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254)

* * *

다음 날, 어제보다 한결 가벼워진 얼굴을 한 백기하는 가주들에게 출전을 선언했다.

대외 행동에 여가가 빠질 수는 없기에, 급히 등극식을 마친 어린 여가의 후계자 역시도 가주 위를 들고 백석저에 당도했다.

전군을 동원하는 만큼 준비를 마치는 데는 그들이 출전을 선언한 날보다 시일이 오래 필요했다.

하지만 모든 가주가 교룡에게 더 힘을 실어 주면 안 된다는 데 동의했기에.

준비가 부족하더라도, 그래서 정예 무사들을 먼저 보내게 되더라도 빠른 출진을 강행하기로 했다.

그것이 알려진 후, 백석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출전 준비로 다급했으나 가장 마음이 다급한 이는 따로 있었다.

영채였다.

“아가씨. 다시 한번 생각해주세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

“영채야. 나도 그러고 싶지만, 아버지께서 먼저 돌아오셨을 때 그분의 일을 도와드릴 이가 필요하잖아.”

“꼭 제가 아니어도 되잖아요. 장부인께서 돌아오시면 영선이랑 영무도 돌아올 테고. 그럼 걔네들이 원로 어른을 도우면 되죠.”

“어머니께서 아버지보다 많이 늦으시면? 이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 계획을 실행해 주는 것도 많이 중요해. 그건 네게 맡길게.”

그럼에도 영채가 수긍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세화가 조금 웃었다.

“내가 많이 걱정돼?”

“그럼요. 어떻게 아가씨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영채의 눈가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모두가 떠나 온 주가 영지에 장부인과 도련님들을 구하러 가셨을 때도 그렇지만, 돌아오신 후엔 곧장 인계로 떠나셨죠. 그 이후엔 또 곧바로 주가의 등극식에 참석하시러 가셨고요.”

실제로 그사이 영채는 세화에게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을까 염려를 하느라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했었다.

그렇게 계속 걱정을 반복하며 기다리느니 차라리 아가씨의 앞에서 칼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하는 편이 백번 나을 것이다.

“정말 방해하지 않을게요. 빠져 있으라 하시면 빠져 있고, 땅속에 숨어 있으라 하시면 숨어 있고 나무 위에 올라가 있으라 하시면 그렇게 할게요. 아, 물론 너도 검을 들고 나가 싸우라 하시면 그렇게 할 거고요!”

세화의 표정은 조금 난감해졌다.

영채의 염려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 선발대로 출발할 일진은 주가의 결계를 파훼하고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선공을 하기 위한 선봉대였다.

그런 만큼 시종까지 동행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행동하는 때에 자신만 시녀를 대동할 순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주가의 영지에서 밀려난 혈족들을 모아 오시면 그들에게 주가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설명을 해 줄 이가 필요한데.’

그녀가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발소리 하나가 세화에게로 가까워졌다.

“그냥 함께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아가씨께서는 첫 출전이 아니십니까. 모두가 그 정도는 이해할 것입니다.”

“영공 원로!”

영공 원로는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보다 제법 말라 있었다.

하나 안색과 표정은 처음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밝아져 있었다.

영공 원로의 지원에 영채의 표정이 급속도로 밝아지던 순간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노원로가 세화를 향해 무릎을 굽히며 꿇어앉았다.

“원로! 왜 이러십-.”

“지금 가주께 복직을 청하고 오는 길입니다.”

“!”

“백석저를 비워 놓고 떠나시며 염려되는 것이 많으신 줄로 압니다. 신뢰받지 못할 모습들을 보여 드렸으니 그것에 대해 변명의 여지도 없고요.”

“원로.”

“하여 아가씨께서 허락하신다면 감히 먼저 권속 계약을 청하는 바입니다.”

“원로!! 권속 계약이라니. 그건-.”

“이건 아가씨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희 가주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이미 많은 짐을 어깨에 올리신 그분께서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를 등 뒤에 두신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제가 아니라 백가주께 요청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가주께서는 분명 제가 당신께 권속을 청하는 것보다 아가씨께 권속이 되길 청하는 것을 백배는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

“정말입니다. 제가 오늘 이때까지 보아 온 가주시라면 틀림없을 테니 아가씨께서는 마음을 놓으시지요.”

“하지만.”

세화가 망설이다 덧붙였다.

“원로는 오래도록 백가를 위해 일해 오신 분이고 일찍이 부모를 잃은 그를 오늘 이때까지 보필해주신 분이십니다. 그런 분과 제가 어찌 권속을 맺을 수 있겠어요.”

권속 계약은 노예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죽으라는 말조차 항명 없이 따라야 하는, 모든 것이 한쪽으로 복속되는 계약.

탈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리해야 했던 최장명을 제외하고, 굳이 다른 이들을 그런 상태로 만들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리 생각해 주실 수도 있겠지요. 하나 아가씨와 가주께서는 아주 중요한 전쟁을 눈앞에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영공 원로가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백가에 배신자 따위는 없다는 말씀을, 이제는 입이 찢어져도 드릴 수 없겠지요. 저조차 주가의 손이 어디까지 뻗어져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전 사건으로 알게 되었으니까요. 하니 권속 표시는 그들에게 경고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원로의 눈이 세화의 것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하나가 보이면 그들은 또 다른 이가 있지는 않을까 분명 경계하게 될 테지요. 지금까지 거리낌 없이 행동하던 것을 망설이게 하고, 분명 틈을 만들 것입니다.”

이전, 그녀가 보았던 원로의 눈과는 달리 진심이 가득 담겨 있는 맑은 눈동자였다.

“제가 그 순간을 결코 놓치지 않고 그들을 기필코 발본해 낼 것입니다. 그러니 주가를 맞아 가장 위험한 곳을 지키셔야 할 두 분의 뒤를 제가 든든히 지킬 수 있도록, 잠시나마라도 좋으니 권속의 위치를 제게 허락해주십시오.”

그때, 맑은 목소리 하나가 세화와 영공 원로의 사이로 흘러들었다.

“아가씨. 아버지께서 청하시는 대로 해 주시지요.”

영공 원로의 딸 백효성이었다.

“효성 아가씨, 이제 걸으실 수 있는 겁니까?”

“그럼요. 세화 아가씨께서 영력을 담뿍 들여 치료해 주신 덕입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백효성은 몸이 회복되며 배도 제법 나와 있었다.

그녀가 근원을 스스로 파괴하면서까지 만들어 낸 모든 영력으로 배 속의 아이를 그간 철두철미하게 지키고 있던 덕분이었다.

“한데 효성 아가씨께선 여기까지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차라리 저를 부르시지 않고요.”

“감히 수족이 되어 주인을 부르다니요. 저도 권속이 되려 청을 드리려 한 것을, 아버지께 순서를 빼앗겨 속이 상하던 참인걸요.”

“!”

깜짝 놀라는 세화의 반응을 보며 효성이 나직이 웃었다.

“혹시 저희의 체면 같은 것을 생각해 주시는 것이라면 그런 것은 고려치 말아 주십시오. 죽음을 직면하고 돌아온 저희 부녀에게 망설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백효성의 말에 영공 원로도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저희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두 분께서 등 뒤를 결코 신경 쓰시지 않고 움직이실 수 있도록 저희의 모든 것을 걸고, 백석저와 나머지 다섯 가문을 지키는 일뿐입니다.”

“그러니 권속이 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해 주십시오.”

나란히 앉아 무릎을 꿇는 부녀를 보며 세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둘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죄송합니다, 두 분. 그래도 권속은 맺지 않겠습니다.”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빠르게 덧붙였다.

“두 분의 말씀을 이해하였습니다. 하나 권속의 표시를 보고 경계하는 이들은 분명 제유 원로와 제문주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시킬 의도가 있는 자들일 겁니다.”

“…….”

“주가와 육문 중 어떤 쪽에 붙는 것이 더욱 이득일지를 저울질하며, 혈족들의 위험도 환계의 균형도 고려치 않는 이들이 새로운 시대에 남겨지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화의 적자줏빛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하여 저는 두 분께 더 힘든 싸움을 해 달라 요청드리려 합니다. 권속 계약이 없다면 그런 자들은 저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의 야욕을 더욱 낱낱이 드러낼 테지요. 몸을 사리게 하면서 틈을 만들겠다는 영공 원로의 계획보다 백석저가 더 엉망이 될지도 모릅니다.”

세화가 자신을 멍하니 보는 원로 부녀를 바라보며 조금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여 그런 자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낱낱이 골라내 주십시오. 간을 보다가 저울추를 배신으로 기울이는 이들까지 전부. 저희가 등 뒤를 믿고 맡길 수 있도록 백석저를 평정해 주십시오.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제야 세화의 의도를 알아챈 영공 원로의 얼굴에도 미소가 들어찼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가씨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렇지만 여전히 이것 하나만은 청을 올려야겠습니다. 권속 계약은 말씀대로 하겠으나 전장엔 저 아이를 함께 데리고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효성이 영채를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돌아오실 명윤 원로께 사정 설명이 필요하다 하면 저야말로 적격이지 않겠습니까. 그야말로 몸 바꾸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겪은 산증인인 것을요.”

“하지만 이 아이는 전장에 한 번도-.”

“그건 세화 아가씨께서도 마찬가지이시지 않습니까.”

염려스러운 얼굴로 영채를 돌아보는 세화의 손을 백효성의 손이 감쌌다.

“전장의 상황은 생각하시는 것과 조금 다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실 때도 있으실 거고요.”

백효성의 따뜻한 눈이 세화를 응시했다.

“물론 가주께서 아가씨와 함께하시겠지만, 그러시지 못할 때 아가씨의 마음을 다잡게 하는 역할을 저 아이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영채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럼요! 그럼요! 제가 할 거예요. 제가 아가씨의 몸도 마음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막을 거예요.”

“데려가시지요. 손 하나 까딱하시기 힘드실 순간에 아가씨를 위해 음식을 가져올 시종 하나 없이 떠나신다면 저희도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영공 원로까지 말을 보태자 이번엔 거절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세화는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 *

출병 당일의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이 드러나 있었다.

여섯 가문에서 차출된 1진 오천의 무사들이 먼저 주가와의 영지 경계선을 향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수천의 군사들이 도열해 있음에도 바람 소리조차 세세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사방이 고요했다.

그 앞으로 한 발 나선 백기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무사와 눈을 맞추듯 천천히 제 앞에 도열한 이들을 시선으로 살폈다.

모두의 얼굴과 눈을 마주하고, 그다음에야 그의 입이 열렸다.

“육문의 무사들이여.”

정예 무사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백기하에게 집중되었다.

“이미 모든 상황은 각 가문의 가주를 통해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전과는 달리 각 진영에 신수가 있으니 쉽지 않은 전투가 되겠지.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하며 그가 덧붙였다.

“이번 전쟁이 환계의 역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될지, 우리의 첫발이 만들어 낼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전해지게 될지는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대들이 더욱 잘 알겠지.”

이곳에 서기 전까지 그의 눈 속엔 채 완전히 지우지 못한 망설임이 있었다.

하지만 도열한 무사들의 앞에선 그는 언제 동요했었냐는 듯 육문의 수장, 십 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강력한 지휘관으로 돌아와 있었다.

“환계의 질서를 바로잡고 역사에 우리의 발자취를 남기는 데 그대들이 동참해 다오. 후대에 물려줄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다.”

그가 여전히 숨소리조차 내지 않을 만큼 고요히 그를 바라보는 무사들을 향해 물었다.

“함께해 주겠는가.”

그 말과 동시에 무사들이 발을 굴렀다.

쿵. 쿵.

커다란 궁을 든 이들은 궁 끝으로, 창을 든 이들은 창끝으로 바닥을 치며 다시 한번 바닥을 구르길 반복했다.

오천의 수는 결코 많지 않았다.

하나 영력을 실은 발이 흙바닥 위를 두드리자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리며 세상이 진동했다.

그들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여 대답하는 것 같았다.

조금도 두렵지 않다고.

괜찮다고.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이 순간 가문도 상관없고, 나이와 본신도 상관없이 모든 무사들의 혼과 마음이 하나로 묶이는 듯했다.

그것을 보는 백기하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조금 전보다 확연히 가벼워진 목소리로 수많은 무사들을 향해 외쳤다.

“가서 전 환계에 전하라. 우리가 웅크린 뱀을 꺾을 것이라고.”

백기하의 말 뒤로, 개전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고!”

하여 북풍이 겨울의 시작을 알려 오던 어느 맑은 날.

오천의 군사가 주가 영지를 향해 길을 나섰다.

망설임 없이 말을 달리는 무사들의 제일 선두에는, 전투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얗고 단정한 예복과 붉고 화려한 예복을 걸친 백기하와 세화가.

그리고 밝은 얼굴로 무사들의 틈에서 함께 달려 나가는 영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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