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주가 비장한 얼굴로 세화의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
입이 뚫렸다고 감히 그녀에게 목숨을 내어 달라 청할 때.
백기하는 사실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솟아 당장이라도 강가주의 입을 막고 문밖으로 걷어차 버리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그의 말을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백가주 역시 신수이지만 그가 교룡과 맞설 수 있을까요. 환계가 지금껏 용의 손에 지배받은 것은, 용을 해칠 수 있는 것이 용밖에는 없기 때문인 것을.”
자신은 맨몸으로 이 여인과 주가에 들어가도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게 데리고 나올 자신이 있었다.
수천, 수만의 군사들 앞에서도 그녀를 온전히 지킬 자신이 있었다.
하나 교룡이 끼어들면 그것을 장담할 수 없었다.
강가주의 말처럼 용을 죽일 수 있는 것은 용뿐이기 때문에.
백기하의 눈빛이 어둡게 침참했다.
그녀에게 그대가 굳이 전장에 나갈 필요는 없다고.
교룡은 내가 상대할 테니, 그대는 그대 하고 싶은 일에만 신경을 써도 된다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 몸뚱어리마저 너무 보잘것없는 듯 느껴졌다.
하여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결정을 미루고 대답을 삼키는 일뿐이었다.
뭔가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것도 같은데.
그녀 없이도 교룡과 싸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때 그의 눈가에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와 닿았다.
“당신, 여기에 상처가 났었네요.”
“뭐?”
상처라고? 내가?
“약을 발라야겠어요.”
“아니야, 가지-.”
몸을 일으키는 그녀가 제 눈앞에서 떠나지 않도록 잡아 세울 생각이었는데.
촉.
“!”
“빨리 나아라. 빨리 나아라.”
그녀는 제 몸으로 그를 누른 채 예상하지 못한 온기를 전해 왔다.
“세-.”
“아, 이 옆에도 있었네요.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어서 잘 못 봤나 봐요.”
그리고 다시 촉.
“아, 여기도 있네.”
다시 촉.
그렇게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는 그녀를 백기하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응시했따.
커다란 그의 손이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그녀의 시야가 크게 돌았다.
“!”
“세화. 주세화.”
어느새 그녀는 그의 아래에서 단단한 품에 안겨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겼다. 그의 불안을 손에 잡힌 듯 느끼게 할 만큼.
‘아까 강가주가 발언할 때 표정이 계속 안 좋았던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녀는 오히려 강가주가 그를 두고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 신경 쓰였건만.
‘그가 그런데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육문을 향한 충성으로 말을 돌려야 했을 만큼.’
한데 그 시간 내내 그의 신경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바보같이.’
그녀가 자신이 오기 전까지 홀로 고통을 견뎌냈을 그의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망설이지 말아요. 나는 기쁘니까.”
“뭐가?”
“내가 용이 되어서요.”
“…….”
“그동안 나는 신수라고 하면서도 내가 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어머니를 구하는 자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력이 모두 섞인 채 뭔지 모를 짐승으로 변화하는 일은 나 자신조차 잊게 될 위험 부담을 동반하고 있고.”
세화가 한숨을 쉬듯 덧붙였다.
“그게 아니고서는 각기 다른 영력의 간섭 때문에 신수의 모습으로 변화할 순 있었으나 뭔가 온전한 신수라고 말하긴 어려운 상태였으니까요.”
적룡의 영단 덕분에 그녀는 백가의 영력을 누르고 완벽한 적룡의 신수로 드디어 거듭날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 왔는지 당신은 알까?’
절대적인 신수의 능력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에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게 한 그 신수의 소원과 두번째 역린을 얻기 위해서 그녀는 어떻게든 신수로 거듭나야 했다.
내가 먼저 받은 당신의 목숨들. 그걸 돌려줄 수 있어서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당신은 결코 모르겠지.
“하지만 이젠 당신을 혼자 보내지 않아도 되죠.”
“혼자, 보내?”
“그래요. 난 더 이상 당신 혼자 무언가를 감내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당신에게 보호받고만 있고 싶지 않아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왜 난 보호하면 안 되죠?”
그녀가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저를 보고 있는 까만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알잖아요. 당신이 내가 다치는 걸 두려워하는 만큼 나 역시 그렇다는 걸.”
생채기 하나 나지 않게 서로를 지켜 주고 싶은 마음만은 우리가 같다는 걸.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하라고 했죠? 바로 이게 내가 하고 싶은 거였어요.”
그녀가 웃으며 제 머리 옆을 짚은 그의 팔에 이마를 비볐다.
“어떤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선두에서 달려나갈 당신의 옆에서. 그런 당신을 지키는 일이 내가 가장 원하는 거였다고요.”
“세화.”
“그러니 내 기쁨을 빼앗을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내 가장 강력한 소원 중 하나를 당신 손으로 걷어 갈 생각은 하지도 말란 얘기에요.”
“그러다 그대가 다치면? 그렇다 해도?”
대답엔 망설임이 없었다.
세화가 제가 그의 날개뼈 근처에 새겨 놓은 영력의 무늬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돼. 당신을 지킬 수 있다면.”
그녀의 적자줏빛 눈동자가 어두운 방 안에서도 반짝였다.
신수가 제 불사를 걸고 일으킬 수 있는 단 한 번의 소원.
대체 이걸 얼마나 간절히 바라온 걸까.
그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드러내어 놓고 줄 순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 남자는 분명 그 소원을 자기 자신이 아닌 나를 위해 사용할지도 모르니까.’
하여 그녀는 그것을 그의 등 뒤에 숨겨 놓기로 했다.
언제고. 그가 가장 원하는 소원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었을 때. 그 바람을 이루어 줄 수 있도록.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사랑해요.”
당신을 꼭 지킬 거야. 상대가 교룡이건, 주가이건, 다른 무엇이든지.
“그 교룡 따위가 당신에게 손끝 하나 댈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을 괴롭히려고 하는 건 그게 뭐든 내가 밟아 버릴 거라고.”
“……따위, 라고 부르니까. 고민한 내가 바보 같아지는데.”
“그럼 따위죠. 썩어 가는 뱀 따위가 우리 두 신수의 상대가 돼요?”
“…….”
“그러니 더 고민하지 말고 개전해요. 가주들에게도 알리고, 세상을 향해 공표하고. 더는 주가의 악행을 두고 보지 않을 때가 되었어요.”
“…….”
“그럴 거죠?”
“다치지, 않을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당연히 다치겠죠.”
그녀가 잠시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달빛이 들어찬 방 안을 영롱하게 맴돌았다.
“하지만 그래도 우린 행복할 거예요. 내 복수도 끝내고. 생명을 물처럼 앗아 온 주가를 전복시키고. 모든 일의 근원이었던 교룡을 죽이고. 그렇게 더 이상 당신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만든 후.”
세화가 백기하를 바짝 끌어안았다.
용이 되고 나서 체온이 조금 낮아진 탓일까.
백호의 체온이 마치 불꽃을 끌어안은 듯 뜨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좋았다. 그냥 이 남자가 좋았다. 이 남자의 모든 게 다 좋았다.
“우리는 혼인해서 오랜 수명만큼 행복하게 살 테니까요. 안 그래요?”
“…….”
“백기하?”
대답 대신 그의 입술이 그녀의 것을 덮쳐 왔다.
삼키듯 그녀의 입술을 물고 뜨거운 숨을 뒤섞으며 혀를 밀어 넣었다.
그녀가 입술을 조금 벌린 채 그의 것을 맞아들였다.
‘좋아. 너무 좋아.’
형태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입술을 겹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호흡이 흔들리고 머리가 몽롱해지는 듯했다.
그 전에 한 가지 확답을 받아야 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입술을 조금 밀어내고, 그녀의 온몸을 바싹 끌어안은 그의 눈을 보며 대답을 종용했다.
“그래서 어떤데요. 빨리 대답해요.”
“…….”
“응? 어떠냐고요. 개전할 거예요?”
“……그대의 바람대로.”
그의 굳어졌던 눈매가, 그녀가 이 방 안에 들어온 모습을 발견했을 때처럼 조금 휘어졌다.
“그대가 하자는 일을 내가 반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맑은 그녀의 웃음이 다시금 고요한 방 안에 퍼져 나갔다.
그녀가 약간의 틈도 생기지 않도록 다시 그의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먼저 입을 겹치고, 혀를 뒤섞은 후, 아찔하게 호흡이 출렁이는 입술들을 여전히 맞붙인 채 입술의 움직임으로만 말했다.
“우리는 행복해질 거예요.”
이미 나는 당신의 소원을 한 가지 이루어 줄 수 있게 되었지.
거기다 신수가 되며 얻은 역린을, 어느 순간에도 당신의 목숨을 한 번은 구해 줄 수 있을 그것을 당신 몰래 등 뒤에 심어 두기도 했고.
가장 간절히 바라 왔던 최대의 수익은 이미 얻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은 훨씬 가벼워졌다. 그에게 전쟁을 요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말갛게 웃는 그녀를 백기하는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애틋하고 귀중한 것을 보듯 그렇게 응시하다가, 이윽고 다시금 입술을 겹쳐 왔다.
젖은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맴돌고, 열기 어린 손들이 자연스럽게 상대의 의복을 벗겨 냈다.
목소리가 낮아지고, 이내 갈라진 신음들이 맞물린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뜨겁게 높아진 체온들은 이 밤이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애틋하게 뒤엉켰다.
결코 놓지 않을 것처럼 서로를 힘껏 끌어안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