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254)

뜬금없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앞으로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어서 받게.”

‘……아니, 왜 이런 걸 내게.’

일단 내밀라니 손을 내밀긴 했다.

그 위에 툭, 하고 무언가가 놓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대단히 순도가 높아 보이는 투명한 황금색 영단이었다.

“흡수할 생각이 없어도 돌려주지 않아도 되네. 그러니 한번 고려해 봐 주게.”

그 말로는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는지 강가주가 서둘러 덧붙였다.

“혹시 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말하고.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지원할 테니.”

“하지만 이제 곧 전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강가주께서도 힘을 아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황에서는 제게 과한 선물 같습니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그때 강가주의 어깨 위로 천가주가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세화의 손에 들린 영단을 확인한 천가주의 목에 핏대가 섰다.

“강가주! 자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고 있었는가?!”

그 말을 들은 장가주가 강가주의 반대쪽 어깨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고 사태를 확인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그래, 이 아가씨가 백주천장세화라고 불리는 것이 부러웠던 게군. 강씨가 끼지 못한 것이 억울해 이런 수를 꾸민 거고!”

“이런 구렁이 같은 작자를 보았나. 아무리 그래도 탈피 때 사용된 우리의 영력과 같을 수 없는데. 뒤늦게 다 된 밥상 위에 숟가락을 얹고 싶어 하는-.”

가주들은 어느새 서로에게 존칭도 집어치우고 막말을 퍼붓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었던 세화가 중재하려 끼어들었을 때였다.

강가주가 한발 빠르게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하시지요. 이건 대의를 위한 제 성의입니다.”

“대의?”

“그렇습니다. 교룡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염려하던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염려라니?”

강가주의 안색이 어두워지자 천가주와 장가주의 목소리도 천천히 잦아들었다.

“백가주 역시 신수이지만 그가 교룡과 맞설 수 있을까요. 환계가 지금껏 용의 손에 지배받은 것은, 용을 해칠 수 있는 것이 용밖에는 없기 때문인 것을.”

강가주의 음영 진 눈동자가 세화를 잠시 응시했다.

“교룡이 실제로 모습을 드러냈다면 아마도 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은 자네밖에 없을 걸세. 방대한 영력을 가진 자네에게 이런 영단 몇 개가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는가. 하지만 이나마라도 내놓지 않을 수가 없더군.”

회의실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세화에게 고개 숙인 강가주에게 쏠렸을 때였다.

“이런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스스로 부끄러워질 정도로 미안하네만 다른 방도가 없으니. 감히 청하건대 군장의 선봉에서 교룡을 상대해 주게.”

그가 세화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강가주! 왜 이러십니까. 일어나십시오.”

저를 일으켜 세우려는 손을 조용히 밀어낸 강가주가 세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대가로, 강가는 연합이 아닌 아가씨께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며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겠습니다. 제 일신의 영력을 요구하신다 한들 망설이지 않을 것입니다.”

“……!”

“강, 강가주!”

앉아 있던 이들까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한 세화가 다시 한번 그를 일으키려 하며 말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연합은 아직 강가주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교룡을 아직 제 눈으로 볼 기회는 없었으나 주가의 신수가 얼마나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든 역사와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강가주.”

“그 교룡을 무장도 아닌 이제 막 탈피를 마친 아가씨께 상대해 달라 함은 환계 전체를 위해 목숨을 내어 달라 청하는 일인데.”

강가주가 고개를 들어 세화와 눈을 맞췄다.

“그런 요청을 드리며 제 목숨이라고 아낄 수 있겠습니까.”

강가주가 소매 안에 있던 영단들을 모두 꺼내어 세화의 발밑에 놓았다.

십수 개의 영단이 발끝에서 반짝였다.

“하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어떤 길을 가시건 결코 혼자 가시게 하지 않겠다는, 아가씨의 모든 싸움에 강가가 함께 하겠다는 맹세의 증표입니다.”

회의실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적막해졌다.

모두가 강가주와 세화를 보고 있었다.

가느다랗고 흰 손이 강가주가 내놓은 영단을 주워 올렸다.

세화의 눈이 저를 응시하는 강가주에게로 향했다.

투명한 황금빛 영단들은 대단히 순도가 높았다.

이 정도 영력이라면 아마도 이것을 만들기 위해 강가주는 제 영력의 반 이상을 덜어내야 했을 것이다.

“어차피 제가 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달아날 생각은 해 본 적이 없고요.”

영단에 담긴 힘에서 그의 각오를 짐작한 세화가 강가주를 일으켰다.

이번엔 강가주 역시 거부하지 않고 무릎을 폈다.

“강가주께서 보여주신 희생을 잘 알겠습니다. 교룡과의 싸움에 힘을 보태는 일은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이나 이리 마음을 써 주시고 도움을 주시고자 하시니.”

세화가 제 손에 들어온 영단들을 힘껏 움켜쥐었다.

“말씀처럼 이것들은 돌려드리지 않고 잘 사용하겠습니다.”

“그래 주겠는가.”

“그럼요.”

“강가의 충성 맹세도 받아 주는 것인가.”

“한 가문의 맹약을 저 개인이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육문의 수장께 보내 주시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래그래. 뭐든 됐지. 거절만 하지 않는다면야. 하나 언제든 우리 강가는 아가씨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게.”

“가주께서 이리 많은 영력을 나눠 주시니, 저를 이제 강가로 부르셔도 할 말이 없겠습니다. 가족이 된 느낌인데요.”

그 말에 노가주의 입매에도 처음으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자 한발 늦게 뭔가 낭패한 표정을 지은 천가주와 장가주가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왔다.

“우리 천가도 그럴 것이다. 말하지 않았다고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나도 영단을 주마. 내 영단도 가지거라.”

“무슨. 이미 천가의 영력은 충분하지 않은가. 장가의 영력을 받으시게.”

분위기 파악을 한 진가도 질세라 그 수라장에 끼어들었다.

“아직 없는 영력은 진가의 것이 아닙니까. 응당 진가의 것을 받으셔야지요.”

세화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시지 않으셔도 우린 이미 동맹인걸요.”

“동, 동맹? 가족이 아니라?”

천가주와 장가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천가주보다는 장가주의 안색이 조금 더 좋지 못했다.

“그, 그럼 혹시-.”

“예?”

“그 강가의 영단도 진짜 흡수할 생각인 겐가.”

무슨 그런 당연한 말씀을?

세화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강가주가 끼어들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백주천강장 가모님의 영력 증진은 앞으로 계속 우리 강가에서 맡아 돕겠으니 다른 가주들께서는 염려 놓으시지요.”

저는 양심이 있으니 그래도 혼약자와 부모의 가문보다는 아래에 이름을 놓겠다는 말에 천가주는 안심했고 장가주는 발끈했다.

“아니, 뭐야?!”

* * *

둥글게 떠오른 흰 달이 백석저를 비췄다.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가을을 즐기는 밤벌레들이 풀숲 사이에서 소리 높여 울었다.

작은 발이 시종들이 오가는 복도를 기척을 죽인 채 걸었다.

불 꺼진 복도를 지나는 시종은 제 옆을 누가 지나치는 데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 시종들을 지나 점점 더 인적이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은 세화였다.

발소리도 내지 않으며 계단을 올라 어느 거대한 문 앞에 멈췄다.

백가주의 방이었다.

그곳엔 방 주인과 어울리지 않는 결계가 겹겹으로 방을 막아서고 있었다.

세화가 이 결계를 편 이가 제게 준 영력을 끌어 올렸다.

가는 손 위에서 흰 영력이 존재를 드러내자 소리도 내지 않고 결계가 파훼됐다.

조용히 열린 문 안으로, 그녀는 여전히 기척을 죽인 채 그 안으로 들어섰다.

너른 방 안쪽으로 거대한 침상 위에 백기하가 등을 보이고 누워 있었다.

‘밤에 내가 오는 것을 한사코 거절했었지.’

그녀가 다가가는데도 침상 위에 누운 이는 미동이 없었다.

세화가 그와 동일한 영력을 끌어올리고 신수의 힘으로 기척마저 죽이고 있기는 했지만, 그는 무장이 아닌가.

‘방에 결계를 두르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부터 혹시나 하긴 했지만…….’

단번에 그녀의 침입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그가 지쳐 있는지를 보여 주는 듯해 그녀의 눈빛도 어둡게 가라앉았다.

등을 보이고 누운 남자에게 조심히 다가간 그녀가 들고 온 것 위에 제 손을 겹쳤다.

붉게 빛을 내기 시작한 무언가를 그의 날개뼈 근처에 대고 눌렀다.

조용히 빛나는, 작고 붉은 비늘 하나가 그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드러난 그의 맨살 위에는 작은 문장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그녀의 손등에도 있었던 문장이.

그제야 누군가의 침입을 알아챘으나 동시에 그 침입자의 정체까지 파악한 백기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깜짝 놀란 그녀가 제 손안의 영력을 서둘러 흩어 버렸다.

“……늦은 시간인데, 아직 안 잤어?”

그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쉬이 피로해지지 않는 그의 얼굴엔 채 숨기지 못한 옅은 그늘 또한 드러나 있었다.

분명 그녀가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만 아는 고통을 아무도 모르게 삭인 탓일 것이다.

“어쩐 일이야.”

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쑥 결계를 지우고 침입했건만 그는 그런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향해 돌아눕고, 아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이리 와. 여기 누워. 미장 어른도 안 계신데 온 김에 오늘 여기서 자.”

“그럴까요?”

그녀가 반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서둘러 안쪽을 비워 주었다.

그의 몸을 타고 넘어가 베개를 함께 베고 눈을 맞춘 채 누웠다.

명백히 기분이 좋아진 그의 얼굴에서 잠기운이 빠르게 사라져 갔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풀어 내린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런데 정말 이 밤에 어쩐 일이야. 내가 보고 싶어서 왔어?”

“그것도 있고. 아까 왜 그리 고민했나 해서요.”

“응?”

“가주분들의 의견에 당신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잖아요.”

“아, ……그거.”

“난 그 결계가 많이 마음에 걸렸어요. 아무래도 교룡이 더 힘을 키우고 있는 상황인 듯한데, 그렇다면 주가 내부의 상황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때 먼저 선공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만에야 그녀에게 마른 입술을 열어 대답했다.

“그러면…….”

그러면?

‘뭐지? 역시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혹시 이 사람의 몸 상태가 생각보다 더 힘든 상황이라든가.

낮에 말한 것처럼 교룡이 스스로 자멸할 때를 기다리는 거라든가.

“그렇게 지금 개전하면, 그러면 그대가 정말로 선봉에 서게 돼.”

“네?”

백기하의 숨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떤 전장에서도 두려움을 몰랐던 그가.

“모두가 아까 전 강가주처럼, 당신에게 당연한 듯 교룡과 정면으로 싸워 상처 입을 걸 강요하겠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세화가 눈만 깜빡거리는 사이 백기하가 강하게 덧붙였다.

“내가 그 꼴을 어떻게 볼 수 있겠어?”

“당신.”

“내가 어떻게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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