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도 잊은 눈동자가 한껏 크게 뜨이던 순간이었다.
일부인의 목덜미를 강하게 낚아챈 세화가 그녀를 마차 밖으로 끌어냈다.
그녀를 뒤따라 왔던 백기하의 손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들을 둘러싸고 새하얀 결계가 다시 만들어졌다.
“……보주라고?”
백기하가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허억…….”
그사이에도 저주의 반동은 강하게 일부인을 짓누르고 있었다.
흙바닥 위에 그대로 쓰러지는 그녀의 피부 위로 선명한 상처들이 흐린 사기와 함께 드러났다.
“나를 아주 우습게 봤구나.”
세화가 허리를 굽혀 일부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타고 있는 마차 주위로 신수의 결계가 둘러쳐져 있어. 지금도 그렇고.”
지금도 마차 주위를 감싸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결계가 그들의 주변에 세워져 있었다.
“신수의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사기는 없어. 있다면 당신의 말마따나 교룡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무언가뿐이겠지.”
세화는 그간 계속 고민하고 있었다.
백기하는 교룡이 벌이는 짓의 반동이 분명 교룡의 목숨조차 위험하게 만들 정도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이득을 위해서라면 몇천, 몇만 명의 목숨도 가차 없이 희생시켰다.
지금도 저런 결계를 세워 생명력을 있는 대로 흡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교룡이 제 목숨이 위험해질 만한 일을 한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어.’
분명 제게는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을 터.
하여 세화는 백기하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교룡이 대체 저런 행위의 반동을 어떻게 피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춰 고심했다.
무엇을 사용하는 걸까. 주가에 그런 영기가 있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혹시 백기하가 시간을 되돌릴 때 사용했던 것과 같은 소원을 사용한 건가?
‘이것도 아니야. 일단 교룡은 신수가 아니고, 만약 소원을 사용할 수 있다 하더라도 교룡이 불사를 포기할 리가 없어.’
더구나 교룡의 목숨줄을 움켜쥘 정도의 역할을 이 여자가 하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대체 무슨 관계여서? 어떤 작용에서?
그때, 생각이 났다.
용의 보주가.
적룡의 영단을 얻기 전까지, 그녀는 신수이되, 온전한 신수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용이 되며 얻었던 그녀의 보주는 아무런 기능도 능력도 없었다. 그저 새하얀 구슬일 뿐.
하여 그녀도 보주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것의 쓸모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적룡의 영단을 얻고 완벽한 용의 신수로 거듭나면서, 그녀는 백기하에게 뭔가를 주고 싶었다.
그녀에게 하나밖에 없고 가장 중요한 것을.
하지만 역린과 소원은 선물한다 해도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지 않을테니 몰래 감춰서 주어야 했고.
그러고 나니 남은 것은 보주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 기능도 능력도 없지만, 용에게 단 하나밖에 생기지 않는 것이니 특별한 선물이 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에 하나뿐이라는 사실 말고는 그다지 중요한지 알 수 없는 보주를 꺼내 들었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일까.
새하얀 보주에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검은 그림자가 흐릿하게 스며 있었다.
‘이게, ……뭐지?’
처음엔 이 그림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것이 그녀가 신영의 저택에서 일으킨 난동의 결과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보주 자체에는 아무런 기능도 능력도 없지만, 이것이 완전히 검게 변한다면 교룡보다 더한 악룡, 혹은 사룡으로 변해 자아조차 잃어버릴 것이란 것도 깨달았다.
‘이런 걸 그에게 보일 순 없어.’
당황한 그녀는 흐린 사기의 흔적이 남은 보주를 제 품 안 깊숙이 숨겨 두었다.
헌데 그 짧은 시간, 신영의 저택에서의 일이 반영된 것만으로 보주가 이렇게 되었다면 교룡의 보주는 벌써 만신창이여야 하지 않을까?
‘한데도 인계에서 만난 교룡은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지.’
수많은 생명을 빨아먹고도 보주가 멀쩡할 리 없건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대용품이 있기라도 한 건가?’
대용품이라는 말에 몸 바꾸기를 거듭하던 주가 혈족들에게 잠시 생각이 미쳤다.
‘맞아. 생각해 보면 일부인은 계속 죽고 싶어 했지. 삶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닌데 몸은 왜 계속 바꾼 걸까?’
그것이 이상하긴 했다.
‘그저 죽을 때 죽더라도 젊은 몸이 가지고 싶어서? 더 어려지고 싶어서?’
이 가설은 맞지 않았다.
어머니를 구하러 저택에 잠입했을 때 오부인은 분명 싫다는 일부인에게 억지로 영력을 흡수하게 했었던 것이다.
환족은 몸 안에 영력이 많을수록 더 아름다워진다.
그런 영력을 흡수하는 걸 싫어했던 것을 보면 일부인은 제 외모의 미추에는 관심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몸을 바꾼 이유 또한 그녀가 원한 일이 아닐 거야. 신영의 팔부인 중 누구 하나 나이가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없는 것을 보면 노쇠하여 바꾼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이지 않을까.
일부인의 명줄을 억지로 길게 늘리고 있던 다른 부인들의 행동처럼.
누군가가 일부인의 몸을 강제로 바꾼 것이다.
‘부인들은 죄인의 몸을 쓴 적은 없지. 신영의 저택에서 다른 혈족들에게 모습을 보여야 할지도 모르니까. 한데 가장 중요한 일부인은 밀실 감옥에 갇힌 죄인, 사연주의 몸을 사용했어.’
마치 아주 급하게,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서둘러 몸을 바꾸기라도 한 것처럼.
왜 그래야 했을까.
그때는 전쟁 중도 아니었고, 주가에서 사용하는 신묘한 약들이 어지간한 외상은 순식간에 낫게 해 그토록 서둘러야 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사연주의 몸을 일부인이 차지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머니가 납치당하고, 오라버니들은 실종되고.
‘……그리고 인계의 가뭄.’
수만 명을 죽인 혈호에 몸을 담가 음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
교룡과 이어지는 강한 결속력.
저주의 반동. 반복된 신체의 교체.
누군가가, 살아 있는 이가 용의 보주를, 저주의 흡수를 대신할 수 있는가?
그 근원적인 물음만 제외하고 난다면 모든 상황이 이 여자를 교룡의 보주라 일컫고 있었다.
“이 여자와 교룡의 관계를 끊어 놓기만 한다면 저주의 반동은 교룡을 향하게 되겠군.”
“하지만 쉽지 않을 거예요. 보주와 용의 결속을 어떻게 깨는지 알지 못하는 데다가, 자칫 잘못하면 결속을 깨기 위해 사용한 영력들이 이 여자를 통해 교룡에게로 전달될 수도 있으니까요.”
“정말 쉽지 않네. 그럼 어쩌지?”
“억지로 몸을 바꿔 가며 살아왔던 것을 보면 이 몸으로 대신 받을 수 있는 저주에는 분명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그걸 기다려 보면 어때요?”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잖아. 마냥 저 결계를 유지하도록 방치하는 일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내 생각엔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긴 해요. 잠깐의 탈선만으로도 보주에 사기가 깃들었으니, 저렇게 대대적으로 일을 벌인다면 며칠이면 될 것 같기도 하고요.”
“…….”
“왜요?”
“…아니야. 그럼 결계에 더 가까이 가 보는 것도 좋겠군.”
“그게 무슨 개소리들이야! 너희에겐 이타심이나 동정심따윈 없는 거야?!”
그 말에 일부인이 울부짖었다.
“난 죽을 수도 없어! 그런데 너희를 위해 그 고통을 있는 대로 견뎌내라 이거야? 그런 너희가 교룡과 다른 게 뭐야! 생명 알기를 우습게 보는 교룡과 너희가 대체 뭐가 다른데!”
“우스운 소릴 하네.”
써늘하게 식은 눈빛이 일부인을 내려다봤다.
세화가 일부인에게 다가갔다.
“내가 처음부터 그랬어? 분명 약속했었지. 사실대로 말하라고. 차라리 내게 도움을 청하라고. 그러면 당신은 꼭 내가 죽여 주겠다고. 그런데 당신은 내게 어쨌지?”
한 발 한 발 다가설수록 한기 어린 기운이 내려앉았다.
“사실을 숨기고 그저 어떻게든 내게서 적룡의 영단을 얻어 낼 생각만 했지. 제약이 걸려 함부로 입을 열 수 없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말이야.”
“그건 거, 거짓말이…….”
“왜 이래. 거짓말이 맞잖아. 당신은 지금껏 당신이 교룡의 보주라는 사실을 숨겼고, 계속해서 숨길 요량으로 제약이 걸려 있다 둘러댄 거지. 보주라면 분명 교룡과 단단히 연결되어 있을 테고. 당신을 통해 교룡에게 힘이 전달되는 것이 꺼려질 내가 영력을 나눠 주지 않을까 봐서.”
“……그, 그건.”
“가장 중요한 사실을 제외하고서라도, 당신의 말엔 진실이 하나도 없었지. 그래 놓고 내게서 동정을 바라? 죽고 싶다는 그 말조차 거짓일지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는데?”
“아, 아니야! 아니야!”
세화의 발치로 엉금엉금 기어간 그녀가 절박하게 울부짖었다.
“미, 미안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도와주지 않을 것 같아서. 잘못했어. 하니 한 번만 도와줘. 제발 날 좀 살려줘. 제발 이 저주가 날 계속 괴롭히게 하지 말아줘.”
그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마를 바닥에 쿵쿵 박았다. 사기로 썩어 가는 살이 찢어지고 터지면서 이마가 금세 피로 붉게 물들었다.
“제발 죽여 줘. 제발, 그만 날 죽여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