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결계를 누가 펼칠 수 있을까.
가라앉은 백기하와 주세화의 시선이 그들이 주가를 떠나오던 순간을 떠올렸다.
마치 알을 깨듯 땅을 가르고 벗어나, 그곳에 있는 모두를 업화의 연옥 속에 처넣던 존재를.
불꽃을 등에 지고 요동치며 역한 사취를 흘리던 검은 강물 같던 교룡의 모습을.
그 교룡 외에 그런 결계를 아무런 자비 없이 펼칠 존재가 또 있을까.
‘나도 가족들의 죽음에 관계되었던 이들을 용서할 마음은 없어.’
하지만 그것이 주가 영지에 있는 모든 이들을 죽이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게다가 백가로 건너오며 채 데려오지 못했던 사용인들이 지금은 소개장을 통해 다른 주가 혈족들의 저택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이들은 대체 무슨 잘못이 있어 그런 곳에서 죽어 가야 한단 말인가.
백석저의 상층을 향해 계단을 오르는 세화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시종을 통해 각 가주들에게는 상황을 먼저 알리도록 한 후였다.
그럼에도 회의실로 향하지 않고 상층으로 향하는 이유는 백기하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교룡은 왜 이런 결계를 편 걸까? 신수들의 능력은 분명 대단하지만 영수일 때와는 다르게 해선 안 되는 일에 대한 경계가 명확해. 저렇게 마구잡이로 생명을 빨아들이는 일은 규칙에 어긋나고, 그건 제 목을 조르는 일과 진배없어.”
“인계에서 생명력을 취하던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요?”
“조금 달라. 그때는 직접 흡수한 것은 아니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계에서의 일은 날씨를 건드린 것밖에는 없는 상황이지.”
“하지만 이번엔 완연히 직접적으로 생명을 죽이고 있고, 그 행위가 오히려 교룡의 목숨을 곧바로 앗아갈 수도 있다는 말인 거죠?”
세화는 제가 신수로 변했을 당시 머릿속을 울리던 목소리 같던 것을 떠올렸다.
순리에 따르고 법칙에 순응하라고. 몸을 울리는 방식으로 그녀를 지배하던 어떤 절대 명제.
그게 모든 신수들에게 공통으로 행해지는 거라면 백기하의 의문이 이해되었다.
하여 그들은 회의 전에 그 의문을 해소해 줄 만한 이를 찾아 계단을 성큼성큼 걸었다.
가장 상층으로 올라, 흰 결계에 가려진 방 앞에 섰다.
일부인의 방이었다.
* * *
그들이 결계를 열고 들어갔을 때, 일부인은 여전히 술에 취한 상태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원하는 만큼 술을 내주라 지시를 내린 후라 그런지, 그녀의 발치에는 독한 냄새를 풍기는 술병이 몇 병이나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시녀들이 저것들을 치우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 아마도 단시간 내에 마신 양이 저만큼일 터였다.
발소리를 느낀 일부인의 시선이 천천히 그들에게 향했다.
“뭐야. 또 뭔데?”
“당신이 그랬지. 적룡의 영단이 있으면 교룡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그래서. 혹시 벌써 적룡의 영단을 손에 넣기라도 했다는 거니?”
기대감이라고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녀가 적룡의 영단을 얘기한 것은 며칠 되지 않았다.
신영의 검에서 적룡의 영단을 강탈해 오는 일이 이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 도발을 받아치는 대신 세화는 일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르륵.
일전 보주를 올려 보여 주었던 손 위에서 이번엔 붉은 영력이 회오리처럼 솟아올랐다.
일부인의 눈과 입이 더없이 크게 벌어졌다.
“!”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영단의 형태는 아니었으나 이 새빨간 영력이 무얼 뜻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한참이나 영력과 세화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가 의자에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말, 말도 안 돼. 그걸, 그걸 흡수했다고?”
“이럴 시간 없어. 당신의 아들이라는 교룡이 지금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까.”
세화가 백만용에게 받았던 서신을 탁자 위로 던져 놓았다.
하지만 일부인은 서신의 내용엔 조금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한참이나 세화를 감싼 붉은 영력을 응시하던 일부인이 우는 듯 웃는 듯 낮게 목을 울렸다.
“내가 이젠 정말 죽을 수 있겠구나.”
세화가 그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 그럼 얘기해 봐. 어떻게 해야 당신을 죽일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당신을 죽이고 저 교룡을 죽일 수 있는지 난 지금 그걸 알아야겠으니까.”
“방법은 간단해. 그 영단을 내게 줘.”
“뭐?”
“내가 그걸 먹으면 바로 죽을 수 있어. 그러니 내가 그걸 먹게 해 줘.”
눈을 깜빡거리던 세화가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딴 말을 하려고…….”
그녀의 눈빛이 단번에 곤두서며 가는 몸을 감싸고 흐르던 붉은 영력이 단번에 솟구쳤다.
“내게 이걸 가져오라 했단 말이야?”
죽고 싶다느니, 교룡이 자신을 모욕하기 위해 일부인의 지위에 앉혀 두었다느니.
독사 같은 혀를 놀려 놓고서는 한다는 소리가 결국 적룡의 영단을 갖고 싶다, 이거라고?
그런 세화를 향해 일부인이 빠르게 부인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정말이야.”
“웃기고 있네. 당신이라면 그 말을 믿겠어?”
죽고 싶다는 말도 다 거짓이고, 그저 영단을 원했던 것일 줄 누가 알겠는가.
그대로 의자를 뒤로 밀며 세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은 파기야. 감히 날 이렇게 실망시켰으니 똑같이 돌려주지.”
섬뜩한 빛이 번뜩이는 적자줏빛 눈동자로 일부인의 것을 응시하며 속삭였다.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영원토록 이어 가게 해 줄 테니 두고 보라고.”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 아니야! 정말이라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굴러떨어지듯 의자에서 내려온 일부인이 세화의 다리를 잡을 듯 다가왔다.
황급히 다가선 무사들에게 가로막히면서도 세화를 향해 간절히 손을 뻗었다.
“정말이야. 그러니 제발 그걸 내게 줘. 제발. 뭐든 할게. 그것만 내게 주면……. 정말이라니까!”
“…….”
“못 믿을 걸 알아. 하지만 정말 방법이 그런 걸 어떡해. 영력이 있어야 그놈 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내가 그놈의 손에서 벗어나야 뭐든지 말하고 그놈도 죽일 수 있어. 그러니 제발. 제발 부탁이야.”
일부인이 몸을 떨다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면 이렇게 하면 어때?”
“어떻게.”
“다 달라고는 안 할게. 그러니 내게 그 영력을 조금만 나눠 줘. 아주 조금이어도 돼.”
어이가 없어진 세화가 낮게 비웃음을 울렸다.
저 일부인의 눈에는 내가 바보 천치로 보이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기가 막힌 세화는 이젠 저 일부인이 뭘 어디까지 하는지 궁금하다는 투로 반문했다.
“나눠주면?”
하지만 일부인은 세화의 그런 반응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절박한 모습으로 한 마디 한 마디를 신중하게 꺼내 놓았다.
“그럼 보여 줄게.”
“그러니까 뭘.”
“신영의 팔부인 중 하나가 죽어 넘어가는 장면을.”
* * *
“저런 식이어서는 저 여자에게 제대로 된 정보는 기대하지 말아야겠어요.”
일부인의 방을 나와 회의실로 내려가며 세화가 씁쓸하게 말했다.
“되는대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일 줄 누가 알겠어요? 다른 이에게 물어봐야 할 텐데.”
“난, 그대만 괜찮으면 한번 시도해 보았으면 하는데.”
“네? 뭐라고요?”
“어차피 저 여자의 몸에 대단한 영력은 없어. 그러니 저 말의 진위를 파악해 보자는 거지.”
“…….”
“우리가 단단히 감시하면 되잖아. 설마 두 신수의 눈을 피해 일을 벌일 수 있으려고.”
“결과를 어떻게 확인하려고요? 지금 주가는 결계에 덮여 있어 그 안의 상황을 우리가 알 수 없는걸요.”
“아. 참. 그랬지.”
“게다가 그렇게 영력을 나눠 주다 저 여자도 신수로 탈피를 하게 된다면요.”
“그 영단에 담긴 힘이 그렇게 강해? 일부만 나눠 줘도 신수가 될 수 있을 만큼?”
“난 조금이라도 우리 쪽이 위험해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진 않다는 말이에요.”
적룡의 영단을 흡수하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이 힘으로는 분명 그 교룡과 비등하게 겨룰 수 있겠지.’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는 교룡에 비해 그녀에겐 지켜야 할 이들이 많았다.
그저 살육을 자행하면 되는 교룡과 달리 많은 이들을 지켜 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힘이 얼마나 부족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
만약 저 일부인이 그런 교룡을 도와주기 위해 제힘의 일부를 요구하고 있는 거라면?
“한번 나눠 주고 나면 투자한 것이 아까워 결과를 내기 위해서라도 요구하는 만큼 더 주게 될 수 있어요. 나는 확실한 증명이 없는 상태에서 저 술수에 말려들고 싶지 않아요.”
그녀에게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자 백기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교룡의 의도에 대해서는 우리끼리 생각을 해 보고. 일단 가주들을 만나 보자고.”
* * *
아직 새로운 가주를 정하지 못한 여가를 제외하고, 근신 중이던 진가를 포함해 오가의 수령들은 이미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시종들의 전언을 받았는지 모두의 표정이 제법 심각했다.
“영지선에 배치해 둔 무사단들에게서 죄 소식이 끊겼다는 게 사실인가.”
“이 악랄한 놈들이 끝까지 이런 짓을.”
“신영인가? 등극식을 마친 새로운 신영이 제 영향력을 보이기 위해 그따위 짓을 벌인 것이야?”
천가주와 장가주가 번갈아 묻자 백기하가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다.
“제가 말씀드렸던 그 교룡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뭐?”
“이젠 아무것도 고려치 않고 되는대로 제 힘을 늘릴 생각인가 본데. 저 교룡이 언제 결계를 깨고 나올지 모르니 군량과 무기를 모으는 일을 더 서둘러야겠습니다.”
백기하의 표정이 신중해지자 강가주가 어두워진 얼굴로 권했다.
“그럼 우리가 먼저 쳐야 하는 것 아닌가. 교룡이라고는 하지만 살아온 세월만큼 지닌 힘도 만만치 않을 텐데.”
“맞네. 그런 교룡이 원하는 만큼 힘을 얻고 나면 상대하기가 더 힘들어질 테니 말이야.”
천가주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첩자들에게서도 모두 소식이 끊겼고 결계 안쪽의 상황 역시 우리가 알 수 없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마지막 정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먼저 선공을 가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인 듯하네.”
“…….”
백기하는 뭔가를 고심하듯, 가주들의 그런 의견에도 대답을 망설였다.
간신히 근신을 풀고 나온 진가주는 언행을 조심하기 위함인지 섣불리 의견을 내진 않았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강가주였다.
그는 지난번 용으로 변한 세화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 말수가 줄더니, 이런 회의에서도 입을 통 열지 않았다.
모두가 침묵하자, 백기하의 결정을 기다리던 천가주가 회의실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던 세화를 보며 물었다.
“네 의견은 어떠하냐.”
“네?”
“지금 개전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말이다.”
당황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저는 직책이 없는데, 그리 중요한 일에 제 의견을 어찌 감히 올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가 겪은 일들을 육문의 가주분들께 말씀드리는 전달자로서 이곳에-.”
“아니,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 천주백장 소가주가 육문의 회의에서 발언권이 없다면 대체 누가 입을 열 수 있겠어.”
천가주가 목소리를 높였다.
장가주 역시 세화를 향해 충고하듯 덧붙였다.
“우리 백주천장 가모께선 조금 더 이 노인장들을 편하게 여겨 주시게. 육문이 한데 뭉쳤으니 우리는 모두 친족이나 다름없는데, 가족처럼 여겨 준다면 좋지 않겠는가.”
“장가주. 아직 혼례도 치르지 않은 아이에게 끝까지 가모라 부르는 겁니까. 게다가 어차피 장가는 가장 마지막인 것을 왜 다른 성씨의 순서까지 멋대로 바꾸는 겁니까.”
“그야 천가의 소가주는 장가의 편이 아닐 수 있지만 육문연합의 가모는 장가의 편이 아닙니까. 당연히 가장 처음에 넣을 수밖에요.”
“그 나이를 먹고도 네 편, 내 편을 따지며 편 가르기를 하는 겁니까? 나이를 먹으려면 곱게 먹어야지!”
그때였다.
천가주와 장가주가 싸우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걸어 세화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내 한 가지, 아가씨에게 물어볼 것이 있는데.”
내도록 회의에서 침묵하던 그가 다가오자 무슨 의도인지 몰라 세화도 제법 긴장했다.
“예, 강가주. 하십시오.”
“혹시 이걸 흡수해 줄 수 있겠는가. 내 영단이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