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254)

하지만 백만용을 따라가는 두 젊은 무장의 낯빛은 조금 얼떨떨했다.

대체 세화가 어쩌다 이렇게 빨리 백가의 가모가 되었단 말인가.

게다가 그들이 자리하지도 않았는데 혼인식을 끝내 버렸다고?

백가의 가주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그를 검증할 시간도 주지 않아 놓고!!

이해하기 힘든 일들은 그뿐이 아니었다.

“…….”

주가를 탈출해 이곳으로 오는 하루 간의 여정을 떠올린 형제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신수로 변한 백가주의 속도는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고.

하늘을 나는 그의 등 위에서 곤두박질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온 영력을 사용해 매달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속도에도 아랑곳없이 금방이라도 그들을 붙잡을 것처럼 따라오던 역한 시취와 끔찍한 비명들.

신수가 일으키는 바람의 힘으로도 쉬이 멀어지지 않던 화염의 열기.

그들이 세화의 백가행 소식을 듣고 달려가 동생과 아버지를 만난 것은 고작 두 달이 조금 안 되는 시간이었다.

마음엔 들지 않지만 백가주에게 동생의 치료를 부탁하고, 걱정하지 말라며 등을 떠미는 아버지와 인사한 뒤 그들이 있어야 하는 곳으로 복귀한 것이 고작 몇십일 전일 뿐인데.

‘대체 그 시간 동안 무슨 일들이 일어났던 것일까.’

“저희가 두 분이 사용하실 방을 준비해 두었으니, 네 분 모두 일단 식사를 하시고 조금 쉬었다가-.”

“아니. 저흰 지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아야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백 재상. 하니 쉬는 곳보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세화야. 백가주께서는 하루 내내 우리를 태우고 오시느라 힘드셨을 테니, 피곤하더라도 네가 우리에게 상황을 먼저 설명해 다오.”

“그래. ……가모, 라는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저 사내부터 좀 설명을 해 주겠느냐?.”

주가윤의 시선이 흘끗 그들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최장명에게 가서 꽂혔다.

“저 사내가 네 노, …예라고 하던데, 정말로 네가 저치를 노예로 들인 것이야?”

“예? 노예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단어가 두 형제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자 세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때였다.

“아니! 너 혼자 좋은 건 다 하려 하느냐!”

부리나케 튀어 나간 백만용이 최장명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가모님의 권속이면 권속이지, 어디서 노예라는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리느냐. 하나만 해야지,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가지고. 좋은 건 너 혼자 다 가지려 하는 것이냐?!”

“……??”

“……??”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최장명은 길게 듣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는 백만용을 무시하고 지나쳐 가던 그 순간, 최장명의 눈꼬리와 입 끝이 비죽 올라갔다.

그 의미가 아주 분명했다.

‘부러우면 뭐 어쩔 건데.’

“아니, 이놈이!”

“아가씨, 도련님들.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백석저의 응접실 위치를 알고 있으니 백가주께서 허락하신다면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소란스러운 복도를 몸으로 가리며 영채가 그리 말하자 모두가 불만 없이 그녀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뒤에서 무슨 진동이 일건, 무슨 소란이 이어지건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 * *

분명 저택에 도착한 것은 동도 트지 않은 시간이었건만.

“하여, 마지막에 보셨던 그 검은 용이 바로 교룡의 본체예요. 저희는 원하는 것을 다 얻었기에 서둘러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고요.”

이야기가 끝났을 땐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그들이 오해하지 않고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전후좌우 설명을 자세히 곁들인 탓이었다.

“…….”

“…….”

하여 그들은 그럴 리가 없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긴 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육문의 아이들의 실종 사건부터 전혀 그들을 찾아 종전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 신영의 태도까지.

뭔가가 계속 이상했다는 것을.

“……하면 소, 가주도 그렇게 끝나신 거냐?”

“아마도요. 신영이 검으로 적룡의 영력을 조종할 때 분명…….”

세화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내 영력을 담은 검을 주었는데.’

등극식장을 휩쓴 모래 먼지 속에서 검은 든 채 붉은 영력을 끌어 올리던 신영과 그 뒤에서 피범벅이 된 채 쓰러져 있던 주경현을 보았던 것이다.

‘신영과 마주할 때 꼭 들고 있으라 미리 당부했건만.’

몸을 빼앗긴 것도 모자라 결국 제 아버지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으니…….

“신영께서 그렇게 혈족들을 죽여 왔다니…….”

“하여 아버지께선 그런 몸 뺏기에 당한 이들의 가족을 만나러 가신 거라고?”

“오라버니들의 상관이셨던 자윤 원로께서도 영지에서 추방당하셨거든요.”

“뭐?!! 자윤 원로께서도?”

“그분의 딸 주수연이 신영의 부인 중 하나에게 몸을 빼앗기는 바람에…….”

놀란 눈을 채 깜빡이지도 못하던 두 무장이 쓰러지듯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하.”

“……어떻게 그런.”

“하지만 사실이에요.”

“그래. 네가 하는 말이니 응당 그렇겠지.”

그들이 느끼는 마음을 그녀라고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얼마나 자괴감이 들고 허탈할까.’

제 모든 시간과 노력을 바쳐 온 상대가 그런 악귀 같은 놈이라는 사실을, 이들에게 충격을 대비할 시간도 주지 못한 채로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미안할 뿐이었다.

“일단 오래도록 밀실에 계셨던데다가 어제는 하루 내내 식사조차 하시지 못하셨으니 조금 쉬세요. 영채와 최장명이 두 분의 방을 준비하러 갔으니 이곳에 계시다가 그들을 따라가시고요.”

“너도 식사를 못 했잖아.”

“저는 일단 신영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들을 육문의 가주분들께 알려야 해서요. 옷을 갈아입은 후 그분들을 먼저 만나고 그 이후에 하려고요.”

“……그래.”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음을 알았다.

“혹시 시간이 되면 저녁은 같이 먹자꾸나.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까.”

“좋아요. 제 얘기는 다 했으니 저녁엔 오라버니들께선 어찌 지내셨었는지 알려 주세요.”

무거운 화제를 피해 조금은 밝게 인사를 마치고 세화가 응접실에서 빠져나왔다.

문 옆에 기대 서 있던 커다란 그림자가 스윽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끝난 거야?”

“여기서 기다렸어요? 이럴 거면 들어오지 그랬어요.”

“내가 있는 것보단 그대 오누이들만 있는 편이 형님들께서 더 상황을 진실되게 받아들이실 수 있으실 테니까.”

“…….”

“왜. 형님들께서 많이 심란해하셨어?”

“아버지께는 시간을 들여 상황을 먼저 짐작하시게끔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으니까요.”

두 손을 맞잡고 문지른 그녀가 조금 씁쓸하게 답했다.

“너무 허탈해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잘 모르겠네요.”

“이리 와 봐.”

“네?”

“이쪽으로.”

풀 죽은 듯한 그녀를 잡고 이끈 백기하가 복도에 길게 이어진 문 하나를 열었다.

텅 빈 방 안에 문을 닫고 그녀의 몸을 제 품 깊숙이 안았다.

가는 몸을 힘주어 끌어안은 그가 눈앞에 드러난 작은 이마에 촉, 촉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뭐예요, 갑자기.”

“그대가 이상한 자책을 하니까.”

“자책, 이요?”

“응.”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왜 스스로를 탓해. 그대 탓이 아닌데.”

“…….”

“언젠간 모두가 알게 될 일이야. 형님들께 그대가 미안할 필요 없어.”

“그래도.”

씁쓸한 미소가 다시 한번 그녀의 입매를 가라앉혔다.

“그냥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돼요.”

당신이 목숨으로 만들어 준 기회를 내가 서툴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더 나은 방법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놓친 것은 아닌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계속 남기게 된다고. 그녀가 그런 말을 삼킬 때였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코와 눈가, 볼, 입가에 내려앉더니 이내 그녀의 붉은 입술마저 집어삼켰다.

“!”

이내 단단한 혀가 그녀의 입술을 가르며 들어왔다.

마찰은 급하지 않았다.

뜨겁고 미끈한 것은 그녀의 입안에 남은 말들을 아는 것처럼 달래듯 치열을 훑고 입안을 문질렀다.

그때마다 척추가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그녀의 등 뒤를 단단히 틀어쥔 커다란 손은 조금도 틈을 주지 않았다.

다정하게 안쪽을 더듬고 그 안에 든 것을 남김없이 가져간 그가 호흡과 신음마저 빨아들였다.

강하게 빨린 입술이 금방 선명한 붉은빛을 띠며 부풀었다.

도톰해진 입술을 핥으며 그의 혀가 빠져나갔을 때는 한 마디도 되지 않는 간격 사이로 농밀하게 열기가 들어찬 호흡들이 오가고 있었다.

굴곡진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몸에 바짝 붙인 그가 아쉬움을 드러내며 몇 번이고 그녀의 입술 위에 다시 제 입술을 가져다 눌렀다.

“잘하고 있어, 그대는.”

진한 욕망이 낮게 깔린 목소리가 제 안의 다정을 끌어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이전과는 많은 게 달라졌지. 신영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있고, 교룡의 존재마저 세상에 드러났어. 그 일에 어찌 그대의 공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 온전히 그대의 손안에서 일어난 일인데.”

내리깔려 있던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그 말에 위로 올라왔다.

그의 새까맣고 따뜻한 눈동자와 서로를 마주 봤다.

“무엇도 돌아볼 필요 없어. 지나간 일은 그것으로 잊어버려. 이미 우리에겐 그것이 아니어도 해야 할 일들이 있잖아. 그대는 지금까지도 잘해 왔고 남은 일들은 더욱 멋지게 끝낼 거야. 난 그걸 알아.”

“어떻게, 알아요?”

“사랑하니까.”

백기하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장인이 공을 들여 만든 듯 비율이 완벽한 수려한 얼굴 위로 따뜻한 미소가 들어차자, 그의 섬세한 외모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세화마저 잠시 넋을 빼앗길 정도였다.

“그리하여 늘 그대만 보고 있으니까.”

“…….”

“그래서 그대보다 내가 더 잘 알 거야. 그대가 얼마나 잘해 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는지.”

젖어 드는 눈을 숨기느라 아래로 내려진 눈꺼풀 위로 그가 다시 한번 뜨거운 입술을 번갈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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