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낮을 밝히던 따뜻한 햇살도, 하늘을 꽃의 색으로 물들이던 노을도 없었다.
달도 별도 구름도 없었다.
더 이상 아침이 오지 않을 것 같은 회색빛 하늘만 언제까지고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 공간 안에 긴 신음이 가득 찼다.
주가 혈족들은 이미 엉망이었다. 가족을 잃거나 사지를 잃거나.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처 입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신영의 등극식에 참석했던 여파였다.
등극식은 긴 환족의 생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특별한 예식이 아닌가.
하여 그 역사의 한 장면에 함께 하려 했건만.
“의원……. 의원은 아직이냐. 약은!”
그곳에 참석했던 이들은 파괴된 저택에서 간신히 돌아와 의원을 찾으며 나뒹굴었다.
그 지옥도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다행이었지만.
“이 결계는……. 새로운 신영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라더냐!”
회복도 하기 전에 재앙 같은 결계 속에 갇혀 나갈 수조차 없었다.
하늘과 사물의 빛까지 지워 버린 결계는 마치 그들의 생명력을 빨아먹는 듯했다.
체력을 소진시키고 생각의 부유를 막고 상처를 부패시켰다.
잃은 이들에 대해 장례조차 치르지 못했건만 주가 혈족들은 제 감정과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기만 했다.
도와달라 말할 이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절망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
지금껏 주가는 신영의 혈족이라는 자부심으로, 그들이 환계 그 어떤 가문보다 뛰어나고 고귀한 피를 가지고 있다 자부해 왔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꼴은 어떠한가.
믿을 수 없게도 현재 신영은, 아니, 그를 신영이라 불러도 되는가?
주가의 오랜 신물이었던 적룡의 영단도 빼앗기고, 설상가상으로 지극히 자신을 사랑하던 아버지를 죽이고 자리를 찬탈한 반역자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 이를.
게다가 그는 적룡의 등장을 눈으로 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두를 버리고 달아나지 않았던가.
산 채로 불꽃을 뒤집어쓴 채 그를 향해 살려 달라 뻗는 손을 냉랭하게 걷어찼었지.
그 장면을 본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그때의 신영을 떠올리던 주가 원로 주상현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 놈을 소가주라고 부르고 있었으니. 그놈은 사실 신영도 아니야. 그놈이 우리 주가를 망친 것이야. 그놈이…!’
그때였다.
하인 하나가 조용히 주상현이 누워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고해바쳤다.
“뭐라? 소가주의 호위가 날 찾아와?! 천령 그놈이 맞느냐?”
“예, 객을 맞이하실 상태가 아니신 걸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원로 어른을 뵈어야겠다며…….”
“일 없다! 당장 쫓아내거라! 떠나지 않는다면 강제로 끌어내거라!”
“…….”
“또 뭐냐!”
“그자가 만약 원로 어른께서 자신을 쫓아내라 하신다면 이 말도 전하라 하였습니다. 원로 어른의 몸을 당장이라도 치료할 수 있다고요.”
“……뭐?”
“어찌할까요.”
“…….”
‘그놈은 소가주의 심복인데. 그런 놈을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정말 그를 회유하러 약을 가지고 온 것일지도 몰랐다.
망설이던 그가 명령했다.
“들여라!”
* * *
천령은 소식을 가지고 들어간 이가 답을 가져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저택의 문 앞에서 미동조차 없이 서 있는 그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등극식장에 뿌려진 화염과 먼지 폭풍, 폭발을 온몸으로 받아 낸 그의 상태는 사실 처참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제 손안에 놓인 푸른 영단 하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세화와 재회했던 그 밤, 그녀가 천령에게 준 것이었다.
천령은 밀실을 열 수 있는 주경현의 영단을 넘기고, 세화에게서는 주경현을 지킬 수 있도록 영력이 그득 담긴 검 한 자루와 주경현의 상태가 나빠졌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치유의 영단을 얻었다.
‘하지만 사용할 기회조차 없었지.’
천령의 시체 같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슬픔과 격통, 망연, 후회 등이 제멋대로 뒤섞여 그의 심장을 또다시 진창으로 끌고 들어갔다.
떨리는 입술을 물며 그날 주경현은 천령에게 그렇게 명령했다.
“어떤 순간에도 내 곁에 오지 말아라.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분명 아버지께선 내게 신영밖에는 되실 수 없으실 테니.”
“어떤 치료를 받는다 한들 이 몸은 오래갈 수 없다. 하니 마지막 순간만은 신영이 아닌 부친으로서의 아버지를 뵙고 싶구나.”
그가 당신을 아들로 여겼다면 결코 이런 일들을 벌이지 않았을 거라고.
그 어떤 이유로도 당신의 몸을 빼앗지 않았을 거라고. 죽어가는 당신을 밀실 저 지하에 처박아 두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런 말들은 제 주인에게 이미 소용이 없었다.
주경현은 이미 떠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저 이 검이라도 꼭 지녀 달라고. 그렇게 말하며 세화가 준 단검을 쥐여 주는 수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천령도 신영이 그리 독하게, 망설임조차 없이, 한순간에 아들을 죽여 버릴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달려갔을 땐 이미 늦었다.
그때를 떠올린 천령의 얼굴이 다시금 고통으로 무너져 내렸다.
손안에 든 푸른 영단을 힘껏 움켜쥐었다.
모여 있던 이들을 한껏 집어삼킨 교룡은 이후 신영의 저택의 전각들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당장 죽진 않을 것 같다 여겨지면, 달아난 신영도 망쳐진 의식을 재개하러 돌아올지 모른다.
‘그 꼴을 두고 볼 수야 없지.’
제 아들을 잡아먹고, 아들의 영혼마저 부숴 버린 그런 놈은 더 이상 그가 따라야 할 위대한 존재가 아니었다.
“들어오시랍니다.”
그의 소식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갔던 시종이 대문을 열며 말했다.
차갑게 고개를 끄덕인 천령이 거대한 나무 문 사이로 발을 집어넣었다.
그의 주인이 죽으면서 그가 생을 이어 갈 이유 또한 사라졌다.
그럼에도 어찌 주인을 만나러 가며 선물조차 가져가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당신께서 이번 생에서 듣지 못했던 그 한마디. 제가 그의 영혼을 당신이 있는 곳까지 끌고 내려가 그곳에서 들으실 수 있게 하겠습니다.’
눈을 번뜩이며 천령이 빠르게 원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 * *
성익권은 대전 앞을 가득 메우다 못해 담장 밖에까지 늘어선 이들을 보며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이게, 다인가?”
그의 질문에 내관이 서둘러 대답했다.
“아닙니다. 대표 격인 이들만 모아 왔고 나머지는 궁 밖에 있습니다.”
“대표, 격만 모아 온 거라고?”
그때 모여 있는 이들 사이로 아는 얼굴이 빠르게 걸어 나왔다.
최덕문이었다.
성익권이 반갑게 그를 향해 손짓했다.
“최 행수, 이리 오시게. 천 부인께도 사람을 보냈으니 그분도 금방 오실걸세.”
“전하, 저는 천한 상인입니다. 어찌 제게 말씀을 높이십니까.”
“하하.”
성익권은 대답 대신 웃음만 흘렸다.
저라고 그걸 몰라서 말을 높이겠는가.
‘이 행수의 아들이 그 천인의 최측근이 된 데다 이 노행수 본인도 그곳에서 넘어온 이라 하는데 편한 말이 나올 리가…….’
“그럼 그분께서 시키신 것들은 다 시행한 것인가.”
“전하께서 각지로 방을 붙여 주시고 관인들을 동원해 수색을 도와주신 덕분에 생각보다 더 금방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다행이야.”
“그럼 내가 말해 둔 것은.”
“맡겨 주십시오. 빠르면 이달, 늦어도 내달 안으로 완벽히 시행해 두겠습니다.”
떠나가는 세화에게 그리 호언장담을 해 두었으니.
혹 시기를 지키지 못할까 봐, 그래서 혹 은인이 그에게 실망하게 되기라도 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지.
세화가 요구한 것은 모두 두가지였는데, 그 중 한 가지가 각지에 흩어져 있는 환족들을 모두 찾아내 한곳에 모아 달라는 것이었다.
인계로 온 환족 중 많은 이들이 최덕문을 통해 정착 자금을 얻어 갔기에 대부분은 최덕문 자신의 힘만으로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거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 이들도 많아 그런 이들을 찾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때였다.
“이들이 전부인가.”
나직한 발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누군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천수아였다.
“천 부인. 오셨습니까.”
천 부인에게 알은체를 한 성익권의 시선이 그녀의 뒤를 살폈다.
영선과 영무라 불렸던 두 여인이 커다란 함을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첫날에도 보았었지, 저 함. 대체 뭐가 들었던 거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의 부인이 이전 그 천인의 어머니라며 그를 만나러 왔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천 부인은 딸아이가 부탁한 일들의 경과를 알아보러 왔다며 자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했으나.
‘천인이 내 궁에 머무는데 신경 쓰이지 않을 리가 없지. 일이 빨리 끝나서 정말 다행이지.’
그렇게 안도하는 성익권에게 천수아가 나직한 목소리로 통보했다.
“그럼 나는 이들과 함께 이대로 바로 떠나도록 하겠네. 그간 수고 많았네.”
“이대로 바로 가십니까?”
그녀의 말에 성익권뿐 아니라 최덕문 역시도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래. 영선아, 영무야. 그것들을 이들에게 나누어 주거라.”
장부인의 명을 들은 두 자매가 함에서 꺼낸 것들을 들고 빠르게 갈라졌다.
대전 앞에 빼곡히 서 있는 이들의 사이로 스며들고는 그들의 손에 무언가를 하나씩 쥐여 주었다.
“자네도 이걸 받게.”
천수아가 최덕문에게도 함 안에 든 것을 내주었다.
“이것은, 헉. 영, 영단입니까?”
“그래. 문을 넘으려면 영력이 안정되어야 할 것 아닌가.”
“!!!”
“왜. 하나 더 필요할 것 같은가?”
“아닙,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간다니. 환계로 돌아갈 수 있다니.
오래도록 절실히 바라 왔지만 그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기에 듣고도 얼떨떨했다.
“아니면 내가 혹시 너무 뜬금없이 급히 말을 꺼낸 것인가? 인계의 모든 것들을 아예 버리고 영영 가는 것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게.”
최덕문의 표정을 오해한 천수아가 빠르게 덧붙였다.
“잠시 외유를 다녀오는 것으로 생각해. 원할 때는 언제든 이곳에 돌아올 수 있으니까.”
“돌아올 수도 있습니까?”
“내가 자네를 어디 밀실에 가둘 것도 아닌데, 발이 있으면 당연히 원할 때 문을 도로 넘어올 수 있지 않겠나.”
최덕문의 시선이 망연해지거나 말거나.
대전 앞에 모인 이들이 죄 영단을 하나씩 손에 쥔 것을 보고 천수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이들은 죄 주가의 누군가에게 가족의 몸을 빼앗기고 불합리하게 추방당한 이들이었다.
환족의 수명은 기니 이들의 가족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고.
‘하니 주가가 지금껏 해 온 일들을 증언하는 데 이들만큼 적격자도 없을 테지.’
“하지만 부인. 이들은 분명 고향으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이들이지만, 저들에게도 미리 알리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을 하러 간다고 이르면 되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천수아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하나 그 안에 들어찬 시선만큼은 매의 발톱만큼이나 사납게 번뜩였다.
“복수가 아니겠나. 자네 가족들의 몸을 되찾아야지.”
‘되찾는다고?’
아내의 몸을…. 그녀를 되찾을 수도 있다고?
망연히 눈을 깜빡이던 최덕문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내의 몸을 되찾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못할 일이 없었다.
“가세나. 복수가 아니어도. 여기 있는 이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해.”
세화와 쏙 닮은, 맹렬하면서도 날카로운 미소가 최덕문을 향해 날아왔다.
“이들이 한꺼번에 환계에 돌아온 것만으로도 잘난 뱀들은 제 모가지를 집어넣고 싶어질 테니까.”
“예, 부인!”
흥분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최덕문이 제 격정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인계에 보내졌던 수만의 환족들 역시도 천수아의 말에 격동을 감추지 못했다.
단순히 고향으로 가는 것이 기쁜 이도 있었고, 상황을 알고 복수를 하겠다며 얼굴을 붉히는 이도 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환계로 가는 것을 택했기에 백가에서 가져온 영단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부족한 양은 최덕문이 황급히 제가 가지고 있는 영단들을 그러모아 채웠다.
그리하여 인계로 보내졌던 수많은 환족들이 그날 문을 넘었다.
고요한 분노가 그들의 눈 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