모습을 보인다 해도.
‘그는 절대 날 비난하지 않아.’
어느새 주변은 다시 어둠이었다.
정체된 공기의 냄새를 매캐하게 풍기던 밀실의 광경도, 그녀를 노려보던 영선의 형상도 지워졌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무엇보다도 잔인해질 수 있었다.
홀로 악귀가 되어 연옥으로 떨어지는 것 또한 거리끼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 내 머릿속에서 꺼져.”
세찬 영력의 불꽃이 그녀의 몸 주위로 솟아올랐다.
주변의 어둠을 태우고 거센 악몽을 날려 버렸다.
“교룡, 이번 일만큼은 네게 감사해야겠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신수들이 따라야 한다는 그 잘난 조화에 휘말릴 뻔했어.”
그녀의 비릿한 웃음에 어둠이 연하게 흔들렸다.
“그나저나 고작 이딴 환영이 전부야? 그 기나긴 세월 동안 환계와 인계를 지배하겠다는 야망을 불태우며 키워 낸 능력이 고작 이거라니. 그렇다면 정말 볼품없다 못해 한심한데.”
“…….”
“이뿐이라면 차라리 백가에 봉인되었던 삿된 그림자랑 다시 만나는 게 더 나았을 거야. 안타깝게도 그쪽이 조금 더 재미있었거든.”
그 순간 불꽃이 매섭게 끓어올랐다.
검붉은 용암이 원을 그리며 세화를 좁혀왔다.
안광이 형형한 붉은 영력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세화의 곁에서 나부꼈다.
세화 역시 그 불꽃 안쪽, 검은 어둠 사이로 보이는 새빨간 눈을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고작 이런 결계조차 단번에 파훼하지 못하고 끌려다닌 주제에 자만하지 말아라.
연옥의 불길 끝에 선 그림자가 섬뜩하게 이를 갈며 경고했다.
-너는 잘도 빠져나왔지만 다른 놈들도 그럴까? 백가 그놈은? 다른 무사들은? 그놈들은 다 어쩌고 있을까?
그림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자 동공이 뱀처럼 세로로 찢어진 눈이 불룩하게 휘었다.
-내 안개가 지금 그놈들의 목을 틀어쥐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거다.
일렁이는 불길이 마치 그림자의 즐거움을 대변하듯 거세게 타올랐다.
“뭘 원하는데?”
불꽃이 손을 뻗듯 다가왔다.
-영단을 바쳐. 그들을 살려 달라고 빌어.
형형히 빛을 내는 새빨간 안광이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며 속삭였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그럼 또 아느냐. 목숨만은 살려 넘겨줄지.
“…….”
교룡의 동공이 더욱 날카롭게 좁혀들었다.
-뭐가 우습지?
웃고 있는 세화를 본 어둠 속 교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우습냔 말이다!
“그럼 우습지 않게 생겼어? 넌 지금 일부인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고 있잖아.”
쉬이 그치지 않는 웃음을 한참 만에야 가라앉힌 그녀가 교룡을 향해 빈정거렸다.
“이 안개가 정말 네 수족이나 다름없다면, 그래서 사람들을 죽이고 일부인을 빼내 갈 수 있었다면 그것부터 했겠지. 한데 안 했잖아. 목을 쥐고 있느니 어쩌니 하지만, 정작 이 안개로 우리에게 재수 없는 꿈이나 꾸게 한 게 다잖아. 왜 그런지 내가 맞춰 볼까?”
그녀의 눈빛이 언제 탁하게 무너졌었냐는 듯 번뜩였다.
날카롭게 어둠 속에서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녀는 백가의 결계 안에 있거든. 헌데 너는 그 백가의 결계를 파훼하긴커녕 일부인을 데려갈 작은 틈조차 벌릴 수 없었던 거야. 그래서 이런 짓을 한 거지.”
흔들리는 어둠을 응시하던 세화가 이를 물었다.
“너 같은 놈이야 이런 악몽이 두려울지 모르지만 난 이런 걸로는 이제 무너지지 않아. 과거는 이미 바뀌었으니까. 그러니 이딴 시답잖은 짓은 그만하고 인계에서 못다 겨룬 승부나 가려 보는 게 어때?”
잔인한 살기를 적자줏빛 눈동자에 담은 세화가 어둠 저 건너편, 타오를 듯 붉은 눈을 하고 있을 교룡을 향해 제안했다.
“내게 와. 이쪽으로 와라, 교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