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0화 (190/254)

* * *

치이익.

“……으, 큭.”

약이 떨어지는 상처 위에서 마치 불로 지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있는 힘껏 쥐여진 주먹 안쪽으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신영이 이를 악물며 통증을 견뎌 냈다.

“신영. 약을 아무리 써도 상처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일보관이 상처가 낫지 않는 이유가 제 탓이 되기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고했다.

“그년의 영력이…….”

신영의 시선이 제 상처를 살폈다.

오색의 영력에 당한 상처는 어떤 약을 얼마나 들이붓건 조금도 아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 몸일 때 당했던 것과 완벽히 같은 증상이었다.

“오라비들이 내 손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경현이 놈을 시켜 날 이 꼴로 만들어? 그래 놓고 제 목숨만 아까워 인질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 허둥지둥 달아나는 꼴이라니!”

신영이 난장을 일으키고 사라진 주세화를 떠올리며 분노를 터뜨렸다.

그만한 영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룡을 상대할 생각은 안 하고 냅다 도망을 가?

그 와중에 교룡의 눈은 쓸데없이 왜 터뜨려서 이 상황을 만들어! 죽일 거면 아예 죽이던가! 싸울 거면 아예 싸우던가! 대체 왜!

그 오라비들을 영지선으로 데려가 살점을 하나하나 포를 떠 가며 죽일 거라 이를 갈았다.

하나 그러면서도 두려워졌다.

‘이대로 있다가 그때처럼 영혼이 몸에 고착되어 버리면? 그러면 더 이상 몸을 바꿀 수 없는 것 아닐까.’

끔찍한 상상이었다. 언제든지 현실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상상.

‘아들을 하나 더 낳아 뒀어야 했는데.’

힘주어 쥐어진 신영의 손이 나직이 진동했다.

신영의 핏줄은 이 몸으로 끝이다.

몸을 바꾼다면 더 이상 신영의 자리에 앉지 못할 수도 있다.

‘다른 놈은 또 누가 있을까. 영력이 많은 놈. 혹 피가 합당치 않아도 영력으로나마 신영으로 세울 수 있을 만한 그런 놈이-.’

자연스럽게 그의 눈이 제 상처를 돌보는 일보관에게로 향했다.

시선을 느낀 일보관이 힐끔 시선을 들었다.

“!”

마치 잡아먹을 듯 예리하게 저를 살피는 눈을 눈치챘다.

필사의 노력으로, 그는 애써 제 주인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척 자연스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나 저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익히 알고 있는 그의 손이 조용히 떨렸다.

‘……정녕 내 차례까지 온 것이라니. 안 돼. 절대 그럴 순 없다. 내가 어떻게 지금껏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일보관이 상처에 조심스레 약을 바르는 동안 머리를 쥐어짰다.

주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만 했다.

“신영. 상처가 악화되기만 하고 있는데……. 혹시 교룡께서 회복을 도와주실 수 있기 전까지만이라도 행정은 상현 원로에게 맡기심이 어떠하십니까.”

“상현?”

“예. 그분이라면 신영과 명윤 원로 다음으로 영력이 풍부하시지 않습니까.”

“…….”

“피도 신영의 혈족에 비할 바는 못 되나 주가 중에서는 손꼽히는 순혈이시니, 그분이라면 잠시 가주 대행을 맡으신다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상현이라. 그렇지. 주상현. 그놈이 있었지.”

“예. 신영은 환계 전체에서 가장 고귀한 분이 아니십니까. 신영의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상처가 더 악화되지 않도록 잠시 대리를 두고 치료에만 전념하시는 게 어떠실까 충언드려 보았습니다.”

신영의 눈매가 가늘어지자 일보관이 서둘러 제 눈을 내리깔았다.

그 안에 담긴 공포와 안도가 주인에게 보이지 않도록 조심했다.

‘이렇게 해 놓으면 당분간은 주인의 주의가 상현 원로에게 향하겠지.’

하지만 이대로 안심할 수 있을까?

‘만약 상현 원로에게 결격 사유가 보이기라도 하면 또다시 주인의 마수가 내게로 향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버리고 달아나자니 그것도 마뜩잖았다.

일보관의 시선이 자연스레 제 손등을 훑었다.

젊지 않은 손. 제법 오래 사용한 몸뚱이.

만약 달아나야 한다면 딱 한 번만 더 어린 몸으로 바꾼 다음에 달아나고 싶었다.

‘상현 원로에게 관심을 갖게 해 두었으니 당장 죽지는 않을 테고. 주인도 어차피 몸을 바꿀 테니 그때 함께 부탁하면 한 번 더 내 몸을 바꿔 주지 않을까.’

일보관의 시선이 바쁘게 지나치는 생각의 흐름만큼이나 바쁘게 흔들렸다.

‘어린 몸을 골라야 해. 이제 막 탈피를 마쳤으면서 영력을 크게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몸이 누가 있지?’

그 순간 생각이 조금 전 신영이 언급한 주명윤의 두 아들에 미쳤다.

‘있구나. 괜찮은 놈들이!’

주인은 그 두 놈의 살점을 포를 뜨고 사지를 찢어 죽일 거라 하였으나.

‘몸 바꾸기 후 내가 오라비인 척 연기한다고 말하면. 하여 주세화의 숨을 끊어 놓고 오겠다 하면 핑계도 딱 좋고. 어렵지 않게 몸 바꾸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희열도 잠시. 제 새로운 몸이라고 생각하니 혹 교룡의 몸부림에 부서진 전각들이 그들이 있던 밀실을 덮치진 않았는지 덜컥 염려가 들었다.

‘확인해 봐야겠다. 지금 당장!’

“신영. 이 약이 전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데, 혹시 다른 약은 들지도 모르니 약을 바꿔 다시 가져와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렇게 해라.”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빠르게 방을 빠져나왔다.

달리듯 복도를 지나 무너진 전각들과 다행히 불행이 비껴간 건물들 사이를 지나쳤다.

각 전각 사이의 정원은 본디 푸른색이어야 했으나 지금은 황량한 흑백 세상만 이어져 있었다.

교룡의 사기가 진하게 녹아들어 있는 공기는 조금 달린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하나 몸을 바꿀 생각에 들뜬 일보관은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밀실을 향해 달려갔다.

하여 밀실이 있던 건물이 무사한 것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기쁘던지.

건물 자체에 환계의 초기에 만들어진 강력한 결계가 걸려 있기도 하였고, 저택의 심부에 있던 탓에 등극식장과 거리가 있어 살아남은 듯했다.

허겁지겁 다가간 일보관이 결계를 헤치고 문을 열었다.

등을 든 채 계단을 내려가는 그의 표정엔 환희가 가득했다.

하지만.

“…….”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음에도 그 안엔 아무도 없었다.

비워진 지 한참이 지났는지 공기마저 써늘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일보관이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쳤다.

‘대, 대체 누가 그놈들을 풀어준…….’

하나 지금 범인을 찾는 일이 의미가 있는가?

“허겁지겁 도망치느라 제 오라비들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나 본데. 언제든 그 연놈들을 다시 불러올 인질이 내 손안에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되지.”

그렇게 말하고 이를 갈던 주인의 모습이 생각이 나자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크, 큰일이다.’

이건 새로운 몸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나는 정말로 죽은 목숨이다.’

덜덜 떨리던 그의 다리가 어느 순간 계단을 줄행랑치듯 뛰어 올라갔다.

탈출 전 제가 가져갈 수 있는 것들을 계산하는 그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 * *

널따란 평야를 달려 나가는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백기하와 세화, 일진의 무사들은 제대로 쉬지조차 않은 채 빠르게 이동해,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이틀 이르게 중강변에 도착했다.

강변은 결계의 영향인지 푸른빛이라곤 전무했다.

바싹 마른 잡초들만이 일찌감치 스러져 누런 흙빛을 하고 있었다.

건기로 수위가 낮아진 강변에 선 세화의 눈빛이 저 멀리 보이는 검은 반구를 매섭게 응시했다.

“저게 그 결계군요.”

검은 영력은 마치 창살처럼 주가 영지를 틈 없이 감싸고 있었다.

“강변의 식물까지 모두 죽을 정도라면 안의 상황은 더욱 심각할 텐데. 대체 교룡은 제 행위의 반동을 어찌 견디는 것이지?”

“반동이 없을 수는 없나요?”

“그럴 수는 없어. 반드시 자신에게도 돌아오게 되어 있거든. 한데 산 채로 몸이 썩어 가는 듯한 그 끔찍한 고통을 대체 어찌 참아 내고 있는지를 모르겠군.”

“일단 강변 주위를 돌며 결계에 약한 곳이 있지는 않은지 한번 찾아보도록 해요.”

그들이 무사들을 멈춰둔 채 나란히 말을 달려 주변을 살폈다.

하나 결계는 생각보다 더 컸고 힘이 강력했다.

잠입은커녕 어디를 흔들고 어디를 파쇄해야 할지 추측조차 어려웠다.

그때였다.

최장명이 그들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표정이 제법 다급했다.

“그 여자가 두 분을 찾습니다.”

“그 여자? 일부인?”

세화는 사실 일진의 무사들과 함께, 이곳으로 일부인을 마차에 태운 채 함께 데려왔다.

적룡의 영단을 제게 줘야 한다는 그녀의 말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교룡은 몰라도 팔부인들은 이 여자를 제법 아끼는 듯 보이지 않았던가.

그런 만큼 만일의 경우 인질로 사용할 생각으로 동행시킨 것이다.

“그 여자가 왜?”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상태가 뭔가 이상하긴 하여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한번 가 보시지요.”

“이곳에 오기 싫어했잖아. 달아나려 연기를 하는 건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닌 듯합니다.”

최장명이 확신을 담아 단번에 부인하며 덧붙였다.

“산 채로 몸이 썩어 가는 중이니까요.”

* * *

잘 관리된 가늘고 곧은 손 위쪽으로 길게 뻗은 손톱이 까드득, 마차의 창틀을 긁었다.

“악. 흐으…….”

괴로움에 신음하는 일부인의 볼 위로 새까만 얼룩이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걷어 올려진 긴 소매 위로 보이는 하얀 팔뚝에도, 마치 부패하듯 악취를 풍기는 반점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런 고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얼룩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범위가 아주 조금씩 줄어들었다.

숨조차 참으며 고통을 견뎌 내던 일부인의 호흡이 가파르게 상승하며 떨렸다.

그녀는 정말로 이 주가 영지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하여 백가로 잡혀갈 때는 순순했던 그녀도 이곳으로 끌려오는 과정에서는 무사들과 제법 실랑이가 있었다.

그만큼 주가 영지에 다시금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끔찍하기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교룡의 결계가 섰다는 말만 듣고 그 결계가 어떤 의도로 만들어졌는지조차 알지 못했건만.

영지선으로 다가갈수록 교룡이 벌이는 짓에 대한 반동이 그녀의 몸에 나타났다.

‘내가 왜 대체…….’

창틀을 부여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체 왜 내가! 대체 언제까지!’

바라지도 않은, 반편이 신수의 보주 역할을 강제로 떠맡게 된 이후로 아주 오랜 시간.

‘통증이 이전보다 더 심해졌어.’

그녀와 일곱 부인은 지금껏 이 고통을 나누어 감내해 왔다.

하나 나머지 일곱 부인은 그저 보조 역할일 뿐.

보주의 가장 강력한 중심축은 일부인, 그녀였다.

‘오부인이 죽은 것만으로 이렇게 균형이 무너질 줄이야.’

팔부인 중 누군가 죽는다면 그만큼의 몫이 나머지에게 공평히 나눠질 줄 알았건만.

저주의 반동은 온전히 일부인 그녀에게만 더해져 쏟아지고 있었다.

‘……난 정말 이대로 영원히 저 교룡이 받아야 할 고통과 저주를 받아 내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건가?’

물론 영원히 살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제가 있던 지하 밀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 어떤 마물의 손도 기꺼이 잡을 것이라 다짐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이런 삶이 밀실에 갇혀 있을 때와 뭐가 다르지? 그때는 매일 고통스러웠지만, 지금은 때때로 고통스럽다는 거?’

“적룡의 영단이 필요해.”

그녀의 시선이 강한 욕망으로 진하게 타올랐다.

“그것만이 이 삶을 끝나게 줄 수 있어.”

그때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의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에요. 당신 괜찮은 건가요?”

적자줏빛 눈동자가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나는가 싶더니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부인의 눈이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그래. 그러니 어떻게든 그걸 손에 넣어야 해. 반드시.’

세화를 응시하는 일부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이 여자를 죽여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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