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4화 (194/254)

* * *

“……일어…. ……어나!”

강렬한 통증이 세화의 배를 강타했다.

“!”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고통에 그녀가 배를 부여잡으며 눈을 떴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세차게 잡아당겼다.

“일어나라고 했지!”

두툼한 손바닥이 날아와 그녀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짜악!

“한 번 말할 때 제대로 들으면 서로 좋을 것 아냐.”

고통은 컸으나 그녀는 제 볼을 부여잡을 생각도 못 한 채 눈만 껌뻑였다.

‘……뭐지. 왜 이자가, 신영의 무사가 또 내 앞에 서 있는 거지?’

이자는 내가 분명 죽였는데.

백기하가 준 소원을 사용해서 시간을 되돌려서, 영단을 찾으러 온 신영의 무사들을 분명 활로 쏴 죽였는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잠시 그를 멍하니 응시할 때였다. 무언가 다리 위로 쏟아졌다.

“아아악!!”

머릿속을 복잡하게 휘저어놓던 모든 생각이 단번에 사라지고 끔찍한 고통만 남았다.

불에 지져진 듯 살이 끓어오르는 다리를 부여잡고 싶었다.

하나 머리카락을 한 손에 감아 목줄처럼 끌어당기는 커다란 손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거 생각보다 살을 많이 녹이는데? 신영께서 별로 좋아하시지 않겠군.”

“뼈만 녹이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 한 번 더 쏟아 봐.”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극심해 도무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아파. 아파. 아파.’

그 순간이었다.

치이익!

다시 한번 뭔가가 그녀의 다리 위로 쏟아졌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땐 사방이 어두웠다.

먼 곳의 탁자에서 작은 촛불 하나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악취가 코를 자극했다.

신영의 지하 밀실 감옥. 그녀는 이곳에 오 년째 갇혀 있는 중이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로 몸을 지탱하며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짚으며 기듯이 구석으로 다가간 그녀가 차가운 돌벽에 제 몸을 기댔다.

고작 이만큼 움직이는데 폐가 터질 것처럼 아프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끔찍했던 다리의 상처는 그새 제법 아물어 있었다.

죽여서는 안 된다는 명을 이행하기 위해 약을 뿌려 놓은 듯했다.

온갖 오물로 가득한 습한 바닥을 뒹구느라 그녀의 몸은 악취로 범벅이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 역시도 멀쩡한 곳이 없었다.

“아…….”

문득 움직인 다리에서 거센 통증이 몰아쳐 힘없이 이를 악문 그녀가 몸을 웅크렸다.

‘뭐지 대체. 난 이 지옥을 벗어났던 게 아니었나?’

지금 제 상황을 환상이라 치부할 수도 없었다.

어떤 환상이 이토록이나 통증도 냄새도 선명할 수 있을까. 온몸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무력감 역시도 그 순간 그대로인 것을.

밀실의 석벽은 오랜 세월 늘 그랬듯,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단단히 서 있었다.

계단과의 사이를 막아선 철창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아무도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처럼 그리 굳건했다.

‘꿈, 이었구나.’

지저분한 그녀의 볼 위로 투명하고 뜨끈한 것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꿈, 이었어.’

그녀는 한 번도 벗어난 적 없이 내도록 이곳에 있었고.

시간을 되돌려 죽은 가족과 소중한 이들을 구한다는 꿈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난 적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고통보다 세차게 몰아치는 절망감 사이에서 아프도록 자각했다.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차라리 보여 주지나 말지. 그런 일들을 겪게 해 주지나 말지. 그랬다면 이 공간, 이 순간을 견뎌 내는 것이 더 편했을 텐데.

그녀가 그렇게 절망할수록 이곳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웃는 것도 같았다.

더 괴롭게 해 주리라, 살기로 번뜩이는 눈을 빛내며 경고하는 것도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바람조차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곳을 누가 지켜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한데 그때였다.

저 멀리, 이 밀실로 들어오는 계단 위쪽으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가 서둘러 제 얼굴을 덮은 젖은 것들을 닦아 냈다.

그대로 누군가에게라도 무릎 꿇고 싶게 만드는 절망의 마음 역시 표정에서 지웠다.

저들은 분명 그녀가 괴로워하면 괴로워할수록 즐거워하며 더욱 심한 짓을 고심할 테니까.

그러니 무슨 짓을 당하더라도 표정에 드러내지 말자고.

또다시 약으로 살갗을 녹이고 고문하더라도 조금 전에 그랬던 것 같은 약한 모습은 보이지 말자고.

그리 다짐하며 무감각한 시선을 밀실 구석 어딘가로 흩뿌렸을 때였다.

“뭐야. 깨어 있었어? 다행이네. 선물을 가져온 참이라.”

“읍!! 읍!”

“영, 선아?”

그런 그녀의 결심은 신영의 무사들이 모습을 보이자마자 깨어졌다.

그들의 거친 손아귀 아래 익숙한 얼굴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선아!!”

사내들이 영선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성의 없이 풀어내자 영선도 세화를 보며 소리쳤다.

“아가씨! 아가씨! 살려 주세요!”

영선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그 순간 영선을 짓누르고 있던 사내가 영선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짜악―!!

“시끄러워! 무슨 소릴 그렇게 귀따갑게 질러대는 거야!”

콰직!

“아아악!”

“영선아!!”

“그래. 소릴 지를 거면 차라리 이렇게 지르던가.”

영선의 한쪽 다리를 부러뜨린 사내가 잔학한 웃음을 지으며 세화를 돌아봤다.

“어? 저년이 저리 반응하는 건 또 처음 보는데.”

기듯이 철창으로 다가온 세화의 손이 쇠기둥들을 움켜쥐었다.

절대 부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목이 부러져 나갈 듯 그것을 쥐고 흔들었다.

동요하는 세화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사내가 다시금 영선의 남은 다리 한쪽을 세차게 짓밟았다.

콰직!

“아악!!”

“안 돼! 하지 마. 하지 마!!! 영선아! 영선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반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눈앞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가는 영선의 모습을 보며 세화가 울부짖은 순간 예견된 불행이 그들을 찾아왔다.

퍼억! 퍽!

사내가 무차별적으로 영선을 구타하기 시작했다.

발로 차고 짓밟고 엉망으로 피가 터질 때까지 조금도 쉬지 않았다.

“영선아! 영선아!”

세화가 그것을 막으려 해도 그들 사이엔 거대한 창살들이 촘촘히 세워져 있어 뻗어진 손이 영선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그만둬!! 제발 그만둬! 뭐든 할게!! 나한테 하면 되잖아!! 제발 그만두라고!”

악을 쓰고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빌었음에도 사내의 행동은 거리낌 없었다.

오히려 그런 세화의 모습이 더없이 즐겁다는 듯 낄낄 웃으며 더욱 힘주어 바닥으로 쓰러진 영선의 몸을 내리쳤다.

그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그가 신음조차 내지 못하는 영선의 머리채를 잡고 철창을 열었다.

“그래. 곧 돌아올 테니 잠시 상봉이나 하고 있으라고. 그런 후에 이별하면 더욱 괴로울 테니.”

비릿하게 웃은 그가 철창문을 다시 닫아걸었다.

서둘러 기어간 세화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영선의 몸을 끌어안았다.

“영, 영선아. 어, 어째서 너까지. 어째서.”

흐린 눈을 껌뻑이며 힘겹게 뜬 영선은 세화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금 울기 시작했다.

“아가씨 무슨 소리세요. 이게 다 아가씨 때문이잖아요.”

“……뭐?”

피범벅이 된 얼굴 위로 핏발 선 눈을 형형히 치뜬 영선이 소리쳤다.

“뭘 놀라고 그러세요. 모르셨어요? 모두 다 아가씨 때문이잖아요. 아가씨만 없었어도, 아무도, 아무도 죽지 않았어요!”

“……영, 영선아.”

“아버지가 그리 무참히 살해당하실 일도 없었고, 원로 어른과 장부인께서도 무사하셨을 테고, 도련님들이 그리 잔인하게 목이 잘리실 일도 없었고요!”

온 얼굴을 일그러뜨린 영선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 이리될 일도 없었고 다른 자매들이 죽을 일도 없었어요. 아가씨께서 언감생심 소가주님과의 혼약을 꿈꾸지만 않았어도 말이에요!”

“……아냐. 아니야. 난, 나는 난 그저 가문을 위해 백가에 다녀온 것뿐.”

“아뇨! 아가씨는 그저 공을 세우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소가주님의 격에 맞는 존경을 얻기 위해. 이후 주가의 가모로 잡음 없이 올라서기 위해 공을 세우려 욕심을 부렸어요!”

“…….”

“아가씨 때문이에요. 다 아가씨 때문이라고요!”

비명 같은 목소리가 세화의 가슴을 찢어 놓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고. 그건 정말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믿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저 때문에 공연히 이런 모습이 되어야 했던 영선에게 못내 미안해, 무슨 일을 해서든 변상해 주고 싶었다.

제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미안, 미안.”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뭐가 달라져요? 우리 상황이 뭐가 나아지냐고요!”

“영, 선아.”

“도대체 왜 살아 돌아오셔서. 차라리 죽지. 당신은 거기서 죽었어야 했는데!”

핏발 선 눈으로 영선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래요. 맞아. 아가씨. 아가씨는 죽었어야 해요.”

“나, 내가…….”

“네, 아가씨. 아가씨만 없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될 테니까.”

어느새 나타난 칼을 그녀의 손에 쥐여 준 영선이 울던 얼굴 그대로 웃었다.

그리곤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밀었다.

“제발요. 아가씨.”

그런 영선의 눈에서 검은 사기가 흘러나왔지만, 날카롭게 벼려진 은색 단검을 가만히 응시하는 세화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죽어 주세요. 제발. 우리 모두를 위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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